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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서 무엇을 맨 먼저 할까 하고 잠자리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몇 분쯤 가만히 눈을 감고 하루를 그린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미적거리려고 하는 몸짓이 아니라 하루를 길고 즐겁게 누리려는 몸짓이에요. 게으른 몸짓이 아니라 하루 살림을 새롭게 지으려는 몸짓이고요.

어제는 여러 날 미룬 빨래를 잔뜩 하며 아침을 열었어요. 며칠 동안 사월비가 주룩주룩 내린 탓에 미룬 빨래였기에 꽤 많았어요. 빨랫감이 많구나 싶어 다 하지는 않고 좀 남겼습니다. 아침에 신나게 빨래를 하고, 밥을 지어서 먹인 뒤에는 살짝 등허리를 펴고는 온 식구가 들길을 걸었어요. 여러 날 사월비가 내린 들판은 유채꽃이 활짝 터졌거든요.

그래서 들길을 한참 걸어서 면소재지까지 제법 먼 길을 걸었습니다. 마침 4월 8일하고 9일에 걸쳐서 '미리 투표하기'를 할 수 있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아침 빨래를 하고 아침밥을 즐겁게 먹고는 옥수수 씨앗을 밭 가장자리를 따라서 심자고 생각해 봅니다.

잘못 온 편지를 읽고 운 적이 있다 (몸의 애인)

어떤 말을 하면 울고 난 것 같다 // 어린 개가 칭얼거린다, 간결하고 간절하게 (우상의 피조물)

겉그림
 겉그림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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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이끌고 유채꽃 들길을 걷다가 다리쉼을 하는 사이에 <인간이 버린 사랑>(문학과지성사,2016)이라는 시집을 살짝살짝 읽었습니다. 봄들마실하고 어울릴 만한 시집인지 아닌지는 딱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사람이 버린 사랑'을 이 봄들에서 읽을 만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어요.

그렇지만 어느 한 '사람이 버린 사랑'이 있으면 어느 한 '사람이 새롭게 심는 사랑'이 있으리라 느껴요. 사랑은 버려질 수 없으리라 느끼기도 해요. 왜냐하면, 사랑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는 그이 목숨을 버리는 셈일 테니까요. 이 땅에서 더는 살고 싶다는 마음이 없을 때에 그만 사랑을 버리고 목숨까지 내려놓는 셈일 테니까요.

육체는 빛을 이해하기 위해 그림자를 드리운다 // 나는 직업이 죄인이다 / 누구보다도 죄를 잘 짓는다 (푸른 손의 처녀들)

기억으로 / 숲이 우거지면 / 다 / 잊혀진다. (부제―무제)

1988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이이체 님은 한창 대학원을 다니면서 배움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이제 막 푸른 숨결로 새로운 살림을 짓는 젊은 손길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이이체 님이 우리한테 싯말로 들려주려고 하는 노래는 '사람이 버린 사랑'입니다.

다시 들길을 걷고, 또 다리쉼을 하고, 거듭 들길을 걷다가, 면소재지에 닿아 투표를 하고는, 다시 다리쉼을 하는 사이에 살짝살짝 시집을 더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새롭고 푸른 꿈이랑 사랑을 키울 만한 젊은 넋은 왜 '사람이 버린 사랑'을 자꾸만 마음 속으로 그려야 할까요?

젊은 시인 이이체 님 마음자리에 생채기나 아픔이나 응어리나 피고름이나 멍에나 앙금이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직 생채기나 아픔이나 응어리나 피고름이나 멍에나 앙금을 짊어지거나 떠안아 보지 못했다고 여겨서 이러한 것들을 가슴 가득 품고서 '이웃사랑'을 헤아려 보고픈 마음일까요?

마음을 가진 자에게서, 사랑은 언제 죽을까 / 사랑을 모르던 때에 만났던 사랑을 /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피 흘리며 태어나는)

모든 이름은 가명이다 / 모순은 완벽하다 (누설)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아픔을 모르기 마련이라고 느낍니다. 열흘 동안 몸져누운 채 꼼짝을 못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나날을 알기 어려워요. 여러 해 동안 몸져누운 삶을 겪어 보지 못했다든지, 또는 서른 해 남짓 아픈 몸을 이끌고 살림을 꾸려야 하는 삶을 겪어 보지 못했다면, 이러한 나날을 마음 속으로만 그리기도 쉽지 않아요.

'사람이 버린 사랑'을 알자면, 아무래도 스스로 사랑을 버려 보아야겠지요. 내가 사랑을 버리든, 내 곁에서 누군가 사랑을 버리든, 나와 네가 함께 사랑을 버리든, 또는 이 지구별 숱한 사람들이 사랑을 버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든 할 때에 비로소 '사람이 버린 생각'을 몸으로 느낄 만하리라 생각해요.

우리 사회는 젊은 넋한테 '짓는 사랑'이 아닌 '버리는 사랑'을 떠넘기는 얼거리는 아닌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우리 사회는 젊은 넋이 젊은 넋답게 살림을 짓도록 북돋우기보다는, 젊은 넋한테 수많은 짐덩어리를 얹는 얼거리일 수 있겠다고 헤아려 봅니다. 입시지옥이나 학원지옥뿐 아니라 교통지옥도 있고 취업지옥도 있어요. 오늘날 사회에서는 첨단문명이 눈부시기는 하지만, 어디에나 '이런 지옥'하고 '저런 지옥'도 잔뜩 있어요.

일 년이라는 것은 그저 계절들이 차례대로 미치는 단위에 지나지 않는다. 찬란한 물이 고체의 언어를 발음할 때부터, 비로소 우리는 기형에 짓밟힐 수 있었다 (살해된 죽음)

살을 섞고 삶을 나누던 기억 / 당신을 잊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 망각까지 잊을 수는 없다 (물의 누드)

아이들하고 유채꽃 봄들길을 가로질러서 면소재지에 투표를 하러 가는 길에 시집을 읽습니다.
 아이들하고 유채꽃 봄들길을 가로질러서 면소재지에 투표를 하러 가는 길에 시집을 읽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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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큰아이한테 옥수수 씨앗 여섯 톨을 건넵니다. 먼저 큰아이더러 혼자서 심어 보라고 얘기합니다. 네 온 사랑을 담아서 씨앗을 심으라고 속삭입니다. 이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서 우리 보금자리를 곱게 밝혀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심으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 집에서 함께 마음을 섞고 생각을 섞습니다. 우리는 이 보금자리에서 함께 손길을 나누고 꿈길을 걷습니다. 나는 아이한테 건네는 손길을 늘 마음에 아로새깁니다. 아이도 어버이한테서 받는 손길을 늘 마음에 되새겨요.

당신이 나에게 말했다. / 바람은 늘 누군가와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 같아 (편애, 사랑에 치우치다)

봄바람이 붑니다. 따스합니다. 곧 여름바람이 불면 시원하겠지요. 이내 가을바람이 불면 상큼할 테고요. 다시금 겨울바람이 불면 추울 텐데, 추운 겨울에는 서로 옷을 나누어 입고 이불을 함께 덮는 살붙이가 있어서 포근합니다.

바람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나무는 풀을 사랑합니다. 풀은 흙을 사랑합니다. 흙은 풀벌레를 사랑합니다. 풀벌레는 구름을 사랑합니다. 구름은 해님을 사랑합니다. 해님은 다시 바람을 사랑해요. 사람은 이 모든 사랑 사이에서 가만히 꿈을 지어서 살림으로 잇습니다.

가볍게 부는 사월바람에 민들레 씨앗이 가볍게 꽃대에서 떨어져서 나풀나풀 날아오릅니다. 노란민들레씨도, 흰민들레씨도, 저마다 사뿐사뿐 바람을 타면서 이곳저곳 흩어집니다. 오늘 하루도 아이들하고 새로운 들길이나 숲길을 걸어 보자고 생각하면서 작은 시집을 덮습니다. 그리고 내 손에 새로운 시집 하나를 품고서 씩씩하게 이 봄을 누리자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인간이 버린 사랑>(이이체 글 / 문학과지성사 펴냄 / 2016.3.25. / 8000원)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yes24.com/hbooklove)에 함께 올립니다.



인간이 버린 사랑

이이체 지음, 문학과지성사(2016)


태그:#인간이 버린 사랑, #이이체, #시집, #시읽기,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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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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