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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양천구 목동에 위치한 진명여고는 1906년 설립되어 1989년까지 청와대 바로 앞인 종로구 창성동에 위치해 있었던 명문여고다. 시인 노천명을 비롯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등 일제시대부터 유명인사들이 이곳을 졸업했으며, 탤런트 전양자, 아나운서 신은경, 국회의원 임수경 등이 이곳을 졸업했다.

진명여고는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비(순헌 황귀비 엄씨)가 조카인 엄준원에게 땅을 하사해 설립한 학교이다. 그리고 진명(進明)은 '나아가서 밝힌다'는 의미로 개교이래 학교의 교육방침인 진덕계명(進德啓明) 즉 '덕을 쌓고 학업을 닦아서 나의 빛으로 겨레와 온누리를 밝게 비춘다'는 뜻의 약어이다.

영친왕 생모인 엄귀비의 손길이 닿은 세 개의 학교

 일명 ‘백선’으로 불리는 진명여고 표찰로 줄이 두 개인 것은 양정의숙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학교라는 의미이다(출처 위키백과)
 일명 ‘백선’으로 불리는 진명여고 표찰로 줄이 두 개인 것은 양정의숙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학교라는 의미이다(출처 위키백과)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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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는 이렇듯 당시 국운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우치고 여러학교 설립에 기여하는데, 양정의숙(1905, 현 양정고교)과 명신여학교(1906, 현 숙명여대) 역시 그의 손길이 미쳐 있다.

그래서 이들 세 학교를 황실학교, 양반학교 또는 오누이학교라 불렀으며, 같은 탯줄에서 태어났기에 교표와 별도로 교복에 학교 표찰로 세 학교를 구분하였다. 이 표찰은 일명 백선(白線)이라 불리며 표찰 속에 그려진 선의 숫자는 설립순서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정은 한 줄, 진명은 두 줄, 명신은 세 줄이다. 이러한 백선은 이들 학교의 뿌리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여 지금도 해당 학교들의 교복에 별도의 표찰로 달려있거나, 교복의 무늬로 디자인되어 남아 있다. 한편 진명여고는 학교축제의 이름 조차 '백선제'이다.

 한양도성도(1750)에 나타난 진명여고 앞 물길, 대은암천과 서금교(노란색 부분)
 한양도성도(1750)에 나타난 진명여고 앞 물길, 대은암천과 서금교(노란색 부분)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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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리적으로 진명여고 앞으로 흘러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는 대은암천이라는 물길이 있는데 이 물길을 타고 흘러 들어간 물이 경회루 앞 넓은 못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물길이 경복궁 담장으로 들어가는 곳에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궁궐 안의 금천으로 들어가는 서쪽 물길에 있는 다리라 하여 '서금교(西禁橋)' 또는 '서금다리'라 불렀다.

이 다리를 '서근다리'라고도 불렀는데 그것은 소리나는대로 불러서 그런 듯하다. 뿐만 아니라 1908년 <관보> 등에는 석은교(石隱橋)로도 표기되어 있다. 이렇게 발음이 변해오다 급기야 '썩은다리'로 불리기까지 하여 그 억울함을 이야기하는 글이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이 실리기까지 했다.

"서십자각 모퉁이에서 육상궁을 향하고 올라가려면 영추문을 막 지나서 돌다리 하나가 있습니다. 튼튼하고 보기 좋으나 썩은다리라는 이름을 갖기 때문에 창성동 명물이라 합니다."

 동아일보(1924.7.25)에 기사화된 서금교
 동아일보(1924.7.25)에 기사화된 서금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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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로 인한 학교생활의 제약

1989년 이 학교는 현재의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였는데, 그 이전 이유에는 도시공동화로 인한 입학생의 감소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것 못지 않게 청와대 옆이라는 지리적 요인 또한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 교도주임이었던 교사 조연희의 말에 의하면 운동회 때 박수를 치면,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각하께서 오수를 즐기시는데 박수 좀 자제하면 안되냐'고, 청와대에서 어떤 분들이 나와" 통제하였다는 것이다. 또 졸업식 때면 고 3학생들이 반별로 파티를 하고 그 뒤 아이들이 즐거워 옥상에 가서 사진도 찍고 싶어하는데, 사진도 못 찍게 했다고 한다. (참고 자료: <사대문 안 학교들, 강남으로 가다>,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뿐만 아니라 시내 중심 3200평의 작은 학교라 운동장이 너무 좁아 옥상에 올라가 무용도 하고 체육도 하고 그랬는데 박정희정권 말기부터 점차 통제가 심해져 옥상 올라갈 때마다 청와대의 허가를 받고 올라가고 평소 때는 열쇠로 꽁꽁 잠가 놓았다고 한다. 하다 못해 옥상에 국기게양대가 있는데 태극기 올리고 내리는 것 조차 힘들어 아예 나중에는 국기게양대를 2층으로 내려놓았다고 한다.

1970년대 중후반 박정희정권의 서울 인구 분산정책으로 사대문 안 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해 갈 때 조차 안 떠나고 경복궁 옆 창성동에 있었지만 더 이상 쉽지 않았던 것이다. 급기야 전두환정권 때 목동으로 이전해 달라는 권유가 들어왔다. 이러한 외적 요인에 공간적 비좁음과 도시공동화 등의 이유가 겹치면서 결국 현재의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 황실 엄귀비의 지원 속에 설립된 학교로 '황실학교'라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또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현재의 황실인 청와대에 의해 창성동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황실학교의 자리에는 청와대 기동경찰대가 입주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진명여고를 졸업한 학생들이 학교의 상징처럼 생각해 온 운동장에 있던 커다란 고목 홰나무도 사라지고 없다.

평민에서 최고의 후궁 '귀비'로 오른 비운의 엄귀비

 엄귀비(1911년. 출처 위키백과)
 엄귀비(1911년.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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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귀비는 8세에 입궐해서 민비의 시위상궁으로 있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었다. 민비의 질투에 의해 궐 밖으로 쫓겨났지만,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은 뒤 불안과 고독에 빠진 고종은 엄상궁을 다시 불렀다. 그 후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시며 이듬해 42세의 나이에 영친왕을 낳아 후궁이 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설립한 고종은 엄씨를 황후로 세우려 하였지만 엄씨의 신분이 평민인데다 숙종이 세워놓은 법도 즉,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결국 황후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엄씨는 황후 바로 아래이자 후궁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인 '황귀비'의 직책을 받게 된다.

이렇게 그녀가 귀비의 칭호을 받게 된 것은 엄상궁이 황후가 되지 못하자 다른 칭호를 정해야 했는데 당시 내장원경 이용익이 당나라 양귀비의 예를 들어 '귀비'라는 칭호를 올린 것이다. 처음에 황후가 되려 했던 엄상궁은 이를 반대했지만 '황후가 못 될 바엔 미녀인 양귀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어 받아들였다고 전한다.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1907년, 출처 위키백과)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1907년,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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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은 같은 해 조선을 방문한 이토히로부미에 의해 인질로 일본에 끌려 갔으며, 그곳에서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군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여성 이방자와 강제로 결혼하였다. 하지만 정략결혼임에도 둘 사이는 좋았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이렇게 볼모로 일본생활을 해야만했던 영친왕은 해방이 되어서도 국내 반대세력으로 못 돌아오고 떠돌다가 1963년에 이르러서야 어렵게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 살다가 1970년 사망하였다.

한편 아들 영친왕이 일본에 끌려가 일본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장면이 촬영된 필름을 보던 중 주먹밥을 먹는 장면을 보고 엄귀비는 애통해 하다가 먹던 떡이 급체하기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그 후 엄귀비는 1911년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고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번지인 홍릉공원 내 영휘원에 안장되었다. 한편 그녀의 위패는 현 청와대 부지 안에 위치한 육상궁에 모셔져 있다. 황후가 못된 이상 종묘에 봉안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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