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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지방선거 때의 경험이다. 투표소에 들어서 신분증을 보여준 후 선거인 명부에 서명하려는 순간, 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성별-남'.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푹 숙인 채 얼른 서명을 마쳤다. 왠지 모를 속상함과 씁쓸함 속에서 투표를 마쳤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이 다소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성별란에 남/녀가 적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존재하고 나 역시 그중에 한 명이다. 나는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이다.

성별 요구하는 사회, 8년이 지나도록 변함 없는 이 비율

대니쉬걸  트랜스젠더 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의 삶을 그린 영화, 대니쉬 걸
▲ 대니쉬걸 트랜스젠더 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의 삶을 그린 영화, 대니쉬 걸
ⓒ 워킹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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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는 출생 시 지정받은 성별과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성별정체성)이 다른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트랜스젠더가 외모, 옷차림, 행동거지, 사람과의 관계 등을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맞게 변화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트랜지션(transition)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트랜스젠더에 대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지만, 트랜지션은 어느 한순간에 마치 마법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주변의 친한 이들에게 커밍아웃하는 것부터 일상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수술 등의 의료적 조치를 받는 것까지 다양한 과정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때로는 평생에 걸쳐 트랜스젠더는 자신이 바라는 삶의 모습을 조금씩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하게 부여된 남/녀라는 성별과 너무나도 까다로운 법적 성별정정의 요건 앞에서, 많은 트랜스젠더는 신분증 상의 성별과 사회 속에서의 성별이 괴리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일상적으로 생활하는데 있어서는 여성으로, 적어도 남성은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여전히 1로 시작하고, 신분증을 제시하는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난감함에 빠지곤 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성별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드러내도 되는 정보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숫자 하나만으로 성별이 파악 가능한 주민등록번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개인정보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져 가급적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지 않는 요즘에 이르러서도 성별은 당연히 표시되거나 기재해야 할 정보로 여겨진다.

취업, 공공 서비스, 금융 업무 등과 같은 공적인 부분에서부터 인터넷상의 카드 결제, 술집 등에서의 신분증 제시와 같은 아주 일상적인 부분에서까지. 성별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 많은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본인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고 결국 꼭 필요한 업무조차 포기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 중에는 선거 투표도 있다.

본인 확인을 위해 요구되는 신분증 제시와 서명·날인해야 하는 선거인명부상의 성별란, 이중으로 가해지는 부담은 트랜스젠더의 선거권 행사를 실질적으로 가로막는다.

2006년 '성전환자 인권실태조사 보고서'에서 트랜스젠더 응답자 74명 중 34.2%가 선거투표에 곤란을 겪는다고 응답하였는데,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실태조사'에서도 트랜스젠더 응답자 60명 중 36.7%가 신분증 제시로 인해 선거 투표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였다. 8년이 지나도록 변함없는 이 비율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주는 것일까.

법적 성별은 개인을 드러내지 못한다

성별  성별
 법적 성별만으로는 그 사람의 성별정체성도, 신체적 조건도 온전하게 드러내주지 못하며,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성별과 성별란 기재의 불일치로 한 번 더 본인을 확인해야 하는 등 신원확인에 지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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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인 명부에 성별란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신원 확인이다. 선거인을 확정하고 이중 투표 등을 방지하기 위해 선거인 명부를 만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를 통한 선거인의 신원확인은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신원확인에 있어 성별이 과연 필요한가'하는 의문이 든다. 이미 선거인명부에는 이름, 주소, 생년월일이 나와 있고 이들 정보만으로도 그 사람을 식별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다. 이름, 주소, 생년월일이 동일하면서 성별만은 다른 그런 두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한, 사실상 개인 식별을 위해 성별은 필요치 않다.

게다가 성별란에 기재된 법적 성별은 오히려 개인의 정확한 신원을 드러내지 못한다. 가령 성별란에 '남'이라고 되어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은 비트랜스젠더 남성일 수도 있지만 성별을 정정한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일 수도 있다. 또 나와 같이 성별을 정정하지 않은 MTF 트랜스젠더이거나, 아니면 남성도 여성도 아닌 성별정체성을 지닌 젠더퀴어(Genderqueer)일 수도 있다.

이처럼 법적 성별만으로는 그 사람의 성별정체성도, 신체적 조건도 온전하게 드러내 주지 못하며,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성별과 성별란 기재의 불일치로 한 번 더 본인을 확인해야 하는 등 신원 확인에 지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선거인 명부상 성별란의 또 다른 필요성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성별에 따른 투표결과의 분석일 것이다. 연령별, 지역별, 성별에 따른 투표율과 투표 성향 등을 분석하여 향후의 선거 제도 운용에 있어 활용하는 것은 정책적으로도 충분한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공공 목적을 위해 성별 정보를 활용한다 해서 그것을 개인에게 공개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투표소에 비치하는 선거인명부상에는 성별 표기를 하지 않고 추후 분석 시에만 성별정보와 연동하는 방법도 충분히 가능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투표를 하는 데 있어 법적 성별이 확인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투표를 주저하게 하는 성별 표시, 그래도...

역대 최장 길이의 투표용지 1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한 인쇄소에서 4·13 총선 투표용지를 선관위 직원이 자로 재어보고 있다. 20대 총선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 투표용지는 21개 정당에서 후보자를 등록해 역대 최장 길이인 33.5센티에 이른다.
▲ 역대 최장 길이의 투표용지 1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한 인쇄소에서 4·13 총선 투표용지를 선관위 직원이 자로 재어보고 있다. 20대 총선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 투표용지는 21개 정당에서 후보자를 등록해 역대 최장 길이인 33.5센티에 이른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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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7일부터 29일까지 선거인 명부 열람 기간이었다. 구청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한 나의 선거인명부에는 (남)이라고 적혀 있었다. 성별에 양괄호를 붙인 것이 헷갈리지 않게 하려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의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번 총선에서도 나는 뒷자리 1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가 적힌 신분증을 제시하고, '성별-남'으로 적힌 선거인명부에 서명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당당해지자고 맘을 다잡으면서도 때때로 지긋지긋하단 생각이 드는 이런 현실 속에서, 앞서 조사들에서 나온 투표를 포기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혹 이 글을 보는 트랜스젠더들이 모두 이번 선거에 참여했으면 한다. 그것은 선거참여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다소 거창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저 이를 통해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음을, 살고 있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지난 선거 때와는 다른 것이 있다. 적어도 이번에는 조금 더 선거를 즐겨 보리라는 마음이 든다.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니 말이다. 그래, 이번 선거일에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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