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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현대인에게는 일상의 공간이기도 하면서 사적인 욕망들이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미술사에서도 화이트 큐브는 미술의 성공과 작품의 가치를 드러내는 완전 권력, 욕망의 공간이죠. 저에게 방과 큐브는 약간 일그러진 욕망의 응축판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아요."

사적인 공간이 과연 사적인 공간인가 물음에서 시작하여 현대인의 내면과 외면을 탐구하는 룸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는 작가가 있다. 그는 2014년부터 성서의 7대 죄악(혹은 욕망)인 탐식, 탐욕, 태만, 욕정, 교만, 시기, 분노를 모티브로 작업하며 Pride, Gluttony, Sloth 차례차례 욕망의 방을 늘려가고 있다.

서교예술실험센터, 동대문옥상천국DRP 등에 이어 1월 송은아트큐브에서 <ROOM SWEET ROOM> 개인전을 마친, 설치미술가 고재욱을 지난 2월 27일에 만났다. 고양레지던시 입주가 결정되면서 기존 작업실을 떠나 새 방을 얻은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을 "설치 작업을 베이스로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설치미술가 고재욱
 설치미술가 고재욱
ⓒ 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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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욱은 2009년부터 본인의 포트레이트 사진을 국내외 각지에 있는 불특정 타인에게 보냈다. 그러면 그들은 작가의 포트레이트 사진과 팔짱을 끼거나 자신들의 식탁에 앉히는 등 함께 있는 모습을 촬영한 뒤, 작가에게 다시 전해줬다. <On Your Mark>(2009~) 프로젝트다. 대중이 작가의 작품 속으로 들어오는 작업의 시작이다.

"관계에 서툴렀어요. 사람들의 관계에 억지로 끼어드는 거죠. 관계를 맺고 싶은데 선뜻 나서지를 못하니까."

작업의 연장선은 <Never Let Me Go>(2013) 프로젝트다. 헤어진 옛 연인의 물건을 작가가 3개월 동안 보관해주는 작업으로, 인터넷상에서 신청을 받아 작가가 보관한 뒤 기한이 지나면 되돌려주는 작업이었다. 3년 전 헤어진 여자 친구와 관련된 물건을 보관하고 있던 차에 동병상련의 친구와 술 마시며 이야기할 때 나온 아이디어다.

"저는 되게 좋았어요. 눈에 안 보이니 3개월간 편한 마음으로 있었죠. 이런 삶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어요. 인터넷에서 신청 받을 때, 물건에 얽힌 사연을 알려주거든요. 치유보다는 물건과 떨어질 기회를 주면서 생각을 정립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거죠."

난감한 상황도 있었다. 물건을 맡긴 사람이 3개월 뒤, 헤어진 애인에게 대신 전해달라는 경우다.

"헤어진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에게 저보고 대신 전해달라는 분도 있어요. 맞은 적도 있고요. 그걸 실행할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연인이 함께 생산해낸 컵이나 음반 등의 물건에 관한 프로젝트도 구상 중입니다."

KARAOKE BOX_2013_mixed media_120x120x180cm
 KARAOKE BOX_2013_mixed media_120x120x1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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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는 작가가 선곡한 곡이 반복되는 큐브 노래방 <DIE FOR>(2013), 동전 노래방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과시하고 싶은 욕망 <KARAOKE BOX>(2013)을 작업한다. 그리고 그해 말, <RENTABLE ROOM>(2014), 이동식 대실(3시간)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얻고 2014년에 작업하여 작가가 생각하는 사회의 문제점에 관해 보고 지나치는 것만이 아닌 연인이 직접 참여해서 느낄 수 있도록 했다.

《RENTABLE ROOM》 project_2014_mixed media_200x200x200cm
 《RENTABLE ROOM》 project_2014_mixed media_200x200x200cm
ⓒ 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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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거루족이면 '부모 집에서 살면 돼'라고 답할 수 있지만 연인이라고 하면 기를 쓰고 둘만이 있을 공간을 찾아요. 20~30대 연인을 주인공으로 하면 대한민국의 부조리한 이야기를 다 이야기할 수 있더라고요. 실업, 주거 문제뿐만 아니라, 성비, 성차별 이야기까지. 동성애자와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오셔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좋았습니다."

<RENTABLE ROOM> 프로젝트에서 그는 화이트 큐브에 검은 천을 덮었다.

"복합적인 의미를 주고 싶었어요. 다 덮으면 관처럼 보이거든요. 그때는 제가 솔로라서(웃음). 연인들이 방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과연, 행복하기만 한 일일까?' 뉘앙스를 주기 위해서 했고, 실질적으로는 방음이 되는 두꺼운 천이죠. 빨간색으로 덮어서 관능적인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참여자들도 잠시 있는 공간이지만 '죽어있는 공간도 많구나' 한 번쯤은 생각할 수 있게."

Eric Arthur Blair_2015_mixed media_185x185x185cm
 Eric Arthur Blair_2015_mixed media_185x185x18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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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ROOM SWEET ROOM> 개인전에서 <RENTABLE HOUSE>(2015) 등 그동안의 작업물을 이동식 큐브로 선보였다. 소설가 조지 오웰의 본명에서 빌린 <ERIC ARTHUR BLAIR>(2015)는 반거울 큐브로 사람이 다가오면 센서가 반응해 불이 들어온다. 이때 내부의 침실이 드러난다.

"<1984> 소설을 보면서 소름 끼쳤던 것은 빅 브라더의 존재보다도 도피 중인 남자 주인공이 발각되는 모습이에요. 그가 도피하기 위해 할렘가 어느 방을 구했는데, 그곳에서 여자주인공과 밀회 중에 잡혀요. 그런데 그 공간이 발각되어서 잡히는 것이 아니에요. 벽에서 소리가 나는 거예요. '나와!' 처음부터 이탈하는 사람을 잡기 위해 트릭처럼 설치되었던 공간이었죠. 안전하다고 믿었던 사적인 공간이 사실 처음부터 아니었던 거죠. '우리에게 사적인 공간이 정말 사적인 공간일까?'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조지 오웰은 인도 미얀마에서 제국경찰로 근무하면서 식민체제와 제국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절감했다.

"에릭 아서 블레어는 시스템 비판에 관한 글을 필명 조지 오웰로 발표했죠.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식인으로서의 부끄러움 때문에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싶다는 태도라고 봐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가 감추고 싶었던 개인의 가장 사적인 아이덴티티인 이름을 드러내서 저의 작업과 매치시켜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Protective Coloring》-Sloth_2015_mixed media_200x200x200cm
 《Protective Coloring》-Sloth_2015_mixed media_200x200x200cm
ⓒ 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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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tective Coloring》-Pride_2015_mixed media_240x240x240cm
 《Protective Coloring》-Pride_2015_mixed media_240x240x240cm
ⓒ 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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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tective Coloring》-Gluttony_2015_mixed media_240x240x240cm
 《Protective Coloring》-Gluttony_2015_mixed media_240x240x240cm
ⓒ 고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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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만을 강조한 주거 형태 덕분에,
기존의 공간이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역할들은
별도의 상업시설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습니다.
그 역할을 양도받은 상업시설들 또한 자본의 논리를
충실히 따라 가장 저렴하고 효율적인 방식을 택하기 때문에,
결국 또 다른 기형적인 기능을 가진 방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 작가노트

노래방, 주점, 게임방을 재현한 <Protective Coloring>(2015)는 Pride, Gluttony, Sloth 부제가 붙은 보호색을 띠는 이동식 큐브다. 현대사회에 들어 주거공간이 마당이 있는 집의 형태에서 아파트 형태로 변모하면서 나타난 억압된 현대인의 욕망을 이야기하고자 한 작업은 또다른 큐브, 미술관 안으로 들어왔다.

"성서에서 7대 욕망이라고 하잖아요? 저는 그게 나쁘다기보다는 욕망 하나하나를 부제로 잡았어요. 이것도 삶의 영역이잖아요? 삶의 형태가 미술관 안에서 작품으로 전시되는 게 아닌 개념적으로나마 삶의 형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사실 불가능하거든요. 개념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흰색을 칠했는데 그게 또 화이트 큐브가 되는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큐브 안에 들어가 보면 깨지거나 흠이 난 부분도 있지만 일부러 외벽은 굉장히 깨끗하게 설치했어요."

<Welcome to Coesfeld>(2010), <오빠생각>(2015) 영상작업을 한 그는 지금 새로운 영상을 준비 중이다.

"한국이 딱 일본의 20~25년 전의 모습이라고 보면 굉장히 흡사해요. 정치, 경제 거의 모든 면에서요. 일본의 경제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부동산 버블이 80년대 터졌죠. 장기불황의 길에서 허덕이는거죠. 그런 중에도 일본 지식인들의 노력은 있었어요. 지금의 한국 모습과 흡사해요. 25년 전 일본에서 유학했던 사람의 이야기예요. 남편이 일본에서 유학할 때, 아내와 아이들이 일본을 찾아서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죠. 현재의 한국과 과거의 일본, 그리고 지금의 일본이 교차하면서 한국이 어떻게 나갈지를 보여줄 거예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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