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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카트만두 외곽 마차포카리(Machapokari)에서 아침 8시 20분 출발한 버스는 다딩(Dhading) 인근을 경유해 8시간이 지난 오후 3시에 산마을 샤브르베시(Syabrubesi, 1460미터)에 도착했다.

긴 시간 버스의 무더위에 흠뻑 젖은 몸을 씻어낸 후 샤브르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언덕에서는 지진의 여파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흙과 크고 작은 바윗돌들이 흘러내려 산 아래 집들이 부서지고 탑(스투파, Sutupa)에도 금이 가고 부서져 있었다. 그럼에도 산마을은 고요하고 일상은 평화로웠다.

랑탕 마을을 가는 길에 무너진 집들이 여전히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꿈은 맑았다. 멀리 산언덕에 지진 이후 일어난 산사태로 하얗게 변한 산언덕을 볼 수 있었다.
▲ 랑탕 마을 가는 길에 무너진 집 랑탕 마을을 가는 길에 무너진 집들이 여전히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꿈은 맑았다. 멀리 산언덕에 지진 이후 일어난 산사태로 하얗게 변한 산언덕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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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르베시에서 만난 인연과 지진 이후 첫 인사를 나누었다. 샤브르베시에서부터 무너져내린 길을 다시 세우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 샤브르베시에서 오래된 인연을 다시 만나다 샤브르베시에서 만난 인연과 지진 이후 첫 인사를 나누었다. 샤브르베시에서부터 무너져내린 길을 다시 세우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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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머문 샤브르베시 티베트 게스트 하우스는 내가 2007년 처음 찾았을 때 그리고 2012년 두 번째 찾았을 때 묵은 곳이다. 주인들의 무사함에 고마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후 우리는 샤브르베시 1460미터에서 2600미터 급경사를 올라 2400미터 라마 호텔까지 가야 했다. 우리 일행은 샤브르베시에서 포터 한 사람을 고용했다. 포터 일당은 네팔 대지진 후 배 이상 올라 3일만 고용하기로 했다. 돌아오는 날까지 계산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해 돌아오는 날 하루 일당을 주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6시 30분 산마을에서 야크 치즈와 커피를 마신 후 곧 걷기 시작했다. 랑탕 계곡은 길이 무너져 트레커들이 발걸음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하는 수없이 급경사로인 캄진(Khamjin)을 거쳐 쉐르파 가운(Sherpa Gaun, 2563미터)을 향해 가는 코스를 이용했다. 나는 세 번째 가는 길인데도 힘에 부친다. 함께 간 일행은 너무 힘들다며 쭈그려 안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잘 걷고 걸어서 일정을 잘 소화해 주었다.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에 문상을 가는 산마을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 받았다. 멀리 툴루 샤브르베시에도 무너진 집들이 복구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
▲ 캄진에서 만난 산마을 사람들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에 문상을 가는 산마을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 받았다. 멀리 툴루 샤브르베시에도 무너진 집들이 복구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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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을 랑탕 계곡의 아침은 싸늘했다. 하지만 무너진 트레킹 코스에 길을 내는 네팔사람들에 환영을 받으며 길을 갔다. 우리는 3시간 정도를 걸어 캄진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 간식을 먹고 긴 휴식 시간을 가졌다. 산마을에 감자를 삶아 기름에 볶아낸 맛 좋은 감자와 우리가 가져간 빵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하지만 같은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에서부터 함께 한 스위스 여성 두 명이 뜻밖의 어려움이었다. 나는 초행길인 그들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어야 했다. 때문에 우리의 발걸음은 자유롭지 못했고 속도 조절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어울렸다. 우리가 오르는 오르막 길 건너 멀리 거네스 히말을 보며 오르다 캄진 산언덕 고갯마루에 올랐다. 그랬더니 이제 건너편 산언덕의 툴루 샤브르베시가 눈에 들어왔고 그 위로 히말에서 가장 많은 호수를 품고 있는 코사인쿤드(Kosainkund, 4380미터)가 보였다.

우리는 길 위에서 장례식에 가는 많은 캄진과 쉐르파 가운(쉐르파족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문상 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것이 네팔 사람들에 위로가 되는 일임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지진이 난 이후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기자 산마을 사람들은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워할 정도였다.

지진 이후 산마을에는 수많은 양철집과 안전지대에 움막집들도 즐비했다. 그들에 고초는 언제나 끝을 낼까?
▲ 움막집에서 아침 차를 끓이는 산마을 사람 지진 이후 산마을에는 수많은 양철집과 안전지대에 움막집들도 즐비했다. 그들에 고초는 언제나 끝을 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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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랑탕의 참상을 전해들었다. 가족을 잃고 생존기반이 무너지자 가이드에 나섰다는 사람도 있었고 짐을 나르는 일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쉐르파 가운을 지나서 더 급하게 발걸음을 해야 했다. 짧은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일이었다.

평소 7시간에서 8시간이면 되던 길인데 10시간을 걸어 밤이 어둑해져서야 라마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태양열을 이용한 샤워시설을 이용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곧 라마 호텔 쉐르파 게스트 하우스의 사장인 상부 타망(41)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도 지진 당시 랑탕 마을(3340미터)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랑탕 마을의 집들은 한 채도 남김없이 지진과 이어진 대형 눈사태와 거친 바람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의 누나와 매형 그리고 조카들이 모두 사망했다.

자신이 지진 피해를 입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라마 호텔 쉐르파 게스트 하우스 전 사장이 임대를 주어 지금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게 되었다. 전 사장과 협의해 최소한의 임대료를 주고 있다고 했다.

다시 시작된 상부 타망씨의 삶은 가혹에서 시작된다. 그는 자신에 처지를 생각해 임대를 준 라마호텔에 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며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 상부 타망(Sangbu Tamang, 41세)씨의 삶의 시작 다시 시작된 상부 타망씨의 삶은 가혹에서 시작된다. 그는 자신에 처지를 생각해 임대를 준 라마호텔에 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며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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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한 걸음 옮겨가는 듯 힘겨운 일상처럼 보였지만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소수의 트레커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삶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사람과 사회에 동시 게재 됩니다.



태그:#샤브르베시, #랑탕 마을 가는 길, #캄진, 쉐르파 가운, #라마 호텔, 쉐르파 게스트 하우스, #상부 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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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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