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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사진일 뿐, 중앙대 화장실은 아니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사진일 뿐, 중앙대 화장실은 아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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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인은 중앙에!" (중앙대 2010 화장실 표어 최우수상)

중앙대 남자 화장실 소변기 위에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꽤 전략적인 메시지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사람들의 '소속감'을 건드리기 때문이요, 둘째는 소속감에 힘입어 소변기 정중앙에 소변을 '조준 사격'하면, 무언가 '자기 존재 증명'을 한듯한 쾌감을 느끼게끔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변기 밖으로 소변이 덜 새면 화장실이 한결 깨끗해지고 청소노동자들의 수고도 더는 게, 마지막이다.

아무리 맞는 말도 '화장실을 깨끗하게 쓰는 게 시민의 의무다', '소변 흘리지 말 것' 등 식상하고 계몽적인 표어를 앞세우면, 이런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미국 텍사스 주 정부는 고속도로에 버려지는 쓰레기양을 줄이고자 '시민의 의무'를 강조했지만 캠페인에 실패했다. 하지만 인기 풋볼팀 선수들이 쓰레기를 주우며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광고로 바꾸자 쓰레기양이 72% 감소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사람들은 '직접적인 훈계'의 대상이 되는 걸 아주 싫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에 따르면, 훈계는 자칫하면 반발만 산다. 그래서 탈러는 중앙대와 텍사스 사례처럼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 정도의 뜻을 갖는 '넛지(Nudge)'를 대안으로 제시했다(<넛지: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

훈계는 반발만 산다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하다'라는 뜻도 있는데, 한국의 야권 정치인과 지지층은 이 섬세한 설득의 기술을 활용하는 데 서투른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야권의 주류가 '깨시민(깨어있는 시민)'을 축으로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범위는 무척 넓은데, 여기서 말하는 깨시민은 자신들이 지닌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신념이 최우선이라 믿는 사람들만 말한다는 점에 주의하자.

그다음, 그 잣대에 비추어 볼 때 아직 미몽 상태로 보이는 동료 시민들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합리적 이성과 주체적 의지를 자극한다. 그러면 '정치적 올바름'을 선택하게끔 일깨울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계몽'과 '훈계'를 설득의 기술로 삼는 '계몽주의자'를 자처한다. 깨시민의 주장은 '동료 시민들이여, 어서 빨리 깨어나 민주주의에 참여하라!'는 '참여 민주주의'다. 물론 누구나 마음속에 크고 작은 계몽주의자가 있으니, 흠이 될 건 없다.

다만 트러블을 일으키는 건 깨시민적 기질을 분출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분간하지 못 할 때다. 현재 이 기질을 가장 노골적으로 분출하는 이슈는, 단연 '4.13 총선'이다. 특히 '20대 개새끼론'은 선거철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세대 갈등과 혐오를 재생산한다.

18일 오후, 이재명 성남시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18일 오후, 이재명 성남시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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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개새끼론'의 기본적 논리 구조는 이렇다.

우선, '투표'는 '시민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은 대의 민주주의 사회이고 선출직 공무원들이 그 대리인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투표를 안 하면 나라꼴이 나빠질 게 명백하다. 그런데도 투표를 하지 않는다면 이는 '반시민적 행태'이자 스스로에 대한 '존재 부정'이다. 심지어 최고 교육기관의 최고 지성인 대학생 집단이 투표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니, 이런 개XX들!

뭐 이런 이야기다. 이 편리한 논리를 '사후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에서, 깨시민들은 각종 자료를 수집해 무장한다. 가령 '프랑스 대학생들의 등록금이 낮은 이유는, 한국 대학생들보다 투표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상당수 대학이 선거일에 MT를 간다' 등 역사적 현실 및 통계와 맞지 않거나 1차 출처가 불분명한 주장들을 확대 재생산한다.

프랑스의 등록금이 낮은 이유는, 투표보다 다른 데 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래로 맥이 끊기지 않는 시민들의 거리 연대 투쟁 때문이다. 여차하면 들고 일어나기 때문에, 감히 대학을 전면 영리화할 엄두를 낼 수 없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1968년 '68혁명'을 일으킨 노인들과 대학생 등 청년들이 연대해, 프랑스판 '쉬운 해고법'인 노동법 개정에 극렬한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2006년에도 '쉬운 해고' 저지에 성공했다.

또한 투표일인 '4월 13일'은 대학생들의 중간고사 기간이다. 따라서 '상당수 대학이 선거일에 MT를 간다'는 말보다는, '상당수 대학이 선거일에 MT를 갈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하지만 깨시민들은 이런 사실에 아랑곳 않고 청년에게 '참여하라!' '분노하라!' 등 온갖 명령체를 쏟아내는데, 가장 지엄하고 노골적인 명령은 역시 '기호 2번에 투표하라!'이다. 이는 '꼰대'에 대한 경멸이 한계에 달한 20대가 그들에게 등 돌릴 명분을 스스로 갖다 주는 '자해'와 같다.

청년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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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개새끼론'은 20대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고 깨시민의 감정과 신념부터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역풍을 재촉한다. 다 같이 망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깨시민의 주축인 386들은 87년 민주화투쟁을 추억하고 있고, 그 성과가 과거로 후퇴하는 상황에 '분노'를 표출한다.

깨시민의 또 다른 축인 'X세대'는 앞선 세대가 이룬 성과 위에서 주체적인 개성을 키워나간 경험이 있기에(IMF 이전), 현재 20대가 '나서지 않는' 상황이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20대가 정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분노'나 '도전 욕구'보다는 '혐오'나 '화(火)'에 가깝다.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에 따르면, '분노'는 분노가 향하는 대상이 명확하다. 부당함에 대한 울분을 해소하려면, 주체는 어쨌든 대상에 다가가야 한다. 한데 '혐오'는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킨다. 벌레처럼 나를 더럽힐 것만 같은 대상을 회피하게 한다.

분노는 정치 참여를 이끄는 힘이지만, 혐오는 이를 방해하는 힘이다. 문제는, 20대에게 '정치 혐오'를 주입한 책임이 기성세대에게도 있다는 점이다. '아빠, 왜 TV에 저 어른들 싸우고 있어?'라는 질문에 '국회의원 XX들은 원래 저래, 더러운 놈들이니까 신경 끄고 공부나 열심히해'라는 식의 전형적 밥상머리 교육은, 청년이 정치를 혐오하고 자기계발에만 매몰되도록 만든 요인 중 하나다.

한편 기성세대는 독일과 프랑스처럼 청소년들의 표현의 자유를 고양시키는 철학·작문·풀뿌리 정치 교육을 제공한 적도 없다. 애초에 '도전 욕구'가 자라날 싹을 잘라냈다. 주입식 교육 환경 속에 12년 동안 가둬뒀다가, 갑자기 '대학생'이 되니 주체적 사고와 정치적 행동을 다그친다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떨까. 뒤통수가 띵한 상황이다. 물론, SNS에는 스스로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는 청년도 많다.

하지만 이들의 감정은 '분노'와 조금 다른 경향이 있다. 분노가 결집을 이루고 향하는 대상도 명확한 편이라면, 청년의 감정은 '화(火)'에 가깝다. 화는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 응어리진 감정이 더는 억누르기 힘든 한계에 달할 때 무질서하게 분출된다. '전반적으로 미개한' 나라꼴 자체에 짜증이나, 싹 태워버리고 싶은 종말론적 욕망으로 드러날 뿐이다. '지옥불반도'의 불(火)의 이미지가 그 예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버린 헬조선 지옥불반도.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버린 헬조선 지옥불반도.
ⓒ 트위터 이카무스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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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시민이 중등교육의 모순을 외면한 채, '청년' 전체도 아닌 '대학생'만 붙잡고 훈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깨시민이 '대학생'을 절박하게 부를수록, 그것은 '불안하다'는 절규와 같다. 깨시민은 점점 늙고 있다. 죽음은 불안하다. 허나 깨시민은 죽을지라도, 그들이 이룬 '민주주의'만큼은, '잘 나갔던 87년'을 가장 이상적으로 재현할 것 같은, '자식 같은 대학생'들이 '존속'시켜야 한다는 욕망이다.

깨시민이 느끼는 이런 '생존 불안'은, 근본적으로 청년이 무한경쟁 속에서 느끼는 '생존 불안'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것이 표출되는 '증상'이 다를 뿐이다. 그 이유는, 서로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의 경험이 다른데,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경험만 앞세우며 '훈계'하면 청년은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고 '꼰대'에 대한 '혐오'가 배가 될 뿐이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진정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이냐'다.

청년 투표율이 낮은 건 '증상'일 뿐이다. 본질은 증상이 아니라 증상의 원인이다. 이걸 함께 해결해보자는 태도야말로 '진정성'이다. 20대의 투표율을 이끌어내고 싶다면 훈계부터 멈추자. 부드럽게 개입하되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인다면, 승산이 있다. 최소한 훈계가 야권에 자해적이라는 건 분명하다.


태그:#깨시민, #깨어있는 시민, #이재명, #20대 개새끼론, #계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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