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한다. 마흔이 지난 나이에도 매달 치르는 월경의 경험은 여전히 불쾌하고 찝찝하다. 월경때마다 불청객처럼 따라오는 생리통을 달고 사는 것도 지겹다. 활동이 부자연스러우니 위축이 되고 피비린내 같은 냄새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것도 꺼려진다. 그럴 때마다 잉태와 출산을 위해 그 모든 과정을 숙명처럼 감당해야 할 여성의 몸이 한없이 불공평하고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라는 피조물로서, 여성이라는 생명체로서 내 몸을 진지하게 사유해본 적이 없다. 몸 위에 걸치는 옷가지들에 쏟는 관심의 반의 반만이라도 몸을 생각했다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나는 내 몸을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구나. 어이없게도 자신의 몸에 관해 기록한 '한 남자의 일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는 제목부터 독특해 출간과 동시에 세계적인 화제로 떠오른 작품이다. 작가는 열두 살에 시작해 87세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자신의 몸을 관찰한 느낌과 생각을 평생 일기로 써왔다. 그는 딸 리종에게 이 일기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비밀 정원'처럼 평생을 가꾸어 온 영토인 '몸'에 관한 이야기로 생전에 딸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한다.

그 남자의 '몸' 이야기

.
▲ <몸의 일기> 표지 .
ⓒ 문학과지성사

관련사진보기

작가는 열두 살부터 몸이 정신에게 보내는 신호와 놀라운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끈기있게 관찰하고 기록해왔다. 이 일기에는 첫 몽정(13세), 첫 섹스(23세)와 같은 은밀한 이야기부터 첫 수술(27세), 첫 노안(45세), 첫 망각(62세)과 같은 질병과 노화를 겪는 과정, 첫 사랑(26세)과 첫 아이(28세), 첫 손자(53세)의 탄생처럼 인생의 극적인 순간에 대한 기록들이 담겨 있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보이스카우트 캠프에서 홀로 숲 속에 조난당하는 사고를 겪는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남편과 자식에 대한 원망을 품고 사는 어머니.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정신적으로 일찌감치 성숙해버린 작가는 열두 살 사고에서 경험한 극한의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몸'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가 보기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마치 '버려진 아이'와 같다. 아버지는 일찍 떠나고 엄마는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 이 외로운 소년은 스스로를 지키기로 마음 먹는다.

'그렇지만 나, 나는 널 지켜줄 거야. 나로부터도 지켜줄 거야. 내가 네게 근육을 만들어줄게. 신경도 강하게 단련시켜줄게. 매일매일 널 돌봐줄게. 그리고 네가 느끼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줄게. 아빠가 이런 말을 했었다. 모든 사물은 무엇보다도 먼저 관심의 대상이다. 난 내 몸의 일기를 쓸 것이다. 내 몸의 일기를 쓰려는 또 다른 이유는, 모두들 다른 얘기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란 몸은 전부 다 거울 달린 옷장 속에 버려져 있나보다. (13세 1개월 8일, 33~34쪽)

이 작품에서 몸을 대하는 태도는 철저히 '객관적'이다. 분명 내 몸에 대한 기록인데도 작가는 1인칭이 아닌 3인칭 시점으로 객관화시켜 몸을 관찰한다. 열세 살, 첫 몽정을 했을 때 그는 "잠옷 바지가 풀칠한 종이처럼 엉덩이에 들러붙어 있었다. 살갗 위에서 말라버린 정액이 갈라진다. 그 모양이 꼭 운모같다"(54쪽)고 썼다.

여성인 나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남성의 그 은밀한 느낌이 무엇인지 대충은 짐작하겠다. 나는 이 남자의 일기를 보면서 '내 아들이 자라 열세 살쯤 되면 이런 과정을 겪겠구나, 이런 느낌을 가지겠구나,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해 줘야 할까'에 대해 미리 학습한다. 

과연 혀가 희끄무레했다. 여기저기가 파여 있고, 어떤 덴 너무 깊이 파여 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브뤼노가 어렸을 때 '입 안에만 있으면 심심할 거라'며 혀를 바깥으로 내밀었을 때의 그 매끈하고 분홍빛 나는 귀여운 살덩어리와는 전혀 달랐다.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혀의 측면에 오톨도톨 작은 혹들도 나 있었다. 침샘에 석회가 껴서 그렇게 됐으리라. 또 혀의 잔주름 사이에도 혈관이 터진 것처럼 불그죽죽한 작은 물집들이 붙어 있는게 꼭 말미잘 같았다. 늙어가는 혀의 모양은 고래의 살갗을 연상시켰다. 물에 깎여 홈이 파이고 여기저기 혹들도 나 있는 것이, 그 혹들은 고래의 몸에 다닥다닥 붙어 고래를 천살도 더 먹어 보이게 만드는 조개껍질과도 같았다. (71세 8개월 9일, 383쪽)

"도대체 언제 노년기로 들어가는 거지? 어느 순간에 늙은이가 되는 거지?"(260쪽)라고 의문을 품었던 작가는 몸의 모든 전선에서 진행되는 노화의 과정을 기록한다. 이것은 몸에 관한 '최초의 발견'이다. 과도기에 겪는 성 불능, '무덤꽃'이라고 불리우는 피부의 검은 반점, 건망증, 혀의 변화, 높아진 혈당 수치 등 육체가 늙으면서 발견되는 이 '최초의 현상'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겁을 준다.

몸에 대한 사유가 일깨우는 것

작가는 일기를 통해 몸에 관한 통념을 뒤집는다. 우리는 보통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사고에 익숙하다. 하지만 몸을 소외시키고 정신을 찬양하면서도 갖가지 옷, 장신구, 심지어 성형수술로 보여지는 몸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데 열중한다. 소비와 과시 욕망에 물든 이율배반적인 태도 때문에 '존재의 장치'로서 몸의 본질은 사라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는 껍데기로서의 몸, 끊임없이 소비되는 몸만이 남는다. 

그는 딸 리종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수수께끼로 가득찬 정신과 배설의 펌프로서의 몸이 갖고 있는 관계에 대해선, 우리 시대 못지 않게 오늘날에도 누구나 말하기를 꺼리는 것 같다"며 "이 시대의 몸은 분석을 하면 할수록, 겉으로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덜 존재한다는 거야. 노출과 반비례하여 소멸되는 거지"(11쪽)라고 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몸의 인문학>이라는 책에서 "몸이야말로 삶의 구체적인 현장이자 유일한 리얼리티다. 가장 깊으면서 동시에 가장 투명하고 가장 체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야생적이다. 소외와 억압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이 그 안에 있다"며 "21세기 인문학의 화두는 몸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생명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순환하는 '몸의 원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몸의 원리를 따라가보면 우주의 이치와 만나게 되고 존재와 세계를 통찰하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몸에 대한 평생의 관찰기인 이 책은 몸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기다. 이 독특한 일기를 통해 우리는 몸에 대한 사유가 곧 삶에 대한 성찰임을 깨닫게 된다. 마침내 신체가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죽음을 앞둔 시점에 작가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내 몸과 나는 서로 상관없는 동거인으로서, 인생이라는 임대차 계약의 마지막을 살아가고 있다. 양쪽 다 집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사는 것도 참 편안하고 좋다. 최근의 혈액검사 결과를 보며, 이젠 마지막으로 펜을 들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생 자기 몸에 관해 일기를 써온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을 거부할 수는 없다.' (86세 2개월 28일, 458쪽)

덧붙이는 글 |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 2015.7.)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2015)


태그:#다니엘 페나크, #몸의 일기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은 시골 농촌에서 하루 하루 잘 살기 위해.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