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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호 너머로 보이는 악견산
 합천호 너머로 보이는 악견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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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호 푸른 수면 너머에 훤칠하게 서서 장엄한 위용을 과시하는 악견산(嶽堅山)은 그야말로 '눈길을 끄는' 장관이다. 굳이 호수의 물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고도 이름에 어울리는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너무나 늠름하다. 이 큰 산(嶽)은 온통 거대 바위들로 굳게(堅) 뭉쳐져 있어 단단한 체형의 장수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악견산은 가야산, 황매산과 더불어 합천에 유명세를 더해준 또 하나의 자연 유산이다. 

천혜의 명산 악견산은 대단한 자연 유산이면서 동시에 임진왜란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등산에 취미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민족 중흥의 역사적 의무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면 한 번쯤은 올라보아야 마땅한 산이다. 게다가 악견산은 이름값에 걸맞게 기암절벽 천지이지만 등산로만큼은 대체로 평이해서 초보 등산자의 용기를 북돋워 준다.

악견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세 갈래

합천창의사에서 바라본 악견산. 사진의 오른쪽 끝부분에 등산로 입구가 있다.
 합천창의사에서 바라본 악견산. 사진의 오른쪽 끝부분에 등산로 입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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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견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세 갈래이다. 모두 입구에 '악견산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합천군 대병면 성리 산18-4의 합천댐 보조호수 끝 지점, 성리 산31의 합천관광농원, 성리 산523-1의 합천창의사 건너편, 셋 중 한 곳을 골라 산성과 정상으로 출발한다.

단체 등산객들은 보통 보조호수 쪽에서 올라 창의사 건너편으로 하산한다. 버스는 그들을 보조호수 쪽 등산로 입구에 내려준 후 창의사 아래 대형 주차장에 와서 기다린다. 사람들은 산을 넘어 주차장으로 간다. 그렇게 이동하면 악견산을 두루 답사한 셈이 되니 훌륭한 등산로를 거닐었다고 자부해도 좋다.

하지만 혼자 악견산에 가서는 그렇게 걸을 수가 없다. 정상에 올랐다가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 등산객에게는 창의사 맞은편 등산로 입구가 출발점으로 제격이다. 이 길은 다른 두 등산로와 견줄 때 상대적으로 평탄하여 20~30분가량 빨리, 대략 60분 정도면 정상에 닿을 수 있다. 특히 이 길을 걸으면 산성 흔적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하고, 또 합천창의사와 합천댐 일원의 경치를 황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장점까지 누리게 된다.

산성 유적 둘러보기에 가장 적합한 등산로는?

정상의 안내판도 악견산에 오르면 '(수려한 합천호와 관광지가 보여주는) 천혜의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합천창의사 전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언급되지 않은 '옥에 티'가 아쉽지만, 합천호 일원의 절경을 오롯이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악견산은 매력 넘치는 명산이라는 이 해설은 그런대로 동의할 만하다. 특히 성리 산523-1에서 출발하는 길은 정상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멋진 전망을 15분 뒤, 다시 10분 뒤, 두 번에 걸쳐 연이어 만끽하게 해준다. 어찌 이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인가.

악견산성 오르는 길에 바라보는 합천창의사. 경남 합천 지역 임진왜란 의병들을 제사 지내고, 그 분들이 남긴 유물과 유품들을 전시, 보관하고 있는 창의 시설이다. 창의사 너머로 합천호수 푸른 빛이 장관이다.
 악견산성 오르는 길에 바라보는 합천창의사. 경남 합천 지역 임진왜란 의병들을 제사 지내고, 그 분들이 남긴 유물과 유품들을 전시, 보관하고 있는 창의 시설이다. 창의사 너머로 합천호수 푸른 빛이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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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 아니다. 이 길은, 창의사와 합천호 방향의 경치를 즐기고 난 직후마다 산성 흔적을 출현시켜 역사의 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해준다. 악견산성의 성곽 흔적은 비전문가에게도 커다란 바위들 사이에 작은 돌들을 쌓아 성곽을 이은 조선의 산성 축성 기술을 알게 해준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경상북도 구미 천생산성을 두고 '험준한 암벽의 사이를 돌로 이어 쌓아 우리나라 특유의 산성 형식을 띠고 있다'라고 해설한 대목이 이곳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문화재청 누리집은 합천악견산성(陜川嶽堅山城, 경상남도 기념물 218호)에 대해서도 천생산성의 해설과 별 차이가 없는 풀이를 하고 있다.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산꼭대기 부분을 빙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인 악견산성은 '조선 시대의 성곽 축성 방식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라는 해설이 바로 그것이다. 단지 천생산성의 해설보다 단숨에 의미를 파악하기가 조금 어렵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거대 암석 사이에 돌을 쌓아 만든 조선 시대 산성 성곽

누리집은 '1469년(예종 원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이 성은 1439년(세종 21)에 쌓았다고 한다'라고 전한다. 그리고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악견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008척(약 660m)'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또 '임진왜란 때인 1594년(선조 27) 곽재우(1552~1617) 장군이 성주목사로 있으면서 도체찰사 유성룡(1542~1607)의 지시로 다시 보수하였다고 한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쌓았다고 한다, ~보수하였다고 한다'라는 표현은 그 점에 대해 정확한 확인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큰 암석 위, 그리고 그 사이에 작은 돌을 쌓아 축성한 악견산성이 세월이 흘러 무너졌고, 등산객들은 그 사이로 산을 오르내린다.
 큰 암석 위, 그리고 그 사이에 작은 돌을 쌓아 축성한 악견산성이 세월이 흘러 무너졌고, 등산객들은 그 사이로 산을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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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돌들이 무너진 성곽 사이로 합천호가 보이는 풍경으로, 정상에서 볼 수 있다.
 일부 돌들이 무너진 성곽 사이로 합천호가 보이는 풍경으로, 정상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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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집은 마지막으로 '(악견산성의 성벽은) 일부 허물어진 곳도 있으나,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성벽의 높이는 2.7m 정도이고, 산꼭대기의 평탄한 지역에 건물을 세웠던 자리가 남아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 확인해보면 '일부 허물어진' 수준의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성곽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세월이 너무 오래 흘러버린 탓인가, 아니면 산을 오르면서 지나치게 큰 기대를 걸었기 때문인가.

하지만 정상에 올라 그곳에 남아 있는 성곽 흔적을 보노라면 그런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7년전쟁에 시달린 의병들의 노고가 흰구름처럼 뭉게뭉게 떠올라 문득 가슴 한켠이 젖어내리듯 뜨거워진다. 마음 같아서는 집채만한 기암괴석들 틈틈에 아직껏 차곡차곡 남아 있는 성곽 돌덩이들은 한번 만져보고 싶지만, 의병들의 붉은 피가 묻어있을 것만 같아 차마 손을 내밀 수가 없다.

산 중턱에서 느꼈던 미진함은 햇빛 받은 봄눈마냥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었다. 악견산성을 지키던 합천의 조선인들 중 박사겸 의병장 같은 이는 이곳에서 병을 얻어 마침내 세상을 떴다는데......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합천 호수를 감상하는 일도 그저 사치로만 느껴져 하릴없이 눈길을 거둬들인다. 거대한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안내판은 '산 정상에 축성된 악견산성은 임진왜란 때 권양, 박사겸, 박엽 등 합천의 의병이 축성하여 주민과 같이 왜적을 맞아 치열하게 싸웠던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의병장, 의병군, 주민들의 합심일체로 왜군 격퇴

안내판은 이곳의 전투 상황도 재현해 준다. '왜적이 장기전을 꾀하자' 의병들은 '금성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악견산과 줄을 매어 전립(戰笠, 군사용 삿갓)에 홍의(紅衣, 붉은 옷)를 입힌 하수아비를 띄워' 놓았다. 그후 '달밤에 줄을 당기'는 전술을 쓰자 왜적들은 '흡사 신상(神像, 귀신의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와 다니는 것 같아' 혼비백산했다. 왜적들은 '천강(天降,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 (자신들을) 전멸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겁에 질려 패주했다.'

왜군들이 장기전을 도모하여 산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자 의병들은 악견산(왼쪽)과 금성산(오른쪽)을 연결하는 줄을 설치한 후 붉은옷에 전투용 삿갓을 쓴 허수아비를 매달아 놓았다가 달밤에 잡아당겨 왜적들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는 작전을 썼다. 결국 겁을 먹은 왜군들은 전의가 떨어져 마침내 물러갔다.
 왜군들이 장기전을 도모하여 산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자 의병들은 악견산(왼쪽)과 금성산(오른쪽)을 연결하는 줄을 설치한 후 붉은옷에 전투용 삿갓을 쓴 허수아비를 매달아 놓았다가 달밤에 잡아당겨 왜적들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는 작전을 썼다. 결국 겁을 먹은 왜군들은 전의가 떨어져 마침내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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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 출생인 권양은 노신(1518~1578) 선생 문하에서 배운 후 26세 되던 1581년부터 정인홍의 제자가 된다. 정인홍은 당시 낙향하여 가야산 아래 부음정에서 학문 연마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권양은 스승의 창의에 호응하여 왜적과 싸우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권양의 창의와 전투 활동에 대해서는 정경운의 <고대일록>, 이로의 <용사일기>, 조경남의 <난중잡록>, 문위의 <모계일기> 등에 실려 있다. <조선왕조실록> 1592년(선조 25) 6월 28일 기사에는 김성일이 '합천의 전 장령 정인홍이 그의 동지인 현풍에 사는 곽율, 박성, 권양 등과 더불어 향병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고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도 게재되어 있다. 권양은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키기 전인 64세에 타계함으로써 스승 정인홍이 그들에게 처형되는 비극은 보지 않았다.

권양 의병장은 소학당(가야면 매안리 989) 경내의 회산사에 모셔져 있다. 정경운의 <고대일록>은 '내암 정선생(정인홍)과 송암 김선생(김면)이 합천 숭산동(소학당)에 모여 의논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를 도모하였다, 규합을 계획하고는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인 곽율, 하혼, 권양 등과 논의를 확정하여 의병을 일으켰다'라고 증언한다. 권양 의병장은 합천 임란의병 창의가 처음 결의된 유서깊은 곳에서 후대들의 기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권양 의병장은 합천의병의 발상지인 소학당(문화재자료 137호,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 989) 경내의 회산사에 모셔져 있다.
 권양 의병장은 합천의병의 발상지인 소학당(문화재자료 137호,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 989) 경내의 회산사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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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겸은 동생 박사재, 조카 박엽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는데 특히 '(경남 합천) 삼가에서의 의병 모집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으며 '군수 보급에 크게 이바지'했다(합천창의사 <합천임란사 2집>). 박사겸의 의병 창의와 활동은 이로의 <송암집>에 '김면이 (경남)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정인홍은 (경남)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박사겸·박사제·권세춘·전치원·이대기 등도 향병(의병)을 끌어 모아 서로 연달아 일어났다, 학봉 김성일이 공적을 세운 상황을 듣고 포장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만도의 <향산집>도 '김면은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박사겸과 박사제는 삼가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가 각각 8, 9백 명이 되었다, (경남) 단성의 권세춘과 (경남 합천) 초계의 전치원과 이대기도 의병을 일으켜 응해 오니 초유사(임진왜란 초기 선조를 대신하여 경상도 일원의 창의를 독려하고 민심을 관리한 김성일의 직책)가 크게 기뻐하여 그날로 장계(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올렸다'라는 증언이 실려 있다.

박사겸, 김면, 김성일 모두 과로로 말미암아 전쟁 중 병사

1593년(선조 26) 3월 박사겸은 악견산성을 지키던 중 중병을 못이겨 집으로 후송되지만 불과 며칠만에 타계한다. 그 직전인 1월에는 경상우도 의병도대장 김면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한 달여 뒤인 4월에는 김성일이 2차 진주성 싸움을 대비하던 중 성내에서 병으로 절명했다. 죽음을 앞둔 김면이 '나라 있는 줄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구나!' 하고 탄식했듯이, 이들이 보여준 최후의 장면은 한결같이 자신의 건강은 도외시한 채 밤낮을 바쳐 적과 싸우고, 또 어떻게 이길 것인가에만 몰두하다가 세상을 뜬 선비들의 마지막 장엄이었다.

하지만 박사겸은 점점 후대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박사겸과 박사재의 묘소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 실정이다. 직계 후손이 없어 그렇게 되고 말았다. 합천창의사의 <합천임란사 2집>은 '그(박사겸)의 죽음은 한창 전쟁의 와중에 있었으니 삼가 의병 활동에 큰 아쉬움을 남긴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후(후손)가 절손(絶孫, 후손이 끊김)되어 묘소마저 실전(失傳, 전해지지 않음)되었으니 안타까움을 한층 더하고 있다'라고 탄식한다.

박사겸, 박엽, 권양 등이 성을 수리한 후 본거지로 삼아 왜적과 싸웠던 임진왜란 유적 악견산성의 흔적이 경남 합천 악견산에 남아 있다.
 박사겸, 박엽, 권양 등이 성을 수리한 후 본거지로 삼아 왜적과 싸웠던 임진왜란 유적 악견산성의 흔적이 경남 합천 악견산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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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견산 정상의 안내판에 권양, 박사겸과 더불어 소개되어 있는 박엽은 박사겸의 조카로, 임진왜란 발발 당시 33세였다. 박겸은 어릴 때 박사재에게서 배웠는데 1592년에는 당시 44세의 중년이 된 박사재와 그 형 박사겸을 도와 창의했다. 그는 특히 박사재 부대의 중요 역할을 맡아 (대구 달성) 현풍 전투, 악견산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고, 의병을 모으고 군수품을 조달하는 데 큰몫을 하였다.

박엽은 전쟁 초기 '민심을 잃은 일부 관료들의 악랄한 저해'를 받아 조정에 '큰 도적(大盜)'으로 보고되고, 급기야 '잡아 죽이라(擒斬)'는 공문서가 각 관공서에 배포되는 바람에 곽재우가 큰 곤경에 빠졌을 때(위의 작은따옴표 내용은 박성식 <지방사>의 표현) '윤언례와 박사재가 곽재우를 구하기 위해 글을 지어 각 의병소(의병 본부)와 열읍(列邑, 지방관청들)에 통문(通文, 알리는 글)을 돌리니 박엽과 조계명이 이를 맡아 전달하여 곽재우를 구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합천임란사 2집>). 그 뒤 정유재란 때에도 박엽은 화왕산성 싸움에 동참하여 곽재우를 도와 공을 세웠다.

종전 이후 박엽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호서수군절도사였다. 1616년(광해 8) 정월 박엽은 수영(수군절제사가 근무하는 수군 본부)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7세였다.

박엽, 당숙 박사재 도와 곽재우 구명 운동 펼쳐

악견산 정상의 안내판을 다시 읽는다. '산 정상에 축성된 악견산성은 임진왜란 때 권양, 박사겸, 박엽 등 합천의 의병이 축성하여 주민과 같이 왜적을 맞아 치열하게 싸웠던 곳'이다. 권양, 박사겸, 박엽 세 분의 이름을 거듭 헤아려보고,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성을 쌓아 왜적과 치열하게 싸웠던 '합천의 의병' 및 '주민'들의 피땀을 되새겨본다. 이 모든 분들을 찬바람 부는 산꼭대기 바위 틈에 남겨두고 나는 이제 악견산을 내려가야 하리라.

합천댐 보조호수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지점의 악견산성 흔적.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에 곧장 창의사 맞은편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 오른쪽 능선을 타면 이 곳을 거쳐 합천관광농원에 닿는다. 합천호관광농원에서 정상까지는 1.3km로, 성리523-1(창의사 맞은편 등산로 입구)에서 오르는 것과 거리는 비슷하지만 훨씬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시간은 20분가량 더 소요된다. 또 하산 후 주차장까지의 거리도 더 멀다.
 합천댐 보조호수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지점의 악견산성 흔적.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에 곧장 창의사 맞은편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 오른쪽 능선을 타면 이 곳을 거쳐 합천관광농원에 닿는다. 합천호관광농원에서 정상까지는 1.3km로, 성리523-1(창의사 맞은편 등산로 입구)에서 오르는 것과 거리는 비슷하지만 훨씬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시간은 20분가량 더 소요된다. 또 하산 후 주차장까지의 거리도 더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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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악견산, #권양, #박엽, #박사겸, #박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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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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