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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24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9시간을 넘겨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가운데, 김용남 새누리당 의원이 은수미 의원을 향해 삿대질하며 고함을 치고 항의하고 있다.
▲ 은수미 의원에게 삿대질하는 김용남 의원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24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9시간을 넘겨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가운데, 김용남 새누리당 의원이 은수미 의원을 향해 삿대질하며 고함을 치고 항의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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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가 났다. '장거리 미사일,' '핵폭탄,' '테러'... 여기에 대통령의 '주먹탄'까지.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이다.

마땅히 바라보는 이의 마음도 심각해져야 할 텐데, 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사회는 오히려 '웃음 폭탄'으로 다가온다. 현 상황이 무지와 과장이 뒤섞인 '헛소동'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지하면서도 진실할 수 있다. 객관적 상황과 상관없이 현 시국이 '끔찍한 위기상황'이라고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사자들이 엄숙하다 못해 장엄한 표정까지 짓는 것을 조롱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국가비상사태'라면서, 입만 열면 '총선'이요, 꺼내는 말마다 '공천'인 여당 의원들의 진실성을 믿어야 할까?

최근 위성처럼 부상한 김용남 새누리당 의원을 보자. 지난 24일 은수미 의원이 국회에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 발언을 하며, '정부가 테러 방지법에는 신경을 쓰면서 국민이 폭력을 당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때 김 의원이 외친 일성은 "그런다고 공천 못 받아요!"였다.

조원진 새누리당 원내수석도 거들었다. 그는 필리버스터가 "지역구에서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자기 홍보를 하는 "선거운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필리버스터가 새누리당 공약집에 당당히 실려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현재,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 공약이 당선 가능성이 없는 여당 의원들을 돕기 위한 선거대책이었던 것일까?

"국회 내 폭력 근절 대책"이라더니, 이제 '테러 무기'?

2009년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국회 내 폭력사태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필리버스터'제도를 도입할  용의가 있다"고 공개제안했다.
 2009년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국회 내 폭력사태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필리버스터'제도를 도입할 용의가 있다"고 공개제안했다.
ⓒ Nocut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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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는 현 집권당이 한나라당 시절부터 열심히 홍보해 온 제도다. 7년 전인 2009년 2월,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금 여당 의원들이 발언을 이어가는 바로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는 '국회 내에서의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합법적 의사진행방해 제도인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이었으니, 여당 대다수 의원들이 내용을 알고 있던 것은 물론, 국회에 앉아 그 발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던 이들이 필리버스터를 "국민 안전에 대한 테러"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국회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라고 홍보하던 정책이 별안간 '테러 무기'로 돌변한 셈이다.  

"이것은 정말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도 나섰다. 그는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 릴레이'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박 대통령의 모호한 말은 진지한 해석을 요구한다.



정말 그는 전임 대통령의 5시간 넘는 1964년 필리버스터 발언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는 미국의 유력한 대선후보인 버니 샌더스가 2010년 8시간 30분 넘게 '부유층 감세 반대' 연설을 했다는 사실도 몰랐을까? 아니면 한국과 미국은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

필리버스터를 '진보세력의 딴지 걸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미국 공화당의 랜드 폴 의원이 무척 서운해할 것이다. 그는 2015년 5월 오바마 정부의 '애국자법(Patriot Act)' 연장 시도에 맞서 10시간 넘게 의사진행 방해를 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에 대해 '개정된 법안이 통신기록 수집을 제한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며 조속한 통과를 종용했고, 동료 공화당 의원들까지 나서서 "위험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판했지만, 폴 의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정부기관의 불법 사찰을 중단시키기 위해 법을 사장시키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뒤 필리버스터를 이어갔고, 결국 애국법은 폐기되었다.



'애국자법'은 9.11 테러 이후 부시 정부가 '테러를 막는다'며 만든 법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하나는 보수 정치인 모두가 '애국'이라는 말에 좀비처럼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정부가 '테러 방지' 명분의 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국민 안전 테러범'으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 지닌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이것은 정말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이 탈출한 재앙 속으로 들어가는 한국

2001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3000명 가까운 목숨이 잿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미국 사회는 거대한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고, 이런 분위기에서 '테러 막는다'는 법안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애국자법'은 의회 표결에서 단 한 명의 반대를 빼고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애국자법의 발효로 인해 미국 정보기관은 '테러혐의자 색출'을 위해 시민들을 감청하고, 입수한 통신기록을 5년간 보관할 권리를 얻게 되었다. 정부에게 국민들의 사적 정보에 접근할 권리를 준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낳는지는 머잖아 드러났다.

2013년,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은 국가안보국(NSA)이 자의적 판단에 따라 전 세계 시민들의 통화기록은 물론, 인터넷 검색과 방문한 사이트, 이메일 내용을 대대적으로 수집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자신의 행동이 감시되고 있으며, 말 한마디로 '테러 용의자'로 몰릴 수 있다는 인식은 개인의 말과 생각을 옥죄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사회 전체에 정부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겁주기 효과'를 발생시키고, 그 국가는 쉽게 독재와 파시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나치 독일이 그랬고, 부시의 미국 정부가 그랬으며, 지금의 한국 정부가 그렇다.

부시 정부는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살상무기'를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했고,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 결과, 2014년까지 모두 4500명 가까운 젊은이가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는커녕, 9.11 테러보다 더 많은 국민을 스스로 희생시킨 것이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미국은 '애국자법'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시민단체들은 연달아 소송을 제기하고, 정치인들은 필리버스터로 맞섰고, 연방법원은 국가안보국의 감시프로그램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한국의 '테러방지법'은 미국이 겨우 벗어난 재앙의 구덩이를 제 발로 걸어들어가게 만드는 악법이다.

결과는 미국보다 훨씬 끔찍할 것이다. 한국의 국정원은 대선 개입, 간첩 조작, 정상회담 회의록 유포 등 미국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질러 왔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무제한의 대국민 사찰권을 주는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 모두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테러방지법'은 '자유방지법'이라는 실명으로 불러야 한다.

공화당 출신 론 폴 "애국자법은 비애국적이다"

미국의 '애국자법'에 반대한 보수정치인은 랜드 폴만이 아니었다. 2008년 대선 후보까지 지낸 공화당 출신 론 폴 또한 그 법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2011년 '국가안보 토론'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애국자법이 비애국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의 자유를 해치기 때문이지요. 물론, 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테러 공격을 우려합니다. 미국 안이든 밖이든 테러는 실존하는 위험이고,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범죄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헌법을 만든 선조들은 '안보를 자유와 맞바꾸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정부와 의회는 안보를 핑계로 너무나 손쉽게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폴 의원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안보를 이유로 자유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신념입니다.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안보를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청중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테러 동조자'라는 비난이나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는 논평 대신 열렬한 박수가 쏟아졌다. 그의 말은 지금까지도 명언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미국인들이 마음 깊이 새겨두고 있는 '국부'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안전을 얻기 위해 약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사회는 어느 것도 가질 자격이 없으며, 결국은 둘 다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북한을 '자유가 없는 나라'로 비판해 왔다. '안보'를 핑계로 국민들의 자유를 옥죄는 대표적인 나라가 북한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 정권과 다르다면, 그들과는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정부에 맞서는 것은 민주 시민의 당연한 권리다.


태그:#테러방지법, #국정원, #애국자법, #론 폴, #랜드 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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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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