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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란 책을 읽었습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쓴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르포르타주였습니다. 책에서는 공장식 사육 시스템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는데요. 우리 식탁 위의 고기가 되기 전, 동물들이 어떠한 일생을 거치는지가 방대한 자료조사를 통해 설명돼 있었어요.

인간은 잡식성이고, 또 우리 몸엔 동물성 단백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기를 먹습니다. 그런데 이 '고기를 먹는다'라는 표현 이면의 잔인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인간이 더 많은 고기를, 더 싸게 먹으려 할 때마다 더 많은 동물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더 잔인하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고문에 가까운 학대를 당하다 죽는 동물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모른 채 맛있게 고기를 먹는 인간들.

가장 끔찍했던 것은 우리 인간들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였어요. 우리는 동물을 우리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의자쯤으로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앉기 위해 의자가 필요하듯, 배부르기 위해 동물이 필요하단 듯이요. 인간을 위해 태어나고, 인간을 위해 살이 되고, 인간을 위해 뼈가 되는 '그것'. '그것'이 바로 동물이라는 식으로요.

인간들은 식탁에 올라오는 동물들에 한해서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수많은 유기견들이 우리 인간의 단순함, 무책임함, 잔인함을 드러내죠. 인간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얼마나 쉽게 도구화 하고, 대상화 할 수 있는 걸까요.

저도 인간이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인간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걸 영영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 평등하게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단 하나의 종의 안위와 편의를 위해 그토록 많은 걸 파괴하진 않을 텐데.

인구 29만의 화양, 전염병에 갇히다

책 표지
 책 표지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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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다시금 떠올려본 이유는 정유정의 소설 <28> 때문이었습니다. 정유정은 '작가의 말'에서 <28>을 쓰게 된 계기를 말합니다. 구제역으로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생매장당하던 그 겨울이 없었다면 이 소설은 탄생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산 채로 묻힌 그들의 울음소리는 이튿날 아침까지 지상으로 울려 퍼졌다고 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슬프고 부끄럽고 두려웠다. 돼지들의 비명과 울부짖음이 오래오래 귓가를 맴돌았다. 불편한 진실을 맞닥뜨릴 때마다 눈뜨고 깨어나는 양심이라는 파수꾼이 끊임없이 속삭여왔다. 우리는 천벌을 받을 거야." – <28>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책을 읽으며 저는 이야기의 힘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사건, 사고들이 전체 그림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숨 쉴 틈 없이 진행되고 있었어요. 극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급박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도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선이 모두 살아 숨 쉬고 있었구요. 고로,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며 지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죠.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인구 29만의 가상 도시 화양입니다. 이 도시에 원인 모를 전염병이 번집니다. 전염병은 사람과 개 모두를 통해 전염되는 인수공통전염병입니다. 이 전염병에 걸리면 개도, 사람도 빨간 눈이 되고 삼사일 안에 죽습니다. 치사율은 100퍼센트입니다.

추운 겨울. 빨간 눈은 빠른 속도로 화양을 점령하고, 정부는 화양을 포기합니다. 군인이 투입되고, 화양은 봉쇄되고, 화양을 떠나려는 사람들은 총살당합니다. 인구 5천만을 살리기 위해 29만을 몰살하려는 작전. 화양 토박이, 외지인 할 것 없이 꼼짝없이 화양 안에 갇힙니다.

서로를 배제하는 사람들

제게 빨간 눈은 은유적으로 읽혔습니다. 그것은 전염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빨간 눈의 역할은 인간들을 죽음의 문턱 앞까지 몰아넣는 것입니다. 생과 사의 벼랑 끝에 선 인간들은 살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할까요. 배제였고, 배제는 순차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다른 생명을 과감히 배제하는 것. 우선 인간들은 개들을 배제합니다. 죽이기로 합니다. 군인들은 개가 보이는 즉시 사살합니다. 생매장도 불사하구요. 자식처럼 키우던 강아지들을 거리로 내몹니다. 내가 살기 위해선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거리에서 개들이 자취를 감춥니다. 개들과 함께 자취를 감춘 이들은 또 있습니다. 죽었거나 병든 자들. 산 자들은 빨간 눈이 된 자들도 배제하기로 합니다. 그들을 개처럼 부립니다. 내가 살기 위해선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배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5천만 시민은 29만 시민을 배제하기로 결의합니다. 5천만 시민 또한 내가 살기 위해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화양 시민들은 억울합니다. 시청 앞에서 시위를 하고, 봉쇄선으로 몸을 날립니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말합니다.

"화양 시민은 개가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우리를 개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우리를 병든 땅에 가둬 생매장시키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총을 쏘고 있는 것입니다." - <28> 중에서

아직 살아 있는 수 만의 사람들은 가두행진을 벌이며 함성을 지르고 구호를 외칩니다.

"우리는 살아 있다."
"우리는 살고 싶다."
"우리를 살게 하라." - <28> 중에서

공생하는 방법을 말하다

사람들의 구호 소리는 소설 속 화자 재형의 귀에도 들립니다. 그렇지만 재형의 귀엔 사람들의 소리가 생매장당한 개들의 울부짖는 소리 같기만 합니다. 5천만 시민이 29만 시민에게 그랬듯, 29만 시민도 개들에게 그랬지 않습니까. 화양 시민들 역시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다른 생명을 배제시키지 않았습니까.

소설은 총 여섯의 화자를 두고 있고, 그중 한 명이 수의사 재형입니다. 버림받은 유기견들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던 재형은 대재앙 속에서 사랑하는 개들을 잃습니다. 그런 그 앞에 링고라는 늑대개가 나타납니다. 여섯 화자 중 하나인 링고는 그 어느 인간보다도 고결한 품격을 지닌 이상적 존재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감정 이입한 화자이기도 하구요.

링고는 연인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인간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갑니다. 재형이 이를 막아섭니다. 둘이 마지막으로 뒤엉키는 장면. 소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 한 장면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인간을 넘어 '생명'을 지키고자 헌신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희망"을 작가는 재형을 통해 드러낸 것이지요. 

소설은 공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다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죠. 적어도 서로를 구분 짓고, 이를 바탕으로 배제하고, 또 배제하는 식으로는 공생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는 그 나름의 답을 재형을 통해 제시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나름의 답을 찾아봐야 할 테지요.

덧붙이는 글 | <28>(정유정/은행나무/2013년 06월 15일/1만4천5백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2013)


태그:#정유정, #소설,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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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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