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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힌두교 성지임을 저 바위섬은 기념관과 동상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 비베카난다 기념관과 티루발루바르 동상이 우뚝 서 있는 바위섬 이곳이 힌두교 성지임을 저 바위섬은 기념관과 동상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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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경남에서 모인 우리 교사 연수단 일행은 1월 7일 남인도 카랄라주의 알래피역에서 예정된 시간보다도 2시간이 연착이 된 기차를 타고 카랄라의 주도 트리반드룸으로 향했다. 인도에서는 기차가 연착이 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라고 한다.

우리가 탄 칸은 2등칸으로 2층 침대로 되어 있어 방 하나에 12명씩 탈 수 있는 기차였다. 실내 환경은 정비가 덜 되어 낡은 의자에 벽면 등이 도색도 안 된 그런 기차였지만 그래도 타서보니 내심, 안심이 되었다. 과거 중국을 여행할 때 발디딜 틈 없이 탔던 기차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북인도에서는 소매치기들도 많다고 하여 잘못하여 차 안에서 소지품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등을 하면서 탄 기차였기 때문에 그렇다.

신발을 신고 있는 우리가 이곳에서는 낯선 이방인임을 드러내 놓고 있다. 순례자들은 한결같이 다 맨발이었다.
▲ 맨발이 힌두 순례객들 신발을 신고 있는 우리가 이곳에서는 낯선 이방인임을 드러내 놓고 있다. 순례자들은 한결같이 다 맨발이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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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에서부터 인도 전역에서 몰려든 순례자들은 이렇게 차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축제를 맞으러 오고 있는 것이다.
▲ 순례자들을 태우고 온 차량들 북인도에서부터 인도 전역에서 몰려든 순례자들은 이렇게 차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축제를 맞으러 오고 있는 것이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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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고된 수행하는 힌두교도들

기차를 타서 보니 머리가 허연 인도 할아버지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도의 젊은이가 우리 일행 맞은 편에 앉아 있어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할아버지가 우리 일행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 일행 중에는 불어교사, 영어교사 등 영어로 웬만한 의사소통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분들이 더러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분과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나나 다른 분들도 비록 영어가 좀 짧지만 그래도 간간히 질문을 하고, 그분이 하는 이야기의 줄거리나 핵심은 알아들을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인도의 델리에 산다는 힌두교도는 깐야꾸마리를 찾아 순례길에 오르고 있었다.
▲ 힌두 순례에 나선 인도인 인도의 델리에 산다는 힌두교도는 깐야꾸마리를 찾아 순례길에 오르고 있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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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외모를 보고 75세 안팎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나이를 확인했더니 57세라고 하여 깜짝 놀랐다.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 것이다. 그는 젊었을 때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였는데, 지금은 그런 활동은 하질 않고 힌두교리에 의하여 열심히 수행활동을 한다고 하였다.

"지금 기차를 타고 어디로 가시나?"
"깐야꾸마리로 순례를 가요. 옆에 앉아 있는 젊은이도 힌두 순례를 가는 청년이다."
"일행이시냐?"
"아니다. 이 기차를 타고서 알게 되었다."
"인도 사람들은 이렇게 순례를 많이 다니느냐?"
"그렇다. 특히 1월달에 많이 다닌다."
"평생에 한 번쯤은 누구나 순례길에 나서는 것을 힌두교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왜 순례를 가느냐?"
"성지를 찾아서 힌두신들에게 기도를 하고, 고행과 명상을 통하여 참된 나를 찾고, 업을 끊는 활동은 힌두교도들의 중요한 종교활동 중 하나이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명상을 통하여 참된 나를 찾고, 카르마(업)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함이다. 힌두의 전통에 의하여 각종 종교 의식을 통해 신을 찬양하고, 복을 기원하고, 다음 세상에서는 좋은 곳으로 거듭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기 위함이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초콜릿이나 사탕 등을 권하고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렇게 두어 시간 달린 기차는 트리반드룸역에 도착을 하여,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순례를 위하여 까얀꾸마리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남여노소, 학생 가릴 것 없이 많은 순례객들이 이곳 깐야꾸마리의 1월을 바쁘게 하고 있었다.
▲ 한없이 몰려드는 순례 행렬 남여노소, 학생 가릴 것 없이 많은 순례객들이 이곳 깐야꾸마리의 1월을 바쁘게 하고 있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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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이야기 중에 '카르마'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설명으로 보아 대강의 뜻은 알겠는데,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깐얀꾸마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나름대로 '카르마'에 대한 내용과 생각을 대강 정리할 수 있었다.

'카르마'는 업(業)을 뜻하는 말로, 모든 행위는 인과법칙의 결과이다. 현재의 행위는 그 이전의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고, 현재의 행위는 미래의 행위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불교가 생겨나기 이전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업이란 오직 유일절대 창조신인 범신(梵神)에 대한 제사행위만을 바람직한 선업으로 보았다.

산맥의 이름은 모르지만, 이곳 남인도에서 산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데, 땅끝 마을 깐야꾸마리에 거의 다라랐을 때는 이렇게 산맥을 만나서 반가웠다.
▲ 깐야꾸마리로 가는 길에 만나는 산맥 산맥의 이름은 모르지만, 이곳 남인도에서 산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데, 땅끝 마을 깐야꾸마리에 거의 다라랐을 때는 이렇게 산맥을 만나서 반가웠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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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복잡한 길거리를 질주하는 아슬아슬함

1월 7일 오후 늦게 트리반드룸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호텔에 짐을 풀고 인근 식당으로 이동하여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하면서 다음날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였더니, 원래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하여 인도의 땅끝마을 깐야꾸마리를 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다.

회의 결과 가고 말고는 자유의사에 맡기기로 했다. 갈 사람들은 오전 6시에 미니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아침식사는 호텔에 미리 주문한 도시락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출발하였다. 원래는 트리반드룸에서 70~80km 거리에 있기 때문에 3시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요즘 힌두교인들의 순례기간이라서 길이 많이 막혀 4~5시간은 걸릴 것이라는 호텔측의 정보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길거리는 정말 혼잡스러웠다. 왕복 2차선 도로에는 우리와 같은 버스도 있지만 오토바이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고, 툭툭이, 트럭 등 각종 교통수단들이 뒤섞여 마구 달리는데, 교통경찰이 교통정리를 해주는 것도 아니다. 좁은 길에서 곡예를 하듯이 이리 빠지고, 저리 끼어들며 달리는 것이다. 가끔 4거리에서 교통신호등이라도 만나면 마냥 기다려야 했다. 신기한 것은 이런 교통혼잡 속에서도 거의 사고가 없다는 것이다. 운전기사의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을 보면서 아찔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운전기사의 운전 재능에 맡겨놓고 넋놓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저녁이 좀 늦더라도 트리반드룸에서 숙박을 할 것이 아니라 깐야꾸마리에서 숙박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 일행이 16명이나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숙박할 수 있는 숙박업소를 순례기간 중에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어쩔 수 없이 트리반드룸에서 숙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타닐나두로 넘어가는 외국인들이 탄 차량들에게는 통행세를 받고 있었다.
▲ 카랄라주에서 타밀나두주로 넘어갈 때 통행세를 받는 곳 타닐나두로 넘어가는 외국인들이 탄 차량들에게는 통행세를 받고 있었다.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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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를 끊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노력

재미있는 것은 카랄라주인 트리반드룸에서 타밀나주인 깐얀꾸마리의 경계로 넘어가는데 통행료를 받는 것이다. 현지인들의 차는 통행료를 안 받는데, 외국인들한테는 받는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유럽여행을 갔을 때, 로마로 들어갈 때 환경세를 받는 것과 같이 이 지역에서도 통행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주도도 환경보호와 환경기반 시설 확충을 위하여 조례로 환경세 징수를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환경세가 지나치게 높게 징수되지 않는다면 적당한 선에서 유명 관광지들은 환경세를 걷어 좀 더 쾌적한 환경 공간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고, 불필요한 환경 파괴를 방지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도의 힌두교는 브라만의 전통을 이어받아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인도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힌두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불교, 그리고 유대교와 뿌리를 같이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에서는 인간존재와 행위를 카르마와 죄라는 카테고리로 파악하고, 심판을 통한 재생 혹은 환생과정이나 천국과 지옥에서의 보상체계를 주장해 왔다. 이런 패러다임에 동의하여 각종 종교를 가진 인류가 세계에 50억 정도 된다고 한다.

인도의 힌두교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또는 관습으로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고, 이에 카스트제도와 카르마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고행의 삶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하게 느끼게 하는 인도 여행이었다.

깐야데비는 시바신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시바신의 부인으로서 이곳에 사원에 모셔져 있다.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참배를 하러 들어간다.
▲ 깐야데비 사원 깐야데비는 시바신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시바신의 부인으로서 이곳에 사원에 모셔져 있다.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참배를 하러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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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행생들도 순례 행렬 속에서는 만날 수 있었다.
▲ 깐야꾸마리를 찾은 여학생들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행생들도 순례 행렬 속에서는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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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이 깐야꾸마리를 지나 바다가 맞닿은 곳에 이르렀더니 정말로 사람들이 많이 붐볐다. 대부분 순례를 온 인도인들이고 학생들도 더러 보였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다들 거무튀튀한 순례복에 수염도 안 깎고, 꾀죄죄한 얼굴에 맨발로 열심히 왕래하는 걸 보면서 이곳이 힌두교인들의 성지임을 실감했다.

나는 순례길이라 하여, 처음에는 사람들이 먼 길을 걸어 고행을 하면서 이곳으로 모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다들 승용차라든가 승합차를 이용하여 이곳까지 몰려와서 다양한 형태의 종교의식을 하고 가는 것이다. 그들이 몰고 온 차는 어김없이 차 머리에 꽃다발이나 과일다발이 걸려있었고, 형형색색의 깃발이 나부끼거나, 전통악기들을 동원하여 오는 등 다양한 모습이었다. 연령층도 다양했지만 노인들보다는 20~30대 젊은 층, 남성들이 좀 더 많은 것 같았다.

간디가 암살 당하고 나서 그의 유해는 화장을 하여 이곳 깐야꾸마리의 바다에 뿌려졌다고 한다.
▲ 간디기념관에서 만나 인도 독립 영웅 간디 사진 간디가 암살 당하고 나서 그의 유해는 화장을 하여 이곳 깐야꾸마리의 바다에 뿌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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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메모리얼과 꾸리암만 사원에서

우리 일행이 맨 먼저 찾은 곳은 간디 메모리얼이다. 인도의 독립영웅 간디가 세상을 하직하자 그의 유해를 이곳 깐야꾸마리에 안치했다가 화장을 하고 이곳 바다에 뿌렸다고 한다. 그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곳이 얼마나 인도인들이 마음 속으로 동경하는 성지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인도는 사원이나 기념관이나 성스러운 곳은 어디나 신발과 모자를 벗고 들어가게 한다. 신발 보관장에 약간의 돈을 내고 들어갔는데, 우리가 원한 것도 아닌데, 어떤 할아버지가 우리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벽에 걸려있는 사진, 또는 여러 기념물들 앞에서 설명을 해주는데, 인도인들로 보이는 사람들 일행이 왔지만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외국인인 우리 일행에게 열을 올리면서 안내를 하는 것이다.

알고보니 그게 다 팁을 바라고 하는 활동이었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휘 둘러보고 빨리 나가려고 했는데, 이 할아버지는 우리를 붙들어 마냥 설명을 하려고 했다. 우리가 바쁘다는 말씀을 드리고 팁으로 100루피를 드렸더니 적다고 화를 내시는 것이다. 다시 100루피를 더 드리고 나왔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혼자서 악마들과 싸워 이들을 물리치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고 시바신과 결혼을 한 것으로 유명한 깐야데비 여신을 모신 꾸리암만사원이다. 들어가려다가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포기를 하였다. 거길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자들은 다 웃통을 벗어야 한다. 사원의 중앙 제단에는 어둠컴컴한 곳에 깐야데비 상을 모셔놓았는데, 사진도 찍지를 못하게 한다고 하였다.

비행기 시간에 쫓기는 우리 일행은 이곳 사원을 탐방하는 것은 포기를 하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곳 깐야꾸마라 앞 바다 500여 미터 지점에 위치한 두 개의 바위섬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점심도 먹어야 하고, 오는 길이 너무 막히는 것을 보고, 겁이 나 두 바위섬에 있는 비베카난다 메모리얼과 그 옆 바위섬에 우뚝 서 있는 동상의 주인공을 만나는 일은 포기하고 해안가에서 보기로 하였다. 

이 바위섬에는 인도의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 비베카난다 메모리얼이 있는 곳이다.
▲ 땅끝 꺈야꾸마리 앞 바위섬 이 바위섬에는 인도의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 비베카난다 메모리얼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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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카난다는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에 인도 힌두교 대변인으로 참석해 원고도 없이 즉흥적으로 연설했고, 수많은 서구인들에게 커다란 환호와 갈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비록 힌두교 대표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연사들과는 달리 자신의 종교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종교들의 근원적인 통일성과 조화, 인류의 공통적인 영성에 대해 역설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다른 곳에서 발원된 강물들이 결국 모두 바다에 이르듯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마침내 동일한 신에 이르게 되며, 따라서 어떤 종교도 다른 종교보다 우등하거나 열등하지 않다고 역설하였다고 한다. 비베카난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요, 불멸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며,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들로서 이 땅 위에 있는 신성들입니다. 죄인이라니요! 인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야말로 죄이며,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명백한 반역입니다!"               

섬에 있는 동상의 주인공인 티루발루바르가 어떤 인물이길래 이렇게 거대한 동상을 세워서 추앙하는가를 알아보려고 인터넷 등을 이용해 이러저리 검색을 해 보았건만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고대 타밀족의 유명한 시인이라고 한다. 그는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긴 서사시로 썼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필자도 이곳 바닷물로 세수와 족욕을 하고 힌두신의 복을 빌어 보았다.
▲ 필자도 인도인들처럼 바닷물에 몸을 씻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필자도 이곳 바닷물로 세수와 족욕을 하고 힌두신의 복을 빌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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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도들의 성지 깐야꾸마리

깐야꾸마리는 우리나라의 해남과 같이 인도의 땅끝 마을로 유명하다. 아라비아해와 인도양, 벵골해 등 세 곳의 바닷물이 만나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곳 깐야꾸마리는 인도인들에게 매우 신성한 장소이다.

인도인들은 두 물이 합수되는 지점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어 그곳에서 목욕을 하고, 복을 빌거나, 죽어서는 시신을 태워 뿌려 좋은 세상에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이곳 깐야꾸마리는 인도의 가장 남쪽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세 바닷물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갠지스강과 더불어 성지로 손꼽혀 수많은 순례자들이 들끓는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한다. 이곳 인도의 유명한 성지에 왔으니 인도인들처럼 행동하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아서 흉내를 내보았다. 남교사 몇몇은 시간도 없고 하여 목욕까지 하진 않고 바닷물로 세수를 하고 발을 닦았다.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이곳에 여행을 온 기분을 더욱 업하는 것 같은 마음에서였다.

비행기 시간에 쫓겨 서둘러 트리반드룸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어 우리 일행은 아쉬움이 많았다. 다행스럽게 트리반드룸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리 막히지 않아 돌아오는 길 중간에 점심 식사도 했지만 오후 4시반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태그:#꺈야꾸마리, #간디, #티루발루바루, #꺈야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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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초등위원장,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을 거쳐 현재 초록교육연대 공돋대표를 9년째 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등학교에서 교사, 어린이, 학부모 초록동아리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미래, 초록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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