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파리의 밤거리. 카르티에라탱의 카페.
 파리의 밤거리. 카르티에라탱의 카페.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파리를 배경으로 한 그 많은 문학 작품 중 헤밍웨이의 초기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처럼 단숨에 읽은 소설도 드물다. 파리 체류 시절 발표한 이 작품으로 그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가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파리에 이주해 온 당시에 그는 작가가 아닌 신문사 특파원 신분이었다. 전쟁터에서의 상흔과 첫사랑의 아픔과 얼마간의 기자 경력을 지닌, 결혼한 지 몇 달 안 된 청년이었다. 이 무렵 파리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젊은 예술가들이 넘쳐나는 '움직이는 축제'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미국 최고의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파리의 센 강 좌안 가난한 예술가들의 터전이었던 카르티에라탱과 몽파르나스 지역에 자리를 잡은 헤밍웨이와 친구들의 일상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인물들로 고스란히 형상화 되었다. 제이크 반스, 브렛 애슐리, 로버트 콘, 마이클 캠벨. 누구는 육체가 병들었고 누구는 마음이 병들었다.

일상은 지루하기만 하다. 밤낮 술집과 카페를 몰려다닌다. 비틀거리고 쉽게 취해 버린다. 남의 나라에 사는 것도 부족해 또 다른 남의 나라에 우루루 몰려가 투우와 축제 속에 몸을 던진다. 술집에서 만난 이와 몸싸움을 하고, 낯선 남자에게 자신을 던지고는 사랑이라 믿어 버린다. 도망칠 궁리뿐이다.

파리의 밤거리. 카르티에라탱. 판테온 뒷골목.
 파리의 밤거리. 카르티에라탱. 판테온 뒷골목.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이 시대를 흔히 '광란의 시대(Roaring Twenties)', '재즈의 시대(Jazz Age)'라 일컫는다. 그리고 헤밍웨이 자신은 그렇게 불리기를 아주 싫어했다지만 사람들은 이 시대 이 세대를 흔히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 부르곤 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1920년대 파리의 밤거리를 헤매던 젊은 날의 헤밍웨이와 그의 친구들은 미국이 싫어 떠나온 이들이었다. '국외 추방자', '국외 이주자' 혹은 '자발적 망명자'라 불리는 이들은 당시 미국 사회에 대한 환멸감으로 고국을 등지고 떠나온 이들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파리로 쏟아져 들어왔던지, 당시 <파리 트리뷴>지는 파리를 '미국의 병원'이니 '미국의 도서관'이라고 빗대며 비아냥거릴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20년대 초 파리에 거주하던 미국인은 자그마치 3만 명에 이르고, 영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20만 명에 육박했다.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무렵 미국은 치솟는 주가와 밀주 매매로 신흥 부자들이 급증하고 전통적 관습과 가치가 무너져 가는 혼돈의 시대였다. 얼마 못 가 경제 공황이 오고 세계는 또 다시 전쟁의 화염에 휩싸인다. 그 잠깐의 시대를 오죽하면 역사학자들은 '만취 상태로 보낸 기나긴 주말'이라 불렀을까.

파리의 밤거리. 생 미셸 가
 파리의 밤거리. 생 미셸 가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그로부터 근 한 세기가 흘렀다. 그리고 여긴 지구 반대편이다. 그런데 내가 사는 이 나라의 이 시간은 어쩐지 그들의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쟁을 겪은 것은 반세기 전이지만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이뤄내며 또 다른 전쟁 같은 시간을 지나왔다. 이쯤 되면 먹고 살만해졌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의 책이 광화문 대형서점 매대 한복판에 떡 하니 누워 있고 '헬조선'이라는 우울한 말을 중학교 2학년 아이들까지 내뱉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 한다. 떠나지 못한 이들, 떠날 수 없는 이들은 이 땅을 저주한다. 미래를 말하기 두려워한다. 희망은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다.

제이크 반스와 브렛 애슐리처럼, 고국을 등진 수많은 젊은이들을 집어삼킨 파리에 나도 그들처럼 빨려 들어가고 싶었다. 절망과 허무와 혼돈의 시기에 방황하는 젊음의 도피처가 되었던 그곳에 내 지친 영혼도 맡기고 싶었다.

그들처럼 파리의 밤거리를 걷는다. 카르티에라탱의 골목길을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맨다. 판테온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소르본 대학의 뒷골목을 기웃거리고, 뤽상부르 공원 담벼락을 따라 걷는다.

생 미셸의 카페도 그대로다. 몽테뉴 생트주느비에브 거리에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바가 즐비하다. 제이크 반즈와 친구들이 몰려갔을 댄스 클럽도 기웃거린다. 세기가 달라져도 젊은이들은 밤거리를 방황한다.

파리의 밤거리. 카페와 바와 클럽에는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파리의 밤거리. 카페와 바와 클럽에는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이봐, 로버트, 다른 나라에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나도 벌써 그런 것은 모조리 해 봤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닌다고 해서 너 자신한테서 달아날 수 있는 건 아냐. 그래 봤자 별거 없어."
"하지만 넌 남미에 가 본 적도 없잖아."
"남아메리카라니 무슨 말라죽은 소리야! 지금 같은 심정으로 그곳에 가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곳은 괜찮은 도시야. 어째서 파리에서 새로 인생을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
"난 파리가 진절머리가 나. 난 카르티에라탱이 넌더리가 난단 말이야."


숨통이 트일까 싶어 도망치듯 날아왔지만 그들은 이곳에 딱히 뿌리를 내리지도 못했다. 도피처로 삼은 곳이지만 파리도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내게도 파리는 그랬다. 애틋하고 그립지만 잡을 수 없는 곳, 영영 머물고 싶지만 끝내 떠나야 하는 곳, 몹시 갖고 싶지만 얻을 수 없는 곳, 어떻게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곳. 

어쩌란 말이냐. 모두가 파리로 떠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파리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그대로인데 그곳에 간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태양은 다시 또 떠오르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파리의 밤거리. 몽테뉴 생뜨쥬느비에브 거리에는 예나 지금이나 바와 클럽이 즐비하다.
 파리의 밤거리. 몽테뉴 생뜨쥬느비에브 거리에는 예나 지금이나 바와 클럽이 즐비하다.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 어니스트 헤밍웨이, 김욱동 역, 민음사, 2011.



태그:#파리, #카르티에라탱, #헤밍웨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