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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난킨마치에서 점심을

밤과 전혀 다른 낮의 모습
▲ 북적대는 난킨마치 밤과 전혀 다른 낮의 모습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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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고베를 나와 고베의료생활협동조합(아래 고베의료생협)에 가기 전 우리가 들른 곳은 고베시 중앙에 위치한 고베 난킨마치(南京町), 즉 고베시의 차이나타운이었다. 현지 코디네이터는 아무리 일정이 빡빡한 연수라지만 그래도 현지에서 한 끼 정도는 버벅대며 혼자 사먹어 보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우리의 손에 천 엔씩을 쥐어주었다.

그러나 코디네이터의 생각과 달리 우리에게 고베 난킨마치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미 전날 밤 고베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먹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덕분이었다. 다만 어제는 밤이었기에(대부분의 가게들이 최대 22시 이후 종료였다)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반해, 오늘은 낮인 만큼 거리가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전세계 공통적인 그들의 문
▲ 차이나타운의 상징 전세계 공통적인 그들의 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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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시의 차이나타운
▲ 한산한 난킨마치 고베시의 차이나타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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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나가사키의 차이나타운과 함께 일본 3대 차이나타운이라고 하는 고베의 난킨마치. 그러나 난킨마치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또한 특별하지도 않았다. 관광책자에는 난킨마치가 고베의 꼭 가야 할 관광장소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그 규모는 인천의 차이나타운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대부분의 가게들은 인천과 마찬가지로 식당이었으며, 거리의 모습이나 위생수준 역시 인천과 대동소이했다.

도대체 왜지? 중국인들은 다 비슷하게 살기 때문일까? 인천의 차이나타운이야 군사정부 시절 폐쇄적인 화교정책으로 인해 그만큼 발전하지 못하고 식당만 들어섰다고 하지만 일본의 차이나타운은 왜 우리와 비슷한 거지?

그 이유는 안내판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안내판에는 난킨마치가 쇼와시대(1926년~1989년) 초 '세계 모든 나라의 진품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 매우 번성했으나 1945년 미군의 공습으로 큰 타격을 받은 이후 점점 쇠퇴하게 되었고, 이후 고베시 정책에 의해서 복원되었다고 적혀있었다.

즉, 차이나타운이 오랜 역사를 갖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에 의해 유지되어 온 것이 아니라 고베시 당국에 의해 관광 등을 위해 재구성된 것이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수밖에.

차이나타운에 대한 편견
▲ 청결하지 않은 위생 차이나타운에 대한 편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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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난킨마치가 인천의 차이나타운과 다른 모습이 있다면 여느 일본의 거리와 마찬가지로 치과가 많다는 사실과 함께 중국어 어학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차별이 심한 한국에서 화교가 살아남으려면 식당 혹은 어학원을 운영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천에는 90년대 말부터 중국어 어학원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었는데, 고베의 차이나타운에서는 어학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일본인들이 중국시장에 그만큼 관심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일본인이 외국어를 대하는 자세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외국어 콤플렉스에 갇혀 영어나 중국어가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거의 유일한 기준이지만, 일본에서는 외국어가 단지 하나의 도구일 뿐, 그 모든 것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

한때 미국과 자웅을 겨뤘던 제국을 운영했던 일본인들 아닌가. 그러니 자국 문화에 대해 자긍심이 셀 수밖에 없고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우리보다 주체적일 수밖에. 일본에 번역과 관련된 학문이 발달한 것도 아마 이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차이나타운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선택한 것은 결국 일본의 라멘이었다. 중국의 라우미엔에서 유래되어 일본에는 라멘으로 정착되고, 우리에게는 라면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있는 그 음식. 이렇게 음식 하나만 봐도 떼려야 뗄 수 없는 한중일 관계이건만 우리는 언제쯤 상대방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

일본 라멘
▲ 오늘의 점심 일본 라멘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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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의료생활협동조합의 열정

점심을 먹고 방문한 고베의료생협 사무실은 고베 시내의 어느 시장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은 마치 지역의 사랑방 같은 느낌이었는데, 외국 손님인 우리가 들어가서 조합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로 옆에서 조합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 공간이 조합원들에게 결코 어려운 공간이 아니라는, 의료생협이 지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하나의 증거였다.

조합원 대표는 우선 고베의료생협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무엇보다 의료생협의 시작이 1948년임을 강조했다. 관련된 자료나 홈페이지에는 의료생협이 1961년도에 설립되었다고 적혀있으나, 그것은 1961년 협동조합법이 설립된 이후 등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실제로 의료생협 활동은 1948년 전후 일본이 혼란할 때 '우리 병은 우리가 살펴보자'라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70년이 넘는 의료생협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베의료생협의 열정
▲ 열심히 토론 중 고베의료생협의 열정
ⓒ 류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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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는 이어서 의료생협의 현황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그것은 우리네 의료생협들과 비교하여 엄청난 규모였다. 2015년 9월을 기준으로 고베의료생협은 조합원이 5만 4395명, 출자금은 우리 돈으로 약 190억, 52개 지부에 417반이 운영되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의료생협인 안성의료생협의 조합원이 약 5100명, 출자금이 약 9억인 걸 감안한다면 일본의 의료생협이 얼마나 대단한지 감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럼 그들은 이런 거대한 조직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을까? 본디 조직이 커지면 그만큼 사소한 것에 신경 쓰기 힘들고, 그러다 보면 조직이 깨지는 법인데 어떻게 그들은 이 큰 조직을 70년 동안이나 이끌고 온 것일까? 혹시 협동조합의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거대한 의료재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건 아닐까?

이에 대해 의료생협 대표는 소식지 예를 들며, 의료생협이 어떻게 조합원들을 챙기고 있는지 설명해 주었다. 의료생협은 3만 5천부의 소식지를 격월로 출간하는데, 이는 조합원들이 반드시 직접 방문 배달한다고 했다. 비록 비용의 문제도 있고 효율성도 떨어지지만 결국 협동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합원들끼리의 신뢰이기에 이 면대면 소식지 배송을 통해 당신이 조합의 주인임을 상기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의료생협을 정비한다는 것이었다.

부끄러웠다. 과연 우리들은 주민들이나 조합원을 만날 때 어떻게 하고 있는가. 소식지나 팸플릿 등의 직접 배송은 커녕 원가절감과 효율성만을 강조하며 중요한 공지도 이메일로 대뜸 보내버리고 확인 유무의 책임은 상대방에게 미루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 아니던가. 결국 현재 일본의 의료생협이 이만큼 커질 수 있었던 건 단지 세월의 힘뿐만이 아니라 조합원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베 대지진과 고베의료생협

의료생협에서 나눠준 자료
▲ 그들이 기억하는 고베 대지진 의료생협에서 나눠준 자료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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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베의료생협은 고베 대지진을 맞아 무슨 변화를 겪었을까? 고베 대지진은 이후 CS고베가 만들어질 정도로 고베 시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문득 대지진이 고베의료생협에 끼친 영향이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 대표는 크게 두 가지를 지적했다. 재해에 대한 지원 방침의 변화와 고령자들에 대한 지원 강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고베 대지진 이후 고베의료생협은 재해에 대한 지원 방침을 변화시켜, 전국 어디서나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급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는 고베 대지진 당시 전국 의료생협들의 도움을 받았던 경험 때문인데, 대표는 그 당시 그들의 도움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강조했고, 따라서 그 은혜를 꼭 갚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현재 그와 같은 맥락에서 고베의료생협은 ING라는 단체를 만들어 일본 동북부의 방사능 지역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고령화에 대한 대책을 논하다
▲ 일본에게서 우리를 본다 고령화에 대한 대책을 논하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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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베의료생협은 고베시를 도와 고령자들에 대한 지원 강화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베시는 대지진으로 인한 사상자의 많은 부분이 65세 이상의 고령자임을 주목하고 이후 고령자들을 위한 시설확충이나 고령자들의 개호(복지)에 많은 지원을 하고 나섰는데 고베의료생협은 현재 이런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대표적인 예로 고베의료생협은 본사의 3층과 4층을 모두 노인들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가정과 병원의 가운데쯤 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현재 초고령화 사회에 들어선 일본의 고민 중 하나는 고독사가 너무 많다는 점인데, 의료생협은 노인들에게 월 4만 엔(보통 고베시의 월세는 7~8만 엔)에 이 공간을 대여해 주고 있었다. 그 4만 엔은 정부가 생활 보호자에게 매달 지급해 주는 돈으로, 의료생협은 수익이 아니라 지역의 고령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이에 덧붙여 고베의료생협은 지역의 커뮤니티 또한 강화시키고 있었는데, 이는 결국 노인들의 고독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역공동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조합원 3명 이상이면 만들 수 있는 반(班)은 일본 의료생협의 지역 최소 단위의 소규모 활동 조직으로서 의료생협은 반모임을 통해 독거노인 생일 방문, 쓰레기 버리기, 말벗 자원 활동, 건강 관련 활동 등을 하며 노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고령화된 사회에서 노인들을 위해 고민하는 고베의료생협.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며 가장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는 대한민국. 과연 우리는 일본만큼 고령화 사회를 준비하고 있는가. 기껏해야 이제는 실버산업이 뜬다며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돈벌이 타령만 하거나, 선거 때 노인들의 표를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 만 고민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수준 아니던가.

당장 닥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이 OECD 국가 중 최고의 노인빈곤률과 노인자살률을 기록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고령화에 대해 안일하다는 증거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풍조 속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은 노인이 된다'는 자연의 순리마저 잊어버린 채 고령화를 단지 비용이나 정치 공학적으로 계산하고 있다. 노인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존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베포트타워와 해양박물관
▲ 고베시의 야경 고베포트타워와 해양박물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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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의료생협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 창밖으로 계속 보이는 오래된 목조가옥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고베시는 노인들의 고독사 이후 남겨진 빈집 때문에 골치라고 했었는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집들이 빈집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고령화의 심각성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과연 우리는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복지 이야기만 꺼내도 빨갱이 취급 받는 이 척박한 토양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기획해야 할까.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적경제와 마을공동체의 할 일이 너무 많음을 인식하게 된 하루였다.


태그:#고베의료생협,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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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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