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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가 헤매고 다녔음직한 파리 뤽상부르 공원 근처.
 헤밍웨이가 헤매고 다녔음직한 파리 뤽상부르 공원 근처.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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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스물 둘이던 1921년부터 7년간 파리에 살았고, 그 시절을 회고하는 글을 노년에 썼다.
 헤밍웨이는 스물 둘이던 1921년부터 7년간 파리에 살았고, 그 시절을 회고하는 글을 노년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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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행운이 그대에게 따라 준다면,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A Moveable Feast)처럼 평생 당신 곁에 머물 것이다. 내게 파리가 그랬던 것처럼."

헤밍웨이는 스물 둘이던 1921년부터 7년을 파리에서 살았다. 그리고 삼십여 년이 지난 1957년 가을부터 1961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석 달 전까지 파리 시절을 회고하는 글을 썼다.

새삼스레 노년의 헤밍웨이가 쓴, 젊은 날 파리 체류 당시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읽은 것이 문제였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고 기억 저편의 파리도 문득 너무나 그리웠다. 때마침 파리 출장 일정이 잡히면서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었다.

여행기를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가만 생각하니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집필실에서였다. 수년 전 자동차로 미국 대륙을 누비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키웨스트의 명소 중 하나인 헤밍웨이 집엘 들른 적이 있다.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아니, 여름날처럼 뜨거운 12월 마지막 주였다.

넓디넓은 미국 땅 끝자락 플로리다 최남단 키웨스트에 있는 그 초록색 이층집은 커다란 수영장과 스물 몇 마리의 고양이가 유명했다. 하지만 내 기억은 별채의 이층 작업실을 오르던 좁고 가파른 계단의 설렘과 볕이 잘 드는 작업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오래된 타자기를 대면했을 때의 두근거림이 전부이다. 낡은 포터블 로열 타자기가 놓여 있는 짙은 갈색 테이블은 눈부신 햇살이 들어오는 새하얀 방 가운데에서 빛나고 있었다.

마침 운 좋게도, 원래는 개방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작업실 내부를 안내원의 도움으로 들어가 방 한가운데서 사진까지 찍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사진은 수많은 여행 사진 중에서도 특별히 아끼는 한 장이 되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헤밍웨이 집필실 한복판에 엉거주춤 서 있는 사진 속 나를 보며 꿈을 키우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집필실.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집필실.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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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우습지 않은가. 파리를 꿈꾸면서 프랑스의 이름난 예술가나 철학자의 이름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기껏, 변덕스런 날씨에 투덜거리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낡은 셋집에서 웅크리고 지낸, 젊은 시절 한때 잠시 그곳에 머물렀을 뿐인 남의 나라 작가를 떠올리다니. 게다가 그 남자는 투우와 사냥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해 바람이나 피워대고, 툭하면 사고나 치고 폭음이나 해대던 '나쁜 남자'가 아니던가.

파리가 처음은 아니다. 아주 오래 전, 내 앞에 펼쳐질 인생이 가슴 벅차던 어린 시절, 파리를 처음 여행했다. 그때 그곳을 떠나올 때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마음속엔 꿈이 가득했고, 언제라도 맘만 먹으면 다시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가 파리에 살았던 딱 그 나이 만할 때였다. 그리고 스무 해가 흘렀다.

이후로 파리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노년의 헤밍웨이가 젊었던 자신의 파리 시절을 추억한 에세이만큼 푹 빠져 읽은 파리 이야기는 없었다. <A Moveable Feast>라는 제목의 이 회고록은 헤밍웨이 사후 3년이 되던 1964년 출간되었다. 그의 네 번째 부인인 메리 웰시가 편집한 것으로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으로 번역된 바 있다. 이후 2010년에는 두 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의 손자 숀 헤밍웨이가 미완성, 미발표 원고들을 추가 편집해 동일한 제목의 증보판을 출간한다. 우리나라에선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토론토 스타>의 유럽 특파원 신분이었던 헤밍웨이는 비록 가난했지만 너무나 행복했던 시절로 파리를 추억한다. 에즈라 파운드, 스콧 피츠제럴드, 거투르드 스타인 등 당대의 쟁쟁한 문인들과 교류하며 파리의 카페와 골목을 헤매고, 아름다운 문장과 진실한 작품에 대한 부푼 꿈을 이제 막 결혼한 아내 해들리에게 밤마다 쏟아내곤 한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찬란했던 시절은 있는 법이다. 퓰리처상에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며 큰 성공을 이루지만, 작가로서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춥고 배고팠던 파리 시절이 그에겐 어쩌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었을지 모른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주순애 역, 이숲, 2012.
 <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주순애 역, 이숲, 2012.
ⓒ 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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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파리를 젊은 날의 헤밍웨이처럼 헤매 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맘먹고 나니 동선 구성이 재미있어졌다. 헤밍웨이의 소설과 에세이를 다시 펼쳐 놓고 지도에 표시를 했다.

카디날 르무안 거리 74번지 이층 작은 아파트에 가 보고 싶었다. 구석진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을 묘사하며 종일 시간을 보내던 생 미셸 광장의 카페에도 가 봐야 했다.

무프타르 거리를 지나 팡테옹과 소르본 대학 뒷골목을 헤매던 청년 헤밍웨이도 만나야 했다. 맘껏 책을 빌려 가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처럼 좋아했던 실비아의 책방에도 꼭 가 봐야 했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문학을 논했던 몽파르나스의 술집도 들러 보고, 거투르드 스타인과 다툰 후 혼자 씩씩거리며 돌아왔던 뤽상부르 공원 뒷길도 걸어 보고 싶었다.

오래된 도시의 낮과 밤을 천천히 거닐며 잃어버린 시간과 두고 온 젊음과 덮어둔 꿈을 꺼내보고 싶었다. 어쩐지 그러면 모든 것이 선명해질 것만 같았다.

"스무 해를 지나 나 이렇게 여기 다시 왔는데 그대, 파리는 안녕한가." 묻고 싶었다. 가을, 두 번째 파리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태그:#파리 여행, #헤밍웨이, #키웨스트, #움직이는 축제, #A MOVEABLE F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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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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