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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장군을 기리는 경북 상주 충의사의 외삼문 (아래는 현지 안내판의 장군에 대한 소개문 중 일부)
 정기룡 장군을 기리는 경북 상주 충의사의 외삼문 (아래는 현지 안내판의 장군에 대한 소개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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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경북) 고령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리고, 계속 (경북) 상주, 고령, (경남) 합천, 초개,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였으며, 이어 경주, 울산을 수복했다.'

이 비문(非文)은 충의사 안내판의 일부 내용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충의로 230에 있는 충의사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정기룡 장군을 기려 세워졌다. 물론 충의사 경내에는 사당만이 아니라 전시관도 별도로 건립되어 있다. 전시관은 장군의 유품, 관련 그림 등을 보여준다.

정기룡 장군이 일본군 장수를 생포한 고령 둔덕

정기룡 장군이 '적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한 고령의 전장을 찾아본다. 1597년 8월 7일과 8월 8일 이틀 동안 일구었던 둔덕대첩(屯德大捷)의 현장 '둔덕'도 그 중 한 곳이다. 고령군청 누리집은 둔덕을 '현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로 소개하고 있다.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는 군청과 주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지고 있다. 고령군청(대가야읍)과 고령향교 사이로 나 있는 등산로를 걸어 주산 정상을 넘은 다음, 계속 이어지는 능선을 걸으면 미숭산 정상까지 갈 수 있다. 그 사이 대략 1/4 지점쯤에 임도를 주행하는 차량을 위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가야대학교, 오른쪽으로 가면 중화리, 직진하면 미숭산으로 간다. 사진은 주차장에서 미숭산을 향해 오르다가 내려다본 중화1리의 풍경이다. 1597년 정기룡 장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둔덕(중화2리)은 왼쪽 능선과 멀리 보이는 호수(낫질못)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는 군청과 주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지고 있다. 고령군청(대가야읍)과 고령향교 사이로 나 있는 등산로를 걸어 주산 정상을 넘은 다음, 계속 이어지는 능선을 걸으면 미숭산 정상까지 갈 수 있다. 그 사이 대략 1/4 지점쯤에 임도를 주행하는 차량을 위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가야대학교, 오른쪽으로 가면 중화리, 직진하면 미숭산으로 간다. 사진은 주차장에서 미숭산을 향해 오르다가 내려다본 중화1리의 풍경이다. 1597년 정기룡 장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둔덕(중화2리)은 왼쪽 능선과 멀리 보이는 호수(낫질못)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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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읍내(邑內)는 지금처럼 군청 소재지 규모의 도회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대구읍성", "경주읍성" 할 때의 읍성(邑城)은 임금이 있는 도성(都城) 다음가는 큰 이름이었다. 읍은 현대의 시(市)에 맞먹는 지역 중심지였고, 부(府)였던 대도시들이 "서울시(1946년), 부산시(1949년), 대구시(1949년)"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해방 이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화자가 "읍내 간다." 하면 청자는 곧장 '시내(市內) 번화가에 간다는 말이군' 하고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대가야읍 중화리'는 이름만 읍내일 뿐 도회 중심의 번화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행정구역상으로만 읍내이지 실제로는 한적한 산촌 마을일 따름이다. 주산과 낫질못(중화 저수지) 때문이다. 주산은 군청과 중화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고, 낫질못은 주산 아래를 빙 둘러 걸어 마을로 가는 길을 틀어막고 있다. 부산과 오륙도 사이의 바다처럼 주산과 낫질못은 읍내와 중화리 가운데에서 난도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큰 못둑이 가로막고 있는 골짜기 속의 둔덕

둑 아래 우륵박물관 쪽에서 무심히 쳐다보면 낫질못 뒤에는 단 한 채의 집도 없을 듯 느껴진다. 못둑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이 제각각 산에 붙었으니 더 이상 길이 없으리라 여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저수지 왼쪽 벼랑에 떨어질 듯 도로가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답사자는 아무리 대단한 탐험가 기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못 뒤로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못 뒤 그 깊은 골짜기에서 둔덕전투가 벌어졌다.

속칭 '화갑'이라 부르는 중화1리의 마을 어귀에서 본 낫질못의 봄 풍경
 속칭 '화갑'이라 부르는 중화1리의 마을 어귀에서 본 낫질못의 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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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에 붙어 있는 구불구불하고 그늘진 도로를 잠시 오르면 낫질못이 나타난다. 그러나 도로에서 낫질못으로 내려가는 길은 없다. 못 중간쯤 가면 왼쪽으로 중화1리로 들어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그 어귀 마을 표지석에는 '중화 1리'가 커다랗게, '화갑'이 그 아래에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중화1리가 화갑(花甲)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봄에 진달래꽃(花)이 가득(甲) 피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도로를 직진하면 금세 왼쪽에 폐교가 나오고, 폐교 뒤부터 중화2리가 이어진다. 도로변의 마을 표지석에는 '중화 2리'와 '덕촌마을'이 새겨져 있다. 덕촌은 어디에서 유래된 이름일까? 아마 둔덕에서 왔을 터이고, 둔덕은 언덕을 가리키는 '둔(屯)'과 언덕의 '덕'이 붙어서 생성된 말인 듯하다. 결국 둔덕은 언덕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추측으로 임진왜란의 전장을 단정할 수는 없다.

중화1리는 화갑인데 중화2리는 둔덕 아닌 덕촌이라고?

아직 '둔덕'이 새겨진 빗돌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중화2리 뒤로 더 들어가본다. '중화3리가 있다면 둔덕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기도 하지만, 내심으로는 길이 막힌 골짜기가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다. 중화2리가 둔덕이 아니고, 중화3리는 아예 없다면? 골짜기 입구는 낫질못이 병두껑처럼 막아버렸고, 붙다시피 인접해 있는 중화 1리와 2리의 땅은 마치 병목인 양 좁다. 그런데도 중화3리가 있을까?

중화2리가 끝나면 사람 사는 땅도 끝나리라 여겨졌지만, 뜻밖에도 골짜기 안에는 커다란 평야가 숨어 있었다. 미숭산 자연휴양림 3km, 대가야 고령생태숲 4.7km 표지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들판은 거의 10리 가까이 이어지는 게 틀림없다. 중화저수지로 막힌 골짜기가 안에 이렇듯 넓은 들판을 품고 있을 줄이야!
 중화2리가 끝나면 사람 사는 땅도 끝나리라 여겨졌지만, 뜻밖에도 골짜기 안에는 커다란 평야가 숨어 있었다. 미숭산 자연휴양림 3km, 대가야 고령생태숲 4.7km 표지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들판은 거의 10리 가까이 이어지는 게 틀림없다. 중화저수지로 막힌 골짜기가 안에 이렇듯 넓은 들판을 품고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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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2리 뒤로는 더 이상 마을이 없을 듯하지만, 실제로는 저전리와 내상리에 이어 마지막으로 신리가 이어진다. 땅도 넓어 도로가 끝나는 곳까지 직선 반경이 무려 3km나 되는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미숭산 자연유양림까지 3km, 대가야 고령 생태숲까지 4.7km 더 가야 한다는 이정표가 평야 들머리에 서 있다.

군사 전술에 관한 전문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보아도 이곳은 지형에 익숙한 군대가 적을 조용히 포위한 후 일격필살로 제압하기에 아주 적합해 보인다. 넓은 평야가 분지처럼 도사리고 있어 온 사방이 골짜기이고, 뒤쪽은 양옆으로 산이 막는데다 그 가운데가 깊고 넓은 물이라 퇴로가 없다. 이곳 이상으로 매복했다가 기습하기에 안성마춤인 싸움터도 달리 없을 성싶다. 게다가 농토가 넓어 갑자기 찾아온 조선 군인들에게 곡식을 내놓을 농민들 또한 적잖을 것이다.

적의 뒤는 큰 못, 사방은 아군이 매복하기 좋은 골짜기

만약 적들이 식수 조달의 용이함에 매혹되어 못가 둔덕에 진지를 구축한다면 그들은 두껑이 막힌 병 안에 든 피라미꼴이 된다. 뒤로는 낫질못이 가로막고 있으니 후퇴하면 큰 물고기의 밥이 되고, 앞으로 나섰다가는 병목에 갇혀 아군의 불화살에 온몸이 시뻘겋게 타오른다. 사방 골짜기에 매복해 있던 아군들이 한꺼번에 내리치면 적들은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다. 미숭산 등산로 입구, 인가가 끊기는 신리의 주민 문귀열(남, 78세)씨도 "덕촌마을이 바로 (임진왜란 때 정기룡 장군의 조선군이 일본군들을 참살한) 둔덕"이라고 증언했다.

둔덕(중화2리)마을 앞에서 본 낫질못의 겨울 풍경. 이 사진을 찍은 자리도 일본군들이 정기룡 군대에게 죽음을 맞이한 전쟁의 현장일 것이다.
 둔덕(중화2리)마을 앞에서 본 낫질못의 겨울 풍경. 이 사진을 찍은 자리도 일본군들이 정기룡 군대에게 죽음을 맞이한 전쟁의 현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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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선조 30) 일본이 조선을 재차 침략했다. 6백여 척에 나누어 탄 일본군 11만여 명이 부산 앞바다에 닿은 때는 1597년 7월 8일이었다.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 때와 달리 하삼도(下三道,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완전히 점령한 후 북상하는 전략으로 나왔다. 군량미를 조달할 수 있는 호남 등을 그냥 둔 채 평양까지 올라갔다가 굶주림에 지쳐 전의를 상실했던 교훈을 되새겼던 것이다.

변화된 전쟁 계획에 따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1만 일본군이 (경남) 의령과 삼가를 거쳐 (경북) 성주 방면으로 밀려왔다. 특히 낙동강과 만나는 고령 회천(會川)의 고아리는 이미 가야 때에도 조선소가 설치되었던 대단한 포구였다. 일본군은 배를 타고 낙동강으로 북상했다. 8월 초가 되자 일본군은 고령까지 몰려왔다.

"오직 정기룡이 나서야 왜적을 막을 것"


정기룡 초상(경북 상주 충의사 전시 그림을 촬영한 것임)
 정기룡 초상(경북 상주 충의사 전시 그림을 촬영한 것임)
ⓒ 충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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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의) 금오산성에 머물면서 영남 지역 군대 전체를 관장하던 도체찰사 이원익이 도원수 권율과 영남조방장 곽재우를 불렀다. 이원익이 "재차 쳐들어온 왜적들을 막을 수 있는 인재로는 누구를 추천하겠소?" 하고 물으니 모두들 "정기룡이 아니면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당시 상주목사 정기룡은 관내 9개 군의 군대를 거느린 채 금오산성을 지키고 있었다.

정기룡이 500기병과 800보병을 거느리고 출전하면서 이원익의 막사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정기룡은 절을 하지 않고 그냥 그 앞을 지나쳤다. 체찰사의 막료들이 한결같이 "정기룡이 예의를 모르는 무지랭이로군요" 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말을 들은 이원익은 "갑옷과 투구로 무장을 한 대장이 어찌 작은 예의를 갖추는 일에 신경을 쓰리오, 조금만 기다리면 정 장군이 대승리를 알려올 테니 그를 더 이상 꾸짖지 마시오" 하며 정기룡을 비호했다.

둔덕(중화2리) 앞에서 본 낫질못 방향. 이 천변 오른쪽 골짜기로 유인되었다가 미리 매복 중이던 정기룡 군의 불화살 공격을 받은 다이라 군은 이곳까지 쫓겨내려오면서 거의 전멸했다.
 둔덕(중화2리) 앞에서 본 낫질못 방향. 이 천변 오른쪽 골짜기로 유인되었다가 미리 매복 중이던 정기룡 군의 불화살 공격을 받은 다이라 군은 이곳까지 쫓겨내려오면서 거의 전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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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에서는 다이라 스키마스(平調益)의 일본군 1천여 명이 가교 설치와 요새 구축 등 본군의 북상을 돕기 위한 선발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몰래 둔덕 뒤편에 군대를 잠입시킨 정기룡은 날이 새면 큰 싸움터로 변할 현장의 지형을 세심하게 살핀 다음, 이곳 출신 군사들과 주민들을 만나 보충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깊은 밤, 정기룡은 담이 크고 무예에 정통한 병사들을 10명 선발하여 적진에 침투했다. 잠들어 있던 적장 다이라는 정기룡의 칼날이 목에 닿자 섬찟 몸을 떨었다. 다이라는 "나는 본래 이번 전쟁을 반대했다, 오늘 조선 군진으로 가서 화친 담판을 하려 한다, 내일 아침 조선 군진에 붉은 깃발이 오르면 내가 죽은 것이니 군사를 돌려라, 파란 깃발이 오르면 화친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지만 명군의 감시를 피해야 하니 천변 서쪽으로 잠시 군사를 숨겨라" 하는 내용의 편지에 서명을 하여 남긴 후 조선군 진지로 끌려 왔다.

미리 매복을 해둔 곳으로 일본군들을 유인

다이라의 편지 옆에 정기룡 명의의 편지도 한 통 놓였다. 정기룡은 "지금 당장 너희들을 죽일 수 있지만 해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은 너희 장수 다이라 공과 살생을 싫어하는 우리 조선의 은혜임을 명심하라"고 썼다. 이튿날 아침, 일본군들은 조선 군진에 파란 깃발이 올라가고 그 아래에서 다이라가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천변 서쪽에 있는 치바웃골·들박들·무른들·밋골·붕들 등의 협곡으로 들어갔다. 이날 다이라의 일본군은 몇 명의 구사일생 도주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에서 죽었다.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뒷산의 이름은 주산이다. 군청 뒤에 자리잡고 있는 (사진의 오른쪽 능선) 주산을 곧장 넘으면 중화리가 나오고, 중화리에서 차도를 따라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저전리, 신리에 닿는다. 신리 끝에는 신동저수지라는 큰 호수가 있는데, 여기서부터 (고려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와 맞서 싸우다 실패한 이미숭 장군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미숭산 등산로가 시작된다. 신동저수지 둑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동그라미 쳐진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중화리 지대가 병목을 이루고, 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들판이 펼쳐지는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정기룡 장군은 병목 부분(지금의 중화2리)에서 일본군들을 제압했다.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뒷산의 이름은 주산이다. 군청 뒤에 자리잡고 있는 (사진의 오른쪽 능선) 주산을 곧장 넘으면 중화리가 나오고, 중화리에서 차도를 따라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저전리, 신리에 닿는다. 신리 끝에는 신동저수지라는 큰 호수가 있는데, 여기서부터 (고려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와 맞서 싸우다 실패한 이미숭 장군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미숭산 등산로가 시작된다. 신동저수지 둑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동그라미 쳐진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중화리 지대가 병목을 이루고, 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들판이 펼쳐지는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정기룡 장군은 병목 부분(지금의 중화2리)에서 일본군들을 제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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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 앞 개울은 겨울을 맞아 바닥까지 내보일 만큼 말라 있다. 하지만 낫질못의 수면은 광활하고, 살짝 잿빛이 서린 듯한 살얼음 아래를 오가는 물은 그저 맑을 뿐이다. 언제 이렇듯 물이 투명해진 것일까? 1597년 여름 8월 8일, 이곳은 온통 시뻘건 핏물로 진득하였을 텐데.....

다리가 놓이고 있다. 전쟁의 붉은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 이제는 혈전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싸움터가 평화로운 유원지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곳에서 용맹을 드날린 1300여 정기룡 군의 기백을 기리고, 이름도 없이 죽어간 1천여 일본군의 영혼을 위로하는 뜻에서 다리 입구에 평화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우면 좋으리라.   

둔덕 마을 앞에 놓이고 있는 다리. 정유재란 당시 핏물 자욱하던 전쟁터였지만 이제는 평화로운 유원지로 변해가고 있다. 이곳에 정기룡 장군을 비롯한 1,300 조선군의 충혼을 기리고, 죽은 1천여 일본군의 넋을 기리는 조형물을 설치하여 앞날의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물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둔덕 마을 앞에 놓이고 있는 다리. 정유재란 당시 핏물 자욱하던 전쟁터였지만 이제는 평화로운 유원지로 변해가고 있다. 이곳에 정기룡 장군을 비롯한 1,300 조선군의 충혼을 기리고, 죽은 1천여 일본군의 넋을 기리는 조형물을 설치하여 앞날의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물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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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기룡, #둔덕대첩, #정유재란, #임진왜란,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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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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