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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혼자 '한 달 네팔여행'을 다녀왔다. 10박 11일 동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올랐고, 어떤 날은 할 일 없이 골목을 서성였다. 바쁘게 다니는 여행 대신 느리게 쉬는 여행을 택했다. 쉼을 얻고 돌아온 여행이었지만, 그 끝은 슬펐다. 한국에 돌아오고 2주 뒤 네팔은 지진의 슬픔에 잠겼다. 그래도 네팔이 살면서 한 번쯤 가봐야 할 곳임에는 변함이 없다. 30일간의 이야기를 전한다. - 기자 말

시누와에서 데우랄리로 가는 길. 설산들이 보인다.
 시누와에서 데우랄리로 가는 길. 설산들이 보인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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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와일드>에서 여주인공은 멕시코 국경과 캐나다 국경을 잇는 4285km의 도보여행 코스(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PCT)를 걷는다. 눈덮인 고산, 사막, 화산지대 등을 지나야 하며, 완주하는 데 평균 152일에 달하는 이 길은 '악마의 코스'로 불리기도 한다.

게다가 텐트부터 양말까지 모든 짐은 자기가 져야 한다.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 모든 걸 혼자 해결하고 감당해야 한다. 한 해 고작 120여 명 가량이 이 코스를 완주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 속 주인공은 "그만둘 생각해봤냐"는 한 남자의 질문에 "겨우 2분에 한 번씩 해요"라고 쿨하게 답한다.

평소에 운동 안 한 여자도 갈 수 있는 ABC 코스?

3230m 데우랄리에 도착했다.
 3230m 데우랄리에 도착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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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우랄리 풍경.
 데우랄리 풍경.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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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돌덩이들을 오르면서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말을 되뇌이고 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정말,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러니까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평소에 운동 안 한 여자들도 다녀올 수 있다'고 소문난 ABC 코스이다. 고통도 지나고 난 뒤엔 희미해지기 때문인지, 믿을 수 없게도 그렇게 '소문'이 나있다. 그런데 나는 포터 아저씨와 내 짐을 나눠졌는데도 10초에 한 번씩 그만두고 싶다.

"ABC 코스도 쉽지 않아요. 절대 만만히 볼 게 아니에요."

소문은 멀게만 느껴졌고, 경험은 상상 이상이었다. 트레킹 준비를 도와줬던 포카라 식당 사장의 소감이 현실에 더 가까웠다. 내가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는 방법 빼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포카라로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여긴 택시도 없고, 두 다리 말고 내려갈 방법은 당연히, 없다. 오로지 '직진'뿐이다.

식당 의자가 오늘 나의 침대다.
 식당 의자가 오늘 나의 침대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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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없대요."
"트리플룸도요?"
"단체여행객들이 와서, 하나도 없대요."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격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린 비를 뚫고 물에 빠진 생쥐꼴로 목적지인 데우랄리(3230m)에 도착했다. 그런데, 방이 없단다. 아무리 스프링 시즌이라지만 돌길과 계단을 걸어 오후 3시도 되기 전에 도착했는데 방이 하나도 없다니. 포터 아저씨 말로는 이미 일주일 전에 예약이 끝났단다.

한국을 떠날 때 품었던 이번 여행의 마음가짐은 '도험소보(道險笑步)'였다. 그 말 그대로,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걸어가'...... 려고 했다. 근데 도무지 웃음이 지어지질 않는다.

우리가 있는 로지엔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그 위쪽 로지엔 서양인들이, 아래 로지엔 일본인들이 가득이다. 단체 관광객들이 방을 잡아버리면 어쩔 도리가 없고, 로지 주인들도 1, 2명 적은 수의 여행자들에겐 방을 잘 주려고 하지 않는단다. 로지에서 쓰는 돈의 규모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

포터와 가이드들이 하는 카드 놀이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람들.
 포터와 가이드들이 하는 카드 놀이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람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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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우랄리 로지에 남은 방은 없었다.
 데우랄리 로지에 남은 방은 없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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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남은 자리는 다이닝룸, 즉 식당 뿐이다. 트레커들의 식당이 밤이 되면 방으로 바뀌고(?), 밥 먹을 때 앉았던 의자는 아쉬운 대로 침대가 된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묵을 데는 이 로지 식당이고, 내 몸을 뉘일 곳은 지금 수많은 엉덩이들이 걸쳐 있는 이 나무 의자다.

피로와 절망이 겹쳐 시한폭탄이 됐다. 누구 하나 건드리면 바로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 짐도 맘 편히 풀 수 없어 의자에 대충 옷가지 몇 개만 꺼내놓았다. 핫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기분은 썩 나아지지 않는다. 씻기 전이 지옥이었다면, 씻고 나서는 지옥문 앞으로 겨우 몇 발자국 옮긴 느낌. 훌훌 털고 그 문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가라앉은 마음이 무거워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오늘 '식당방'에 당첨된 사람들은 나 빼고 모두 남자. 현지 포터와 가이들도 있고, 대만 관광객 몇 명도 보인다. 여기에서 과연 제대로 잘 수 있을까.

'내일이면 4130m ABC 도착이니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데... ABC엔 방이 있을까. 또 이러면 어쩌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왔다.

자신들의 방 내어준 데우랄리 로지 자매들

오늘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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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시스터. 컴 히어 컴 히어."

울기 직전의 나를 로지에서 일하는 자매가 부른다. 그러더니 로지 한구석에 마련된 허름한 방으로 안내했다. 오늘 여기서 자신들과 같이 자면 된단다.

좀 전에 포터 아저씨가 알 수 없는 말로 로지 자매들과 얘기를 나눴는데, 아마 나를 같이 자게 해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었다. 트레커의 방을 잡는 것이 포터의 의무는 아니지만, 편히 쉴 곳을 마련해주지 못해 내내 마음에 걸려하다 생각해낸 방법이었을 것이다.

나는 연신 감사하다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온갖 박스들이 깔린 축축한 바닥, 솜이 뭉친 이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침대, 감자 상자와 석유통이 같이 놓인, 기름 냄새 가득한 방이었지만 큰 호의였다. 누구나 그렇듯, 모르는 여행자에게 방 한 켠을 내주는 게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데우랄리 로지 자매가 내어준 방.
 데우랄리 로지 자매가 내어준 방.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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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그 방에서 자기로 한 거예요? 잘 됐어요 잘 됐어요."

로지에서 만난 한 대만 여행자가 웃으며 다행이라고 위로했다. 그 역시 오늘 식당에서 자게 된 운명이었지만, 내가 불편할까 봐 신경쓰는 눈치였다. 왁자지껄하던 식당도 어느덧 조용해지고, 방에 불이 꺼졌다. 쌔근쌔근 숨소리만 오가는 작은 공간. 석유통 옆에 누운 나는 어느덧 침낭 안에서 곤히 잠들었다.

마차푸차레가 얼핏 보였다.
 마차푸차레가 얼핏 보였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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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정보>

-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 <매트릭스2> 말고 트레킹 얘기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상상 이상으로 힘들고, 무릎이 아프고, 잠자리가 불편하다. 하지만, 역시 상상 이상으로 그 풍경이 아름다워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도 "다시 오고 싶다"를 말하게 된다.

- 라면은 두세요 : 산에 가면 라면 하나씩은 들고가기 마련. 하지만 많은 로지에서 신라면(korean noodle soup)을 이미 팔고 있다. 한국에서 라면을 챙겨가도 주방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용료(cooking charge)를 지불해야 하는데, 이 비용이 작지 않다. 로지에서 파는 라면을 사먹는 게 속도 편하고 짐도 줄일 수 있는 방법.


태그:#네팔 트레킹, #네팔 여행, #ABC 트레킹, #한 번쯤은, 네팔,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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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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