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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그 심리적 거리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눈이 오는 날이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옛 노래가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거나, 직장 내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진 날에는 집까지 가는 길에 쉼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소주 한잔의 깃털 속으로 파고들게 마련이다.

스마트폰의 구속에서 두 번째로 탈출한 지 한 달 보름쯤 돼 간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 눈동냥이라도 할 요량으로 끊었던 신문을 다시 구독했다. 사설과 오피니언 외에는 대충 훑어보긴 하지만, 여전히 신문 속의 세상은 그저 퍽퍽하기만 하다. 빼앗긴 들에 오는 봄은 너무나 더디고 흐릿하다.

우연히 들른 맥줏집, '그녀'를 만나다

우연히 들어간 맥주집이 LP의 천국일 줄이야. 그 날 이후로 LP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서울 대학로의 한 PUB 우연히 들어간 맥주집이 LP의 천국일 줄이야. 그 날 이후로 LP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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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게 취미가 생겼다. 책 읽는 것 말고 이렇다 할 취미가 없던 내게, 원숙한 중년의 연인 같은 취미가 생긴 것이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퇴근 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녀는 나에게 평온함을 주는 동시에 지난 날의 향수를 선사한다. 직장과 집의 심리적 거리가 한걸음 이내로 줄어든 건 당연한 일이며, 건조했던 세상에 촉촉한 단비가 내린다.

그녀의 이름은 LP record(long play record). 흔히 레코드판(아래 LP)이라고 불리는 아날로그 시대의 대표적 유산이다. 갑자기 웬 골동품 이야기냐고? 최근에 대한민국을 휩쓸고 지나간 <응팔>(<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방송은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삽입됐던 노래들은 거리마다 넘치도록 흘러나와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 노래의 대부분을 나는 LP를 통해 처음 접했다.

LP에 대한 갈망의 시작은 한 달 전이었다. 대학로에서 술을 마시다 우연히 들어간 맥줏집이 LP로 꽉 찼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친절한 사장님은 신청곡을 LP로 직접 틀어주셨다. 마당 쓸고 돈 줍는 날이었다. 그날, 너바나(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s'의 비트에 맞추어 고개를 흔들어 대던 나의 영혼은 잊고 지냈던 그녀를 소환해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아니면 지성으로 주변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어 얻어낸 산물이던가. 직원들로부터 턴테이블을 생일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LP와의 재회가 이뤄졌다. 혹자는 음질이 어떠니, 진공관이 어쨌느니, 운운하며 수백만 원대의 장비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지닌 것도 아니고, 극도로 예민한 청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사실 악보도 볼 줄 모른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를 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저렴한 보급형 턴테이블이지만 입문용으로는 적당하며 나같은 초보에게는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 생일 선물로 받은 턴테이블 저렴한 보급형 턴테이블이지만 입문용으로는 적당하며 나같은 초보에게는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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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를 듣기 위한 시스템을 갖추는 데 든 비용은 총 30만 원. 20만 원짜리 턴테이블은 생일선물로 받았고, 앰프가 내장된 중고 스피커를 10만 원에 구입했다. 이런 싸구려 음향장비로 뭘 듣겠다는 거냐고 볼멘소리 하는 이도 분명 있을 법하다. 하지만, 턴테이블 위를 도는 LP를 바라보며, 바늘의 치직거리는 소리를 듣는 황홀감만으로도 남부러울 것이 없다.

LP의 음악을 듣는 것도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주지만, 주문한 LP를 기다리는 맛도 쏠쏠하다. 배송된 새 LP의 비닐 옆면을 칼로 조심스럽게 잘라낼 때의 기대감, 중고 LP의 포장을 풀며 보존 상태를 가늠해 볼 때의 긴장감, 그리고 LP에 손자국을 묻히지 않기 위해 도넛구멍에 중지 끝을 맞추고 조심스레 꺼낼 때의 신중함까지, 30년 전의 그 촉감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돼 온다.

불편해도 좋아, 기다려도 좋아

LP는 나의 유년 시절과 사춘기를 회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소품이다. 외갓집에는 사촌형과 누나들이 모은 레코드판이 많았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을 사촌들은 아르바이트 월급과 용돈을 박박 긁어 병적으로 레코드판을 사 들였다. 먹고 입을 것을 고민하던 시절에 몰래 가방에 숨겨 들여오던 레코드판은 외할머니에겐 눈엣가시였다. 보물 같은 레코드판들이 마당에서 화염에 휩싸일 뻔한 적도 여러 번이다.

주말만 되면 새로 사들인 레코드판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외갓집으로 달려갔다. 또래 아이들은 동요를 부르고 있을 때, 나는 레코드판을 통해 가요와 올드 팝을 접했다. 특히, 부모 세대들이나 들을법한 올드팝을 들으며 뭔가 우쭐한 기분도 느꼈던 것 같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boxer'나, 라이오넬 리치의 'Hello', 캔사스의 'Dust in the wind'등 그때 처음 들었던 노래들은 요즘 들어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요즘 말하는 '중2병'이나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사춘기도 나는 LP의 음악들과 함께 무탈하게 넘어갔다. 그 당시에는 카세트테이프라는 것이 있어서 LP나 라디오의 음악을 녹음해서 선물로 주곤 했다. 학원에서 수줍어하는 여학생에게 가녀린 글씨로 노래 제목이 적힌 테이프라도 선물 받는 날이면, 그날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도 창고 어딘가에는 그 시절 추억을 담은 카세트테이프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전성기를 회상하고 있을 것이다.

주문한 LP를 기다리는 설렘과 더불어 퇴근 후 LP 들을 생각에 요즘 너무 행복하다.
▲ 나의 달달한 취미인 LP 듣기 주문한 LP를 기다리는 설렘과 더불어 퇴근 후 LP 들을 생각에 요즘 너무 행복하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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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compact disc)의 출현으로 LP는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미끈하게 빠진 외모와 휴대가 간편하고 보관이 쉬운 장점 때문에  LP를 버리고 CD의 품에 안긴 것이 대학생 무렵일 게다. 듣기 싫은 노래는 바로 넘어가도 되고, 무한 반복이 가능하며 소형 플레이어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신세계에 푹 빠져 한동안 LP를 잊고 살았다.

푸근함과 넉넉함으로 내게 다시 돌아온 LP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들을 때마다 먼지를 닦아내야 하는 공들임의 시간도, 전곡을 순서대로 진득하게 들어야 하는 여유로움의 미학도, 간간히 바늘이 튀어 들리는 엇갈림의 실수도 모두 시대를 넘어선 아날로그의 진한 맛을 우려낸다. 그 맛은 더없이 깊고 아늑하다.

이번 설 연휴에는 중고 LP가 많다는 회현역 지하상가를 기웃거려볼 계획이다. 손가락 하나로 주문 완료돼 택배로 날아오는 그런 LP보다 타인의 손길이 묻은 중고 레코드판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전 주인이 간직했던 마음까지 고스란히 담아오고 싶다.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는 요즘, 작은 취미 하나로 삶을 좀 달달하게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오늘도 턴테이블위로 원형 초코렛 하나가 빙빙 돌며 달콤함으로 나를 유혹한다.


태그:#LP, #턴테이블, #회현역 지하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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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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