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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강연극 '빛 색즉시공'에서 주인공 김입자 역을 맡은 연극배우 김정민씨가 리허설을 하고 있다.
 과학 강연극 '빛 색즉시공'에서 주인공 김입자 역을 맡은 연극배우 김정민씨가 리허설을 하고 있다.
ⓒ 카오스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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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맨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네가 날 볼 수 있는 건 내가 화장했을 때뿐이야."

세계적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면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자연 현상을 복잡한 과학 공식 대신 이처럼 여배우의 독백으로 처리하지 않았을까? 

지난 14일 낮 서울 성북구 돈암동 한 연습실에선 천재 물리학자 앨버드 아인슈타인과 셰익스피어를 결합한 색다른 '실험'이 한창이었다. 밧줄, 소리굽쇠, 비눗방울 같은 실험실 도구들이 소품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아인슈타인, 리처드 파인만 같은 세계적인 과학자들도 깜짝 출연한다. 바로 오는 20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열리는 카오스 콘서트 '빛, 색즉시공(色즉時空)' 리허설 현장이다.

카오스 콘서트, 극적 재미와 지적 호기심 '두 토끼 잡기'

서울대 물리천문학과 82학번인 이기형 인터파크 회장이 지난 2014년 말 '과학의 공유'를 위해 설립한 공익 재단인 카오스재단은 지난 2012년부터 매년 과학 강연과 문화 공연을 접목한 '카오스 콘서트'를 열고 있다(관련기사: <인터스텔라>의 과학이 인터파크를 움직였다)

'빛'을 주제로 열리는 올해 콘서트는 과학자 강연에 앞서 과학 지식과 연기력을 동시에 갖춘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들이 출연하는 '강연극(렉처 드라마)'으로 문을 연다. 강연극은 '강연'과 '연극'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로, 대본은 과학 전공자인 김남식 카오스재단 사무국장이 썼지만 실제 연극배우들이 출연한다.

연출은 연극 <터미널> <목란언니> 등을 만든 전인철 연출가가 맡았고 지난해 <햇빛샤워> 광자 역으로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은 김정민(김입자 역)을 비롯해 고려대 법대 출신 배우 안병식(안파동 역),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러시아로 연기 유학까지 다녀온 권일(권이중 역) 등 연극계에서 나름 '지성파'로 꼽히는 배우들이 출연한다.

이날 리허설에 앞서 마치 물리학 교과서를 옮겨놓은 듯한 대본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빛의 본질이 파동인지, 입자인지를 놓고 지난 수백 년간 벌어진 과학계 논쟁을 40분 남짓한 무대에 녹인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과연 강연극이 과학 지식 전달과 극적 재미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막상 리허설이 시작되자 이런 우려는 조금씩 사라졌다. 강단에 선 과학자가 아닌, 연극무대에 오른 노련한 배우의 생생한 대사와 과장섞인 연기로 재구성된 과학 이론들은 마치 옛날이야기처럼 관객에게 전달됐다.

빛의 본질은 입자라고 주장하는 '김입자'와 파동이라고 주장하는 '안파동', 이들 사이를 중재하는 '권이중'의 모습은 마치 '썰전'(jTBC TV 토론 프로그램)을 보는 듯 했다. 한술 더 떠 안파동은 빛이 파동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긴 밧줄을 흔들고 북을 쳤고, 김입자는 이에 맞서 뉴턴, 아인슈타인, 리처드 파인만 같은 세계적 과학자도 모자라 아더 왕의 엑스칼리버까지 동원했다.

빛의 본질을 주제로 만든 강연극 '빛, 색즉시공' 리허설 장면, 왼쪽부터 '안파동' 역을 맡은 안병식, '권이중' 역을 맡은 권일, '김입자' 역을 맡은 김정민.
 빛의 본질을 주제로 만든 강연극 '빛, 색즉시공' 리허설 장면, 왼쪽부터 '안파동' 역을 맡은 안병식, '권이중' 역을 맡은 권일, '김입자' 역을 맡은 김정민.
ⓒ 카오스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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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티격태격하던 김입자와 안파동의 갈등이 극에 달할 때쯤 빛은 '입자(파티클)'인 동시에 '파동(웨이브)'처럼 행동한다는 '빛의 이중성(웨이비클)'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중고교 물리학 시간에 그렇게 학생들을 괴롭혔던 파동-입자설 논쟁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과학자 뺨치는 배우들,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를 꿈꾸다

강연극으로 빛의 실체를 살짝 들여다 본 관객들은 빛과 음악을 결합한 레이저 퍼포먼스로 잠시 숨을 고른 뒤 과학자들의 강연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3부에서는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와 윤성철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각각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우리는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는다'라는 주제로 빛의 역사를 좀 더 깊이 파고들고, 정하웅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와 정애리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가 각각 사회와 패널로 결합한 강연 토크로 마무할 예정이다.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가 오는 20일 열리는 카오스 콘서트에 앞서 '슈뢰딩거의 고양이' 주제로 강연 리허설을 하고 있다.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가 오는 20일 열리는 카오스 콘서트에 앞서 '슈뢰딩거의 고양이' 주제로 강연 리허설을 하고 있다.
ⓒ 카오스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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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대본은 처음 써봤다는 김남식 사무국장은 "인문학 강연은 콘텐츠만으로 관객을 울고 웃길 수 있지만 과학 콘서트는 실험 시연이나 영상을 시각적으로 전달해야 경이감과 호기심을 얻을 수 있다"라면서 "과학과 연극의 협업으로 '과학을 본다'는 색다른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말이 연극이지 '물리학 개론' 수준에 맞추다 보니 웬만한 과학 지식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출연진의 과장된 몸짓과 애드리브(즉흥연기)가 감초다.

전인철 연출가는 "지금보다 20배는 더 재밌게 만들 수도 있었다(웃음)"면서도 "놀이보다 학구적인 지식 전달이라는 강연극 취지에 맞춰 재밌는 요소는 최대한 제거하고 과학적 사실 전달에 더 충실했다"고 말했다.

빛의 본질을 주제로 만든 강연극 '빛, 색즉시공' 리허설 도중 실제 과학자들이 출연해 배우들과 연기를 하고 있다.
 빛의 본질을 주제로 만든 강연극 '빛, 색즉시공' 리허설 도중 실제 과학자들이 출연해 배우들과 연기를 하고 있다.
ⓒ 카오스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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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이날 리허설에서 '전자기력' 발음 때문에 수차례 지적받은 배우 김정민씨는 "일반 공연 대본은 이야기에 흐름이 있어 따라가기 좋은데 이번 작품은 정보의 홍수여서 소화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권일씨도 "과학 전공 스터디를 해서라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해야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지 무조건 대사만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라면서 "(대본에 나온 물리학 법칙을) 이해하는 과정이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안병식씨는 "연극은 전달하는 예술인데 과학 지식을 연극이란 매체로 전달하는 시도가 흥미로웠다"면서 "영국에는 관객에게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란 직업이 따로 있을 정도"라고 밝혔다.

강연극이 과학 콘서트뿐 아니라 일반 연극 무대에서도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을까? 김남식 사무국장은 "강연극은 평소 과학에 관심 있는 관객들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라면서 "기존 연극 관객들이 드라마를 보려고 온다면, 강연극은 과학 지식을 보려고 오기 때문에 관객층이 다르다"고 밝혔다.


태그:#카오스 콘서트, #과학콘서트, #강연극, #사이언스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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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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