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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 티아이씨로부터 압사라 전통춤을 배운 고아원 소녀들의 압사라 공연 모습
 엠 티아이씨로부터 압사라 전통춤을 배운 고아원 소녀들의 압사라 공연 모습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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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왕실 무용수 엠 티아이씨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축하공연무대에는 자신이 직접 가르친 고아원 제자들이 나와 전통공연을 펼쳐 많은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 왕실 무용수 엠 티아이씨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축하공연무대에는 자신이 직접 가르친 고아원 제자들이 나와 전통공연을 펼쳐 많은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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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이름은 엠 티아이(Em Theay). 캄보디아 왕실 발레단에서 크메르 전통무용과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불과 6살부터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도 왕실 무용단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노로돔 시하모니 현 국왕의 친할머니 꼬사막 왕비가 소녀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본 덕분이었다.

그녀는 정확한 실제 나이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 생일도 모른다. 아주 어릴 적 궁중 하인들 틈바구니 속으로 본 국왕의 화려한 즉위식 장면이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이 즉위식을 연 해가 지난 1941년이었으니, 그때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올해 그녀의 나이가 대략 80살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에서 보낸 어린 시절

당시 소녀의 아버지는 왕실 시종이었고, 어머니는 궁중 요리사였다. 소녀는 평생 단 한번도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었지만, 왕실 발레단에서 춤과 노래를 배우는 동안 글을 배우고 궁중의 예법도 익히고, 살아가는 지혜도 스스로 체득해 나갔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과 무용 실력은 왕실 발레단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녀를 가르친 스승들은 물론이고 왕실 가족들도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의 천부적 재능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재능 역시 커갈수록 원숙미를 더해 더욱 빛을 발했다. 그녀 역시 왕궁에서의 삶에 만족했다. 바깥 세상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려했던 왕궁에서의 삶도 1970년 공화주의자 론놀 장군의 쿠데타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국왕이 국외로 쫓겨나 그녀 역시 더 이상 왕궁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새로 들어선 공화정 정권은 예술인들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다. 공화국이 들어선 그 이듬해에는 미국으로 순회공연을 떠나기도 했다. 물론 공연단 이름 앞에 '왕실' 또는 '왕립'을 의미하는 로열(Royal)이란 단어가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왕궁을 벗어난 세상 밖 삶은 감히 꿈조차 꾸지 못한 그녀였지만, 실제로 경험한 바깥 세상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온갖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왕이나 지체 높은 귀족들 대신 일반 대중들 앞에 나서 공연을 펼치는 것도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대중들도 난생 처음 보는 그녀의 우아한 춤사위에 흠뻑 빠져 열광했다. 그 사이 그녀는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낳으며 가정을 꾸렸다. 공연이 없을 때는 예술학교 강단에 나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매진했다.

부족함이 없었던 왕궁에서의 삶과 달리 바깥 세상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고,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역시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며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장 닥쳐올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비도,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다.

처참했던 '킬링필드'

캄보디아 왕실 마지막 궁중무용수인 엠 티아이씨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선 사진전시회에 초대받아 무대에 올라가 있는 모습
 캄보디아 왕실 마지막 궁중무용수인 엠 티아이씨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선 사진전시회에 초대받아 무대에 올라가 있는 모습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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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시련은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1975년 그해 4월 17일 '크메르루즈'라 불리는 공산혁명 게릴라군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남편을 잃고 만 것이다.

결국 그녀는 청상과부가 되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수도에서 300km쯤 떨어진 바탐방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매일 밤낮으로 노역에 시달리며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 경력을 철저히 숨겼다. 당시 예술가들은 지식인만큼이나 크메르루즈 정권이 가장 경멸했던 대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킬링필드 시대를 겪으며 예술가 10명 중 9명 꼴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 역시 수많은 동료 예술가들이 신분이나 직업을 고백하는 순간, 칼로 찢겨 처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숱하게 봤다. 자신의 눈앞에서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목부터 배까지 난도질당한 채 붉은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동료 예술가들을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다행히 강제수용소 내에서는 아무도 그녀가 왕실 발레단 최고의 무용수 출신이란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 사이 그녀는 매일 밤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면, 장롱 속 베갯잇에 숨겨놓은 악보와 빛바랜 과거 사진들이 무사한지 마음 졸이며 확인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새벽부터 이어지는 힘든 강제노동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건 배급받은 멀건 쌀죽 한 그릇뿐이었다. 하루 끼니를 거르는 것쯤이야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정작 참기 힘든 시련은 따로 있었다. 자식들의 잇따른 죽음이었다.

배고픔에 지쳐, 약 한 봉지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자녀를 무려 13명이나 잃고 말았다. 그녀는 자식들을 땅에 묻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조차 없던 자신이 미웠다고 훗날 술회한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베트남군의 포격 소리가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1979년 1월초 크메르루즈 군인들이 해방군을 자처한 베트남군에 쫓겨 정글 속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녀는 이렇게라도 살아남은 것을 감히 '기적'이라 여겼다.

'몸'으로 복원한 크메르 전통 춤

어느 날 마을 대형 스피커를 통해 프놈펜에서 예술가들을 찾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살아남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십 리 먼 길, 발이 붓도록 걷다 가끔 지나가는 트럭 뒷자리에 몸을 실기를 반복했다. 보름여 만에 간신히 프놈펜에 도착했다.

전쟁통에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왕립예술대학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운좋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동료들과 극적인 해후를 했다. 다시 그곳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책걸상은 다 부서지고, 선풍기도 칠판도 없는 지저분한 강의실이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크메르 전통음악을 되살리는 데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었다.

죽지 못해 살아남았건만 다행히 그녀의 삶에도 다시 조금씩 서광이 비치는 듯싶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그녀가 그리도 소망했던 평범한 삶조차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 1991년 3월 어느 날 살던 집에 갑자기 불이 나고 만 것이다. 그동안 어렵게 모은 전 재산을 잃은 것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킬링필드 시절 목숨을 걸고 지켰던 악보와 전통춤에 대한 기록 등 소중한 자료들을 모두 잃고 말았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해, 그녀는 여러 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렵게 지켜낸 크메르 전통음악이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그런데 천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몸과 영혼이 그 춤과 노래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 사십,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지만 그녀의 예술을 향한 정열과 혼은 불꽃처럼 더욱 뜨겁게 훨훨 타오르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과거의 기억들을 되살려 크메르 전통음악과 춤을 되살리는 데 안간힘을 썼고, 동료들도 그녀를 도왔다. 하마터면 영원히 잿더미 속에 사라질 뻔했던 전통춤들이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춤과 노래가 어린 제자들에게도 전수되기 시작했다.

'압사라 춤'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크메르 전통무용과 음악의 복원은 마지막 남은 이 궁중 무용수의 몸동작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의 예술혼은 더욱 더 타올라, 나이 육십을 넘어서도 계속됐다. 독일 등 유럽 각지를 돌며 캄보디아 전통음악을 세상에 알리는 데 애썼다. 많은 관객들이 그녀의 삶과 춤에 매료됐고, 그녀의 삶을 소재한 다큐멘터리까지 탄생하기에 이른다.

1994년 제작된 이 다큐작품 제목은 <열 번째 무용수> 원제는 <The Tenth Dance>다. 킬링필드 시절, 궁중 무용수가 10명 중 1명 꼴로 간신히 살아남은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듯 마지막 살아남은 10번째 댄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녀의 삶을 소재로 한 이 다큐멘터리는 과거 캄보디아의 불행했던 역사와 전통문화예술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구권 국가에서는 그녀의 다큐 작품이 오랫동안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큐 작품을 감상한 많은 외국인들이 그녀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했고, 그동안 그녀의 삶과 음악에 대해 듣고자 학교로 그녀를 찾아온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독일인 유명 사진가 아르제이 스티븐스(Arjay Stevens)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다큐멘타리를 본 후 그녀의 삶과 인간미에 매료가 되어 20년째 그녀의 사진만을 무려 수천 장 넘게 찍어왔다.

지난 20년간 오직 마지막 왕실무용수 엠 티아이씨의 삶과 예술을 소재로 사진을 찍어온 독일인 사진작가 아르제이 스티븐스씨가 그가 찍은 사진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오직 마지막 왕실무용수 엠 티아이씨의 삶과 예술을 소재로 사진을 찍어온 독일인 사진작가 아르제이 스티븐스씨가 그가 찍은 사진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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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초 수도 프놈펜에 위치한 국립박물관에서는 그녀에게 헌사하는 사진 전시회를 겸한 기부행사가 개최됐으며, 지난 20일까지 한달여간 프놈펜 소재 보파나 시청각센터에서는 특별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 기간 전시된 작품들은 지난 20여년 동안 스티븐스가 프놈펜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동안 틈틈이 찍어온 사진들 중 특별히 엄선한 작품들이다. 그가 사진 전시회를 연 이유가 궁금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캄보디아 전통무용의 복원을 위해 그동안 쏟은 열정은 감히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 그동안의 삶을 쭉 지켜보니 너무나도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살아왔다. 나이가 많은 그녀에게는 삶의 선택 여지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래서 20년간 찍어온 그녀의 사진들을 모아 화보집을 만들고 판매수익으로 기부금을 걷고자 한 것이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혜택을 받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립박물관 내 사진 전시회에는 약 40여 점에 이르는 그녀의 평소 삶과 춤동작을 찍은 사진작품 외에 스티븐스가 따로 제작한 115페이지 화보집도 놓여 있었다. 화보집 제목은 <A Century Artist>이다. 영어와 크메르어뿐만이 아니라 독일어와 프랑스어로도 번역되어 만들어졌다.

매일 고아원으로 출퇴근하는 팔순의 그녀

마지막 왕실무용수 엠 티아이씨의 삶을 소재로 지난 20일까지 한달여간 수도 프놈펜 소재 보파나 시청각센터에서 열린 특별사진전시회 모습.
 마지막 왕실무용수 엠 티아이씨의 삶을 소재로 지난 20일까지 한달여간 수도 프놈펜 소재 보파나 시청각센터에서 열린 특별사진전시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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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사진작가 스티븐스씨가 기획한 특별사진전시회에는 마지막 왕실무용수 엠 타이이씨의 삶을 소재로 한 관련 책자와 영상물외에 언론 인터뷰 내용 등을 담은 자료집들도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독일인 사진작가 스티븐스씨가 기획한 특별사진전시회에는 마지막 왕실무용수 엠 타이이씨의 삶을 소재로 한 관련 책자와 영상물외에 언론 인터뷰 내용 등을 담은 자료집들도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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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시회에는 헌정 사진전을 위해 캄보디아 문화부 차관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차관은 축사를 통해 "그녀의 삶은 예술 그 자체"라고 말했다.

잠시 한가한 틈을 이용해 그녀와 인터뷰를 시도했다. 하지만 나이 탓인지 기자의 귀 탓인지 발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와줘서 고맙다" "크메르 전통예술을 사랑하는 분들이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5분 남짓한 짧은 인터뷰 중 알아들은 건 이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표정만 본다면 감히 그녀의 과거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엠 티아이는 왕립예술대학교 강단에서 내려온 후 현재 수도 프놈펜에서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작은 마을 고아원 원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음악교수로 함께 일했던 그의 동료이자 자신의 제자인 속팔 교수가 그녀의 일을 돕고 있다.

정부에서 나오는 연금 20만 리엘, 우리 돈으로 대략 5만~6만 원 정도가 생활비의 전부로 빈궁한 노후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의 전통예술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과 열정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 그녀는 속팔이 태워다주는 오토바이로 매주 일요일마다 고아원으로 출퇴근을 한다.

오늘도 이곳 아이들은 그녀의 춤사위 동작을 열심히 따라하며 압사라 춤을 배우고 있었다.


태그:#캄보디아, #ARJAY STEVENS, #EM THEAY, #마지막 압사라 댄서, #THE 10TH DA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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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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