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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기자 말

1980년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부정축재자로 몰려 축출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도평요'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부정축재자로 몰려 축출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도평요'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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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이하 등장인물 존칭 생략)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10월 유신헌법 공포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면서 당시 '박정희의 2인자'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락은 10·26이 계기가 된 12·12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김종필 등 유신세력들과 함께 구금된 후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관련기사 : 이후락 조카에 총부리 댄 신군부 "반항하면 댕긴다")

군 선배이기도 한 이후락 등 유신세력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정통성을 만든 전두환은 7년간의 대통령 권력을 맛봤다. 하지만 전두환은 1988년 2월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만들었고, 이 기구에 이후락이 함께 동참할 것을 요청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락을 10여년 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는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언론에 처음 공개되는 이 내용으로 미뤄 "전두환이 유신세력과 손을 잡고 영구집권을 꿈꿨던 것 아닌가"하는 추론을 불러온다.

특히 자신의 권력을 위해 부정축재자로 규정한 유신세력과 후일을 도모하고자 한 것은 스스로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일 전두환과 유신세력이 손을 맞잡고 노태우의 뒤에서 권력을 행사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을 불러오게 한다.

전두환과 이후락의 독대 "전두환이 국가원로자문회의 동참 요청" 

12·12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유신헌법에 따른 체육관 선거(지역에서 선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권불십년. 임기 7년 단임 간선제 대통령 선출의 헌법개정안 공포로 전두환은 1988년 2월 임기를 마치게 됐다.

전두환은 임기를 1년 남겨둔 1987년 4월 13일,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며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지자 결국 전두환은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며 항복하고 만다.

하지만 전두환은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새 헌법에 '직전 대통령이 의장이 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설치하는' 근거조항을 포함시켰다. 당시 각계에서 '전두환이 상왕노릇을 하려 한다'며 반발했지만 전두환은 이를 관철시켰다.

주목되는 점은 전두환이 새 헌법이 공포되기도 전에 이미 유신세력인 이후락에게 국가원로자문회의에 동참하자고 제안했다는 점이다. 당시 전두환은 56세, 이후락은 63세였다. 전두환이 영구집권을 꿈꾸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다음은 이동휘의 증언이다.

조계종 전국 불교신도회장으로 있던 이후락(오른쪽)이 신도회 조직부장 조카 이동휘(가운데)와 함께 신도와 인사하고 있다.
 조계종 전국 불교신도회장으로 있던 이후락(오른쪽)이 신도회 조직부장 조카 이동휘(가운데)와 함께 신도와 인사하고 있다.
ⓒ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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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초여름, 박영수 청와대 비서실장(임기 1985년 10월~ 1987년 7월)이 이후락이 도자기를 만들던 경기도 광주 '도평요'로 찾아왔다. 이후락과 박영수 실장은 이곳에서 장시간 바둑을 뒀다.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빅영수 실장을 신당동 자택까지 모셔다 드렸다. 그때 박 실장은 '며칠 후 연락할 테니 이후락과 함께 와라'고 했다. 몇 일 뒤 박 실장으로부터 '비원 앞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후락과 함께 비원 앞에 당도하자 청와대에서 온 듯한 승용차가 이후락을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이후락은 이날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전두환과 독대를 했는데, 이후락은 내게 "전두환이 원로회의를 함께 구성하자고 하더라'고 했다. 당시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사무실을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이 있는 곳으로 하자고 했다. 1972년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나고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락에게는 의미가 있는 장소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후 박영수 비서실장은 바둑을 명분으로 여러차례 내게 전화를 해왔고, 나와 함께 도평요로 가서 이후락과 만났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두환의 이런 꿈은 실현되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1988년 2월 권좌에서 물러난 전두환은 스스로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이 됐지만 곧바로 동생 전경환의 비리로 국민적 분노가 폭발하자 1988년 4월 13일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직에서 사퇴하기에 이른 것. 이어 전두환은 그해 11월 백담사로 들어가 2년간 칩거한 후 1989년 5공청문회로 된서리를 맞게 된다.

전두환은 지난 1997년 무기징역 확정과 함께 2205억 원의 추징금을 부과 받았지만 2003년 "수중의 돈은 29만 원이 전부"라고 밝혔다. 전두환 일가는 아직도 1105억 원이 넘는 추징금이 미납된 상태다.

전두환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1980년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헌납한 박정희 측근들의 재산 환수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실제로 김진만 전 국회부의장(2006년 5월 사망)의 경우 서울 양재동 땅 등 헌납 재산을 찾기 위해 1989년부터 본격적인 소송에 나섰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신청과 전보배상 신청을 한 김 전 부의장은 2004년 1월 16억원 배상판결을 시작으로 2005년 9월 98억원, 숨진 해인 2006년 9월 42억여원 등 모두 15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잇달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이동휘는 "가신들이 이후락에게 학교(울산지역 5개 학교)만이라도 되찾아 교육에 전념해야 하지 않겠나"고 건의했지만 이후락은 "그러면 내가 모시던 분(박정희)에 누가된다"며 반대 입장을 보였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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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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