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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기자 말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28-3에 있는 이후락 생가. 조카 이동휘씨는 이곳에 거주한다. 그는 "이후락 생가를 복원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자 과제"라고 했다. 그는 김대중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28-3에 있는 이후락 생가. 조카 이동휘씨는 이곳에 거주한다. 그는 "이후락 생가를 복원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자 과제"라고 했다. 그는 김대중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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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10여년 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이하 등장인물 존칭 생략)는 김대중에게 사죄하기 위해 지난 1995년 그가 총재로 있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지난 1973년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과 연관이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34년이 지난 2007년 10월 24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진실위)가 3년간의 활동으로 종합보고서를 펴내면서 "1973년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시에 의해 ○국 공작단이 주일파견관들을 동원해 실행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힌 바 있다.

사죄하기 위해 대선 때 '김대중 당선' 위해 뛰기도

특히 국정원 진실위는 "사전지시 주장에 대한 정황증거 자료를 종합, 분석해볼 때 박 대통령의 직접 지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적시했다.(2007년10월 25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이후락은 2009년 85세로 별세하기까지 이에 대한 자세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한 조카 이동휘는 이후락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 이동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단지 그는 "큰아버지(이후락)는 '김대중 납치사건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늘상 말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후일 후손들이 판단할 문제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조카 이동휘는 1995년 김대중 총재가 만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면서 지역사회를 놀라게 했다. 이동휘는 "당시 국민회의에 입당해 활동하자 '이후락 조카인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회상했다.

김대중은 1995년 7월 17일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했다. 뒤이어 당시 제 1야당인 민주당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의 탈당을 이끌어 새정치국민회의를 그해 9월 11일 창당했다.

당시 울산지역 일간지 <경상일보>와 <울산매일> 대표이사를 그만 둔 이동휘는 친구 정천석(전 울산 동구청장)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울산지구당 부지부장으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의 당선을 위해 뛰었고, 2002년 대선에서는 다시 노무현 당선을 위해 뛰었다.

이동휘는 "사람들은 내가 신한국당(새누리당 전신)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것은 김대중에게 사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모셨던 분(이후락)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국가를 위한 애국심의 발로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판단은 국민들의 몫이다"면서 "나는 내 소신대로 김대중에 사죄하고 돕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다음해인 2003년 새천년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 후신)을 탈당한 정치인 등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 울산에서도 많은 당원들이 탈당했다. 하지만 이동휘는 탈당하지 않고 그대로 민주당에 남았다. 그는 "사죄에 대한 연장선이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동휘와 함께 김대중 당선을 위해 활동한 김의곤 당시 새천년민주당 울주군지부장은 "이동휘는 1997년과 2002년 울산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을 당선시키기 위해 큰 활약을 했다"며 "지역 일간지 대표이사를 지낸 그의 경력은 울산의 득표율 향상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정계를 떠나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도평요'에서 굽으낸 도자기. 여러 점의 도자기를 갖고 있는 조카 이동휘씨가 도자기에 쓰여진 이후락이라는 한자를 가리키고 있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정계를 떠나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도평요'에서 굽으낸 도자기. 여러 점의 도자기를 갖고 있는 조카 이동휘씨가 도자기에 쓰여진 이후락이라는 한자를 가리키고 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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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일민주당에 참여했던 동교동계 인사들이 탈당해 평화민주당(평민당)을 만들었다. 비록 대선에서 노태우에게 패했지만, 평민당은 다음해인 1988년 치른 13대 총선에서 지역구 54석과 전국구 16석을 합친 70석을 차지하며 제1야당이 됐다.

김대중 납치사건 청문회 추진됐지만 결국 불발

당시 광주항쟁 청문회 정국이 시작됐고, 평민당 초선의원들을 주축으로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청문회를 추진하면서 이후락의 출석을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이후락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도평요'에서 도자기를 굽으며 지내고 있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해 이동휘가 밝히 비화다.

"당시 큰아버지(이후락)가 '동향인 최영근 평민당 부총재를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연락이 닿은 최 부총재와 함께 큰아버지가 계신 도평요에 갔다. 두 분은 30분간 독대를 하셨다. 독대를 마치고 나온 최 부총재는 내게 '큰아버지가 몸도 안좋으시니 을지로 6가에 있는 국립의료원으로 모시고 가라'고 하셨다." 이후 청문회는 열리지 않았다.

이후락이 박정희 정권에 몸담은 반면 최영근은 울산지역구로 5,6대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이 평민당 총재가 되자 최영근은 부총재로 활동하며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울산 정가에서는 지금도 '최영근은 김대중 2인자였다'고 평하고 있다.

이후락과 최영근은 1988년 도평요에서 30분간 가진 독대에서 과연 무슨 말을 주고 받은 것일까. 이동휘는 이를 알고 있는 듯 했지만 결국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태그:#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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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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