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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씨, 천장이 나왔잖아요. 천장이. 어떻게 하면 일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민아(가명)는 인터넷 강의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카메라를 놓쳤다. 어느 순간부터 졸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날 촬영 분 중 10분 가까이는 강사의 목소리와 함께 천장만 담겼다. 담당 직원에게 한소리 듣느라 학원에서 늦게 나왔다. 0시 14분 왕십리행 분당선 막차를 놓쳤다.

민아는 선릉역에서 2호선을 타고 돌아오느라 평소보다 30분 늦게 자취방에 도착했다. 오전 1시. 씻고 나온 민아는 책상에 앉는다. 4학년인데도 과제가 산더미다. 과제를 위해 영화를 돌려 보다 보니 어느새 시침과 분침이 만들어낸 각도는 90도. 3시가 됐다. 내일 오후에 있을 졸업영화 회의를 위해선 시나리오 작업을 끝내야 했다. 민아는 노트북을 끄고 원고지와 연필을 꺼낸다.

새소리가 들렸다. 오전 6시. 결국 동이 터버렸다. 그래도 시나리오는 마무리했다. 9시 수업을 가기 전에 2시간이라도 자려면 지금 침대에 누워야 한다. 민아는 침대에 몸을 던진다. 잠시 후 8시에 알람이 울린다. 이 시간에 일어나 씻고 옷 입고 나가면, 학교에 딱 9시에 도착할 수 있다. 화장은 사치고 아침도 사치다. 화장실로 가 샤워를 한다.

'퀄리티' 요구하면서 제작비 지원은 '0원'

졸업영화 제작비를 위해 저녁 아르바이트는 기본이다. 졸업영화 촬영과 각종 과제와 시험이 겹치면 5일 밤을 지새는 경우도 생긴다. 이럴 때마다 에너지 음료로 버티다 응급실 신세를 지는 학생도 있다.
 졸업영화 제작비를 위해 저녁 아르바이트는 기본이다. 졸업영화 촬영과 각종 과제와 시험이 겹치면 5일 밤을 지새는 경우도 생긴다. 이럴 때마다 에너지 음료로 버티다 응급실 신세를 지는 학생도 있다.
ⓒ By TFurban,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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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수업이 시작됐다. 강의실은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준다. 쌀쌀해진 요즘 강의실만 들어오면 졸음이 몰려온다. 민아는 졸지만 졸지 않는 듯 수업을 듣는다. 자다 걸리면 무슨 소릴 들을지 두렵다.

"졸업영화 만드는 게 뭐 대수라고 수업 시간에 자는 거야?"

지난 번 수업시간에 민아가 졸자 교수 입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왔다.

'대수냐고? 대수다.'

민아는 저 말을 들은 날 이후로 속으로 이 말을 수없이 읊조렸다. 하루에 2시간 밖에 못자고, 수면 부족으로 매일 저녁 아르바이트에서 실수하고, 수업시간에 졸 수밖에 없는 건, 다 '졸업영화'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졸업영화 제작비 때문이다.

민아가 이번 졸업영화 제작에 쓴 돈은 총 400만 원. 여기서 민아의 사비로 털어 넣은 돈은 400만 원. 학교가 금전적으로 지원해주는 건 없다. 보통 두 달의 졸업영화 제작 기간에 필요한 인원은 감독과 연출부, 촬영부, 조명부, 제작부 등 최소 10명이다. 졸업 영화를 찍어야 하는 감독은 이들의 식비, 교통비를 모두 책임져야 한다. 심지어 집에서 잠까지 재워줘야 할 때도 있다.

촬영 장비는 좀 많은가. 기자재를 옮기기 위해 콜밴을 부른다. 학교 안에서만 이동할 경우 3만 원, 학교 밖으로 나가면 기본 4만~5만 원, 장거리가 될 경우 10만 원까지. 보통 장거리가 된다. 학교에서 촬영하면 교수가 한 소리 한다. "영화 쉽게 찍었네?" 장소 대관비도 따로 들어간다. 여기에 미술소품비, 배우 출연비, 엑스트라 출연비 등 들어가는 비용이 한둘이 아니다.

이런 비용을 모두 감안해도 민아는 400만 원까지 쓸 생각이 없었다. 200만 원에서 250만 원 선에서 어떻게든 해보려 했다. 학교에서 카메라와 각종 촬영 장비를 빌려주니까. 문제는 학교에서 구비하고 있는 카메라 중 쓸 만한 것이 2대뿐이라는 거다. 남은 카메라 5대 중에 하나로 해보려 했지만 교수들이 싫은 소리를 할 게 분명하다. 상업 영화용 카메라로 '퀄리티' 있게 찍으란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졸업 영화를 찍어야 하는 4학년들이 좋은 카메라 2대로 몰린다. 적게는 8명, 많으면 10명이 된다. 카메라를 빌리지 못하는 학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불행히 민아는 그 중 하나가 됐다. 결국 학교 밖에서 촬영용 카메라와 렌즈를 빌렸다. 100만 원이 더 나갔다.

"영화판으로 안 간다고? 그럼 카메라도 쓰지 마"

영화학과 학생들이 졸업영화 제작에 사용하고 싶어하는 카메라, 레드원. 그러나 학교에 레드 시리즈는 2대 뿐이다. 카메라 경쟁에서 밀리면 외부에서 빌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영화학과 학생들이 졸업영화 제작에 사용하고 싶어하는 카메라, 레드원. 그러나 학교에 레드 시리즈는 2대 뿐이다. 카메라 경쟁에서 밀리면 외부에서 빌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 By Dave Dugdale,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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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했다. 민아는 4학년 중에서도 10학번으로 그리 낮은 학번도 아니었다. 4학년 중에 본인보다 높은 학번은 08학번 한 명, 09학번 두 명뿐이었다. 학년과 학번을 따져 우선순위를 준다면, 민아가 촬영하는 기간에 상업 영화용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었다. 민아는 납득이 안 됐다. 기자재 담당 조교에게 따져 물었다. 조교의 답.

"너 학과 참여도 낮잖아."

영화학과에는 '콜'이라는 게 있다. 교수나 선배가 소집하면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학과 행사다. 콜 참여 횟수가 높을수록 학과 참여도가 높다고 여긴다. 민아는 다시 따져 물었다. "저 콜에 빠진 적 없습니다." 조교의 답. "너 영화판으로 안 간다며." 민아는 '영화 충성도'가 낮아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거다.

그렇다. 민아는 영화학과지만 영화판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다. 민아만 그런 게 아니다. 동기의 절반이 민아와 같은 생각이다. 그렇다고 민아가 전공과 완전 상관없는 진로를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방송국 PD가 하고 싶다. 대단한 예술 영화보다는 사람 냄새 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 기획, 촬영, 편집 등 전공에서 배운 지식들도 나름 도움이 된다고 민아는 생각한다. 그런데 교수들의 생각은 다르다. 영화가 아닌 다른 진로를 선택하려는 학생들이 모여 있으면 한 교수는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어이, 영화 부진아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담당 교수와의 면담에서 뮤직 비디오 감독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가 "어디서 그런 급 떨어지는 걸 하려고 하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그 뒤로 '영화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이 학교에서 금기어였다.

하지만 이미 교수들에게 민아는 영화 부진아로 분류돼 있었다. 그럼에도 1, 2학년 때는 3, 4학년이 찍는 영화의 스태프로 무조건 참여해야 했고, 3, 4학년이 되자 영화를 찍지 않으면 졸업 시켜주지 않겠다는 담당 교수의 엄포에 꿈쩍할 수 없었다.

결국 민아는 남들이 꿈을 향해 달리는 4학년 1년 동안 원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원하지 않는 아르바이트와 원하지 않는 두 시간 수면 생활을 해왔지만 방송국 PD를 위해선 해놓은 게 하나 없다. 남은 건 30분 남짓의 단편 졸업영화와 상처뿐인 영화학과 졸업장이다.

민아는 묻고 싶다.

"영화학과면 모두가 봉준호가 돼야 하나요?"

덧붙이는 글 | 2015 청춘!기자상 응모글



태그:#영화과, #졸업영화, #졸업영화 제작비, #영화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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