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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발랑스의 숙소
▲ 발랑스의 숙소 개신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발랑스의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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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에서 회의를 마치고 늦은 시간 발랑스로 이동했다.

숙소는 발랑스 외곽에 있는 개신교관련 센터였는데 화장실과 욕실은 실외에 있었고, 그것마저도 한 층에 묵고 있는 이들이 함께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층에 방만 6개였으므로 최소한 10명 이상이 화장실과 욕실 하나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오래된 축사를 개조해서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가히 건물 곳곳에 배어있는 시골스러운 냄새는 촌놈이 내게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와이파이도 되질 않아 어젯밤(11월 13일)부터 세상과 단절된 상황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발랑스에서 아르데쉬에 있는 종교개혁박물관으로 이동할 때에야 11월 13일 파리테러 소식을 접했다. 남은 일정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까지 와서 파리에 가보지도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프랑스 현지에서 듣게 된 파리테러 소식

발랑스와 보규에 중간지점에 위치한 프랑스 개혁교회박물관
▲ 프랑스 개혁교회박물관 발랑스와 보규에 중간지점에 위치한 프랑스 개혁교회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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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쩌랴?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맞닥뜨리는 현실은 계획과 다른 경험을 늘 하고 살지 않는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일들은 더 많아지고, 그래서 청년의 때처럼 많은 계획을 하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나이가 중년의 나이가 아닌가? 이것이 보수화되는 원인일지도 모르겠으나, 이국 땅에서 일어나 테러에 대해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하늘에 맡기고 일정을 따라 갈 뿐이었다.

그날 일정은 '프랑스 종교개혁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발랑스와 보규에 중간지점에 있는 보쉐(Le Bouschet de Pranles)에 있으며 밤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산길을 돌고돌아 도착한 곳은 그야말로 산골마을이었지만, 500년 이상된 웅장한 건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곳은 태양왕 루이14세의 (위그노에 대한) 종교탄압을 피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었다. 물론, 건물은 일반 농가처럼 사용되었으니 개신교들의 비밀아지트인 셈이었다.

박물관 건물은 루이 14세(1638-1715)의 종교박해를 피해  지어졌던 민가를 사용하고 있다. 이 민가는 Marie durand(1700-1732)-낭트 칙령의 폐지 후 종교적 불관용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상징-과 그의 동생이 설교를 하였던 곳이다.
▲ 종교개혁 박물관 박물관 건물은 루이 14세(1638-1715)의 종교박해를 피해 지어졌던 민가를 사용하고 있다. 이 민가는 Marie durand(1700-1732)-낭트 칙령의 폐지 후 종교적 불관용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상징-과 그의 동생이 설교를 하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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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의 종교전쟁에 대해서 논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프랑스 종교전쟁은 1562~1598년, 8번에 거쳐 36년간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며 진행되었다. 그런 와중에 1572년 바돌로메 대학살 이후, 프랑스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범위가 없을 정도로 위그노에 대한 학살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바돌로메 대학살 이후 일주일 어간에 7만 명이 학살을 당했을 정도로 큰 박해였다.

이후에도 '태양왕',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로 잘 알려진 절대군주 루이14세(1638~1715)는 프랑스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 통일하는 것이 절대왕정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신교인들을 학살하고 박해함으로 강제로 로마 가톨릭교인으로 개종시키려 하였다.

입구 오른쪽 벽에는 화덕이 설치되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외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 종교개혁박물관 입구 오른쪽 벽에는 화덕이 설치되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외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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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교적인 박해를 피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려했던 이들이었기에 지금도 프랑스 개혁교회는 저항정신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국가적인 학살과 탄압으로 인해 현재 개신교인들은 2%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개혁교회는 학살당한 현장과 그들의 저항의 역사를 방대하리만큼 보존하고 있으며 기록하고 있다. 2%밖에 안 되는 개신교회가 프랑스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 공헌하고 봉사하는 것들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만일, 우리 한국도 미국식 근본주의 기독교가 아니라 프랑스 개혁교회의 전통을 가진 기독교가 전래되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교회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쉽기도 했다.

호젓한 시골마을에서 자행된 종교적인 학살

종교개혁박물관 벽에 걸린 안내석에 Pieree Duran 목사에 대한 설명과 박물관에 대한 안내가 적혀있다.
▲ 종교개혁박물관 종교개혁박물관 벽에 걸린 안내석에 Pieree Duran 목사에 대한 설명과 박물관에 대한 안내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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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박물관임을 알리는 벽면에 등장하는 이름은 Pieree Durand과 Marie Durand이다. 말하자면, 이곳은 듀란(Durand)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개신교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목사이자 설교자였던 피에르 듀란(1700~1732)은 물론이고, 그곳을 끝까지 지켰던 마리에 듀란(1711~1776)도 오랜 감옥생활을 하다 순교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벽면에 붙은 석판 가장 아랫부분에는 '저항 resistez'이라는 단어가 선명하다. 그들의 저항의 역사, 그것은 프랑스혁명(1789~1794)으로 이어졌을 것이며,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을 것이다.

11월 13일, 파리테러 이후에도 그들은 테러리스트들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똑같은 방식이 아니라, 테라스에 나와 대화를 나누고 차를 마시는 일상을 보냄으로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젓한 산골마을이었으나 프랑스 구석구석 종교탄압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 종교개혁박물관 호젓한 산골마을이었으나 프랑스 구석구석 종교탄압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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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밤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600년 이상된 밤나무들이 고목처럼 많았고, 들판에 떨어진 밤을 몇알 주워 까먹어보니 살짝 마른 것이 제법 맛났다.

손님대접용으로 나온 밤잼은 우리나라의 양갱보다 훨씬 달아서 마치 초콜릿을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아스팔트 도로가 나 있지만, 과거에는 산길을 돌고돌아야만 올 수 있는 호젓한 시골마을, 그곳까지 용병을 보내어 종교적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사랑하는 조이 1696년 잠들다.
▲ 종교개혁박물관 사랑하는 조이 1696년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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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본질은 어쩌면 그리 다르지 않다. 사랑, 자비, 영생 등 인간의 인식 영역을 넘어선 영역, 죽음의 영역을 다루고 있음에도 세계사는 종교전쟁으로 인해 큰 홍역을 치뤘으며, 지금도 종교간의 갈등으로 분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잘못된 생각 혹은 권력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이 종교와 결부되면 얼만큼 타락할 수 있으며, 얼만큼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잘못된 신념이 종교화되면 광신도를 만들어 내고, 광신도는 믿음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온갖 악한 일(자기가 믿는 신이 원하지 않는)을 신의 이름으로 자행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박물관이 있는 마을, 발랑스와 보규에 사이 아르데쉬 남부에 있는 프란슬레(Pransles)에 속해있다.
▲ 종교개혁박물관 종교개혁박물관이 있는 마을, 발랑스와 보규에 사이 아르데쉬 남부에 있는 프란슬레(Pransles)에 속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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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여느 시골마을과 다르지 않은 풍광이다.
▲ 종교개혁박물관 우리네 여느 시골마을과 다르지 않은 풍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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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한낮의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벽면엔 아주 오래된 간이나무의자와 건초더미를 썰었거나 혹은 고기를 손질했음직한 나무도마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얼핏 보아도 사용된 지 오래되었고, 나무 의자는 앉을 수 없을만큼 낡았다.

이곳의 청년들도 도회지로 나가겠지. 시골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곳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옛날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온 이들은 머지않아 그곳으로 들이닥친 용병에 의해 학살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들만 끌려간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마을은 거의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종교개혁박물관에는 당시 그곳에서 사용했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위의 좌로부터 솜틀기계, 등잔 아래 좌로부터 함, 포도주통 등이 있다.
▲ 종교개혁박물관 종교개혁박물관에는 당시 그곳에서 사용했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위의 좌로부터 솜틀기계, 등잔 아래 좌로부터 함, 포도주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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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박물관에 남아있는 유물들로 인해 그들의 삶을 더듬어볼 수 있었다. 종교적인 자유를 찾아 이곳에 정착한 이들은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아갔다. 하나의 구심점을 삼되 일반 가정집과 다를바 없이 건물을 짓고, 건물 곳곳마다 유사시에 숨을 수 있는 공간과 비밀통로 등을 만들어 두었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린 경험때문인지 프랑스 개신교인들은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만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한국의 개신교 상황을 이야기하자,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마디로 "그게 말이 돼?"였다.

비록 2%에 불과한 개신교지만 이곳뿐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 저항의 역사를 간직한 박물관을 가지고 있다. 어찌보면 이들은 국가의 종교정책에 따른 희생양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소수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소수라고 해서 국가로부터 차별을 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국가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존감으로 삼는다. '저항정신', 그것이 프랑스개혁교회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왜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지금까지 여전히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저항했던 이들의 저항정신을 욕되게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태그:#종교개혁박물관, #발랑스, #보규에, #보쉐,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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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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