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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기게 했던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당시 사망자의 검시사건부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유가족과 관련 단체는 당시 검사와 경찰관들의 양심선언을 촉구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정부는 사망자가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관련 단체는 3명이 사망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 가운데 고 유치준(1928년생, 당시 51세)씨는 뒤늦게 신원이 확인되었다.

부마민주항쟁 관련 단체들은 고 유치준씨의 검시사건부가 조작되었다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사진은 유족들이 2011년 9월 기자회견을 열어 고인이 부마민주항쟁 때 사망했고, '사망자 최초 확인' 사실을 공개했을 때 모습.
 부마민주항쟁 관련 단체들은 고 유치준씨의 검시사건부가 조작되었다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사진은 유족들이 2011년 9월 기자회견을 열어 고인이 부마민주항쟁 때 사망했고, '사망자 최초 확인' 사실을 공개했을 때 모습.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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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관련 단체와 유치준씨 유족들은 2011년 9월 '사망자 최초 확인 사실'을 공개했고, 유족들은 지난해 11월 정부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위원회'(아래 부마항쟁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접수했으며, 부마항쟁진상규명위는 유치준씨를 부마항쟁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최근 고인에 대한 사건기록이 나왔다. 1979년 당시 창원지방검찰청에 있었던 기록인 '검시사건부(분류번호 61191)'가 1996년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되었고, 이번에 그 자료가 나온 것이다.

이 검시사건부에 보면 "1979년 10월 19일 마산시(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2동 새한자동차 앞 노상에서 본적, 주거, 성명 일체 불상의 45세 가량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되었고, 사인은 내출혈사(지주막하출혈). 발견 다음 날인 20일 유족에게 시신을 인도했고, 타살 혐의 없음"이라 적혀 있다.

25일 (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마민주항쟁특별법제정을위한경남연대, (사)부마민줄항쟁경남동지회는 이 검시사건부가 조작되었다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이들은 고인의 부인·아들 등 유족과 함께 24일 경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아들 유성국씨 등 유족들은 "당시의 검시사건부가 허위, 날조됐다"며 "검찰과 경찰 스스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경남연대는 "부마항쟁10주년자료집에 실린 경찰의 마산 경남대 소요사건 1차 보고서에는 '변사자 발생, 대림여관 앞 도로변(새한자동차 영업소 앞)에서 50여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밝혔다.

경남연대는 "이 같은 자료와 유가족 증언 등을 종합해 보면, 공개된 검시사건부는 고 유치준씨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 이들은 "검시사건부에 기록된 '시신 다음 날 가족 인계'라고 되어 있지만, 유족들은 시신이 열흘 이상 지나 10․26사태 이후인 11월초에 인도됐다"고 밝혔다.

부마민주항쟁 관련 단체는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것을 은폐하고자 검시사건부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커다"며 "진상조사가 필요하고, 당시 검사와 경찰관들이 양심에 따라 진술해 주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당시 사건 주임검사는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체제에 저항한 항쟁을 말하며,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은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20일 정오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인을 출동시켰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었고,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긴 계기가 됐다.


태그:#부마민주항쟁, #유치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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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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