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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1927~2015) 전 대통령이 11월 22일 새벽 0시 21분 서거했다. 정치인으로서 김영삼을 지지했든 지지하지 않았든, 그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큰 별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특히 한국의 정치사는 김영삼을 빼놓고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고, 현재 가장 많은 국회 의석수를 가진 새누리당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김영삼이 없었다면, 지금 새누리당의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새누리당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 여러 번의 당명 변경 · 합당과 분당 · 흡수나 통합 등이 있었고, 이런 역사를 정리해 보면 대한민국 정당사의 흐름을 대부분 알 수 있다. 또한 이를 살펴보면 김영삼의 진면목도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민주공화당 [박정희] - 1963~1980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이후, 제2공화국과 5.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한국 정치는 대혼란의 시기를 지나게 된다. 그리고 1963년 2월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 세력이 구 자유당과 대한국민당·기타 세력 일부를 흡수하여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약칭 공화당)을 창당한다. 1963년 8월 박정희를 총재 겸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이후에 박정희가 당수직을 역임했으며, 제3공화국(1963~1972)과 제4공화국(1972~1981)의 실질적 여당이었다.

1963년 박정희(1917~1979)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1980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대한민국의 집권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은 이후에 1972년 유신정우회(10월 유신이후 박정희의 입법부 장악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 1981년 한국국민당(민주공화당의 후신 정당), 1987년 신민주공화당(김종필 총재)으로 그 명맥이 이어진다.

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을 접견하고 있다.
 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을 접견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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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되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였던 두 사람이 바로 김영삼과 김대중(1924~2009)이었다. 경선 초반에는 김영삼이 우세했으나 끝내 과반득표에 실패했고,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이 승리함으로써 최종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4월 27일 '직접선거' 결과 박정희(53.2%)가 김대중(45.2%)을 꺾고 당선된다. 7대 대통령 선거 이전 5·6대 대선에서는 둘 다 윤보선이 박정희의 상대였고, 이후 8·9대 대선부터 전두환까지는 전부 '간접선거'였다. 결국 1971년에 직접선거가 치러진 다음에 우리 손으로 다시 대통령을 뽑을 수 있었던 건 1987년이 돼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야당 대선 후보 역시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2. 민주정의당 [전두환, 노태우] - 1981~1990

1981년 1월,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등장한 신군부를 중심으로 창당된 정당이다.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약칭 민정당)은 제5공화국(1981~1988)의 집권여당이었으며, 초대 총재는 전두환이 맡았고, 이후에는 노태우가 당 총재가 되었다. 1987년에는 '6월 항쟁'을 겪으며 큰 위기를 맞게 되었지만, 민주진영인 야당의 분열(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 분열)로 말미암아 그해 12월 대선에서 노태우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에 패하며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1990년 2월에 민주정의당(노태우),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의 '3당 합당'이 이뤄져서 민주자유당으로 다시 출범한다. (민주공화당은 '유신정우회 - 한국국민당 - 신민주공화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 순간, 김영삼은 쿠데타 세력과 야합하며 민주화의 '변절자'가 된다. 아무리 1988년 13대 총선에서 자신의 통일민주당이 민주정의당과 평화민주당(김대중)에 이어 제3당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군사독재 세력과 손잡는다는 건 정치적 배신 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영삼은 여기서부터 김대중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자기가 정치에 입문시킨 노무현 전 대통령은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하는 모습.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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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주자유당 [김영삼, 김종필] - 1990~1995

노태우의 민주정의당(민정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민주계),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공화계)이 합당한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약칭 민자당)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정당이다. 1대 총재는 노태우였고 2대 총재는 김영삼이었는데, 92년 대선후보였던 김영삼이 김종필의 지지를 등에 업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와 충돌했고, 급기야 노태우는 민자당을 탈당하게 된다.

이어서 93년에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개혁을 내세우며 김종필과도 충돌했고, 결국 김종필은 계파갈등 끝에 탈당해서 1995년 3월에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95년 6.27 지방선거 참패로 당 쇄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12월에 1996년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한다. 결국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으로 이어진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은 김영삼의 손을 거치며 신한국당으로 다시 태어나고, 신한국당이 바로 한나라당의 전신이다.

4. 신한국당 [김영삼, 이회창] - 1996~1997

신한국당(新韓國黨)은 군사독재 세력의 이미지와 거리를 두기 위해 새로운 인물들(이회창·이재오·김문수·홍준표·맹형규·박찬종 등등)을 당으로 끌어들이며 당내 물갈이를 함으로써, 1996년 4월에 치러진 제15대 총선에서 제1당(139석)이 되었다. 게다가 신한국당은 그 이후에 자민련과 민주당 소속 의원들을 영입하기 시작했고, 끝내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각종 부정부패와 친인척 비리 그리고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결국 김영삼의 탈당과 함께 신한국당 총재 이회창은 민주당 총재 조순과 통합에 합의한다. 1997년 11월 신한국당은 민주당과 통합하면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꿨으나, 한나라당의 대선후보 이회창이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며 처음으로 야당이 된다.

4.19 혁명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점인 1987년 6월 항쟁으로 성립된 '제6공화국' 이후의 정당사를 보면, 정치인 김영삼의 역할이 특히 두드러진다. 김종필· 노태우와 손잡으며 3당 합당을 통해 군사독재 세력의 이미지 세탁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더니, 노태우와 김종필을 내보낸 다음에는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다양한 인물들을 영입함으로써 '독재 VS 민주화' 구도를 대폭 희석시켜 버렸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의 역사에 있어서 신한국당 시절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굉장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가 아닌가 싶다. 민자당 시절만 하더라도 군부독재의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신한국당을 거치며 나중에 한나라당이 된 다음에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 정당으로 자리잡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를 바로 김영삼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는 셈이다.

5. 한나라당 [이회창, 이명박] - 1998~2012

1997년과 200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가 야권의 후보인 고(故) 김대중 · 노무현에게 패배한 한나라당은 2006년에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을 흡수 통합하고, 2007년 12월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며 또다시 집권여당이 되는 데 성공한다. 김영삼과 IMF 이후 10년 간의 탈권위주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며, 어쩌면 김영삼이 신한국당 시절에 뿌린 씨앗이 이때 결실을 맺은 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명박 전 시장은 2007년 3월 13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등 현역 의원 63명등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권의 에세이집 출판기념회를 갖고 대권을 행한 포부를 밝혔다. 출판기념회에서 이명박 전 시장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은 2007년 3월 13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등 현역 의원 63명등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권의 에세이집 출판기념회를 갖고 대권을 행한 포부를 밝혔다. 출판기념회에서 이명박 전 시장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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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한나라당은 이명박의 실정과 민주주의 후퇴, 수많은 부정부패와 친인척 비리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국민들의 지지는 날로 떨어지고,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와 투표 당시의 부정 선거 의혹, 돈 봉투 파문 등이 이어지며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2011년 12월에 한나라당의 쇄신을 위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출범했고, 2012년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변경을 추진하게 된다.

6. 새누리당 [박근혜] - 2012~ ?

한나라당은 제19대 총선과 제18대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한다. 맨 처음 민주공화당은 박정희의 당이었고, 지금 다들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시피 새누리당은 박근혜의 당이다. 민주공화당은 친일청산을 막았던 이승만의 자유당 세력을 기반으로 탄생했으며, 군부독재의 시작과 동시에 출발했다. 바야흐로 '친일과 독재의 아이콘' 박정희가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 본격적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한편 민주정의당은 '신군부' 전두환과 노태우가 중심이었던 당인데, 나중에 김영삼 · 김종필과 손을 잡고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이때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바로 민주공화당의 세력을 흡수한 정당이었기에, 민주자유당은 사실상 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김영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의 손을 거치며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다시 태어났고, 이후 한나라당(이명박)과 새누리당(박근혜)으로 이어진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012년 8월 22일 오전 서울 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 자택을 예방해 김 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012년 8월 22일 오전 서울 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 자택을 예방해 김 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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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김영삼이 없었다면, 새누리당이 현재까지 이렇게 집권여당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새누리당의 역사와 김영삼의 인생을 돌아보면, 2015년의 한국 정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변절자' 김영삼에 의해 '박정희+전두환'의 연합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했지만, 또 그에 의해 문민대통령 시대가 열렸고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이어졌다. 역사라는 건 참 오묘하고, 그 한가운데에서 어쨌든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다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태그:#김영삼, #새누리당, #김대중, #박정희,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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