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 사회에서 페스탈로치는 아이들에게 노작 활동을 통한 전인교육을 실천하고 전쟁 고아와 빈민층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교육자로 인식됩니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쓰인 그의 묘비명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페스탈로치는 스위스 시민혁명의 와중에서 여러 번의 좌절 끝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교육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낡은 질서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발전시키는 교육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 교육의 길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칩니다. 인간성을 구속하는 낡은 사회 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교육에 혼신을 다했던 것입니다. 스위스 교원노동조합의 시초가 되는 '스위스 교육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습니다. 페스탈로치가 '스위스 교원노조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교육부가 선정한 이달의 스승, 최규동이 조선의 페스탈로치?

2015년 3월 교육부에서 '이달의 스승'으로 최규동을 선정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민족의 사표(師表)' , '조선의 페스탈로치' 최규동이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하였다가 친일논란이 일자 다시 회수한 것입니다. 교육부 잡지 '행복한 교육' 3만5000부를 찍어 전국 초중고교와 대학교, 주민 센터, 사회복지관에 홍보됐던 인물!

최규동이 친일 인물임에도 어떻게 조선의 페스탈로치로 변신했을까요? 일제 강점기 시절 수학교사로 출발하여 젊은 날 민족교육에 투신하기도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변절하여 적극적으로 친일의 길을 걷습니다. 조선신궁 발기인,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내고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6월에는 일제 관변잡지 <문교의 조선>에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친일 논조의 글을 거침없이 휘갈깁니다.

이 글에서 조선 청년들이 일본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천황의 은혜를 입는 것'으로 극찬합니다. 나아가 '일제의 징병조치에 감읍하여 한 번 죽음으로써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황국신민교육의 완성'이라고 강변하였습니다.

최규동은 영화 '암살'에서 보듯이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친일부역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가 좌절된 이후 혼탁한 사회에서 미군정청 조선교육심의회(교육행정 분과) 위원, 서울교육회장, 초대 조선교육연합회 회장과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합니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문화훈장을, 이어서 독립유공자로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습니다. 거기엔 엄연히 역사의 진실에 눈을 감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약칭 한교총, 조선교육연합회의 후신)와 이를 방조한 교육부의 잘못이 존재했습니다.

해방 공간 조선 최고의 교육자 3인, 이만규 이극로 백남운

배화여고 교무주임 시절의 이만규(1929)
 배화여고 교무주임 시절의 이만규(1929)
ⓒ 박용규

관련사진보기


조선의 진정한 교육자이자 페스탈로치는 당연 이만규입니다. 해방 공간 조선 최고의 교육자 3인을 꼽을 때 이만규, 이극로, 백남운 세 사람을 꼽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세 사람 모두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유공자는커녕 한국사회에선 거의 잊혀진 존재입니다.

특히 이만규는 교사들에게 낯설고 생경한 인물입니다. 교육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에게서조차 이만규는 연구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해방 직후 교육계에서 이만규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조선의 교육자들도 조선의 학교 교육이 앞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전체 그림을 그리며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1945년 9월 15일에는 조선 전체 중등교사 1894명 가운데 450명이 참여한 '중등학교 교육자 대회'가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열립니다. 중등교사 4명 중 1명이 참여한 중등교원 최초이자 최대의 전국교사대회였습니다. 이 대회 소집을 구상한 발기인들은 서울 시내 중등학교 교장 출신들이었습니다. 최규동처럼 조동식, 유억겸 등 일제 말기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친일 전력을 지닌 인물들이었습니다.

대회가 열리기 10여 일 전 동덕고등여학교 교사 2명이 이만규의 집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친일 교장들의 준동을 설명하고 이만규의 대회 참석을 간곡히 요청합니다. 결국 '중등 교육자 대회' 의장직을 노렸던 조동식 등 친일교장들을 물리치고 이만규는 압도적인 지지 속에 당당히 의장에 선출됩니다.

일제강점기 비타협적 노선을 걸으며 항일 민족교육을 실천한 이만규

이만규는 일제강점기 35년 가운데 31년 동안 항일 민족교육에 헌신하며 비타협적 노선을 걸었던 몇 안 되는 인물입니다. 개성 송도고보 학감 시절 애국창가집을 몰래 제작해 배포하다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애국창가집에 실린 '영웅의 모범' 노랫말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산도와 영등포에서 거북선 타고 일본함선을 모조리 복멸시킨 이순신의 전략은 우리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하리.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 좌충우돌 분투하여 쥐와 같은 왜적들을 도처에서 베어버린 곽재우의 모범은 우리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하리.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드디어 대마도에 갇히어 일본의 곡식을 먹지 않고 태연히 굶어죽은 최익현의 절개는 우리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하리. 노적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습격하여 3발 3중 사살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안중근의 그 의기, 우리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하리"(박득준의 <조선근대교육사>에서 재인용)

1919년 3·1운동 당시 이만규는 송도고보 교사로서 독립선언서를 다량으로 인쇄, 시위 현장에서 배포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됩니다. 이후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등 여러 차례의 옥고와 2년 7개월의 해직교사 시절을 통해 이만규는 조선사회 낡은 질서를 해체시키기 위한 교육실천과 함께 항일의식 고취, 조선어 규범수립운동에 적극 참여합니다. 배화여고보 시절 이만규로부터 배웠던 조영애(시인 조지훈의 고모)는 교육자로서 이만규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당시 이만규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의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한글독본과 역사책을 구해와 위험을 무릅쓰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여성의 잠재력 개발을 중요시해 과도기의 여성은 한 어깨에 두 짐, 세 짐의 과제를 짊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이만규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의 영혼 속에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의 정당성을 가르치면서도 한편으론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겸손을 알려주셨습니다." (고광헌의 <발굴현대사 인물>에서 인용)

교육을 통해 낡은 질서를 해체시키려 노력했던 이만규

이만규는 배화여고보 시절 여성 스스로 봉건적 인습에 얽매이지 말고 주체적 인격을 갖출 것을 강조했습니다. 독립된 인격체로 '사람인 여성'이 되어 '온 정신과 몸이 노동하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친한 친구가 될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일상의 봉건적인 질서인 축첩제도를 타파하고 사주, 궁합, 점 등 미신에서 해방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나아가 제사법을 고쳐 혼례, 상·장례, 제례의식을 간소화하고 여성 스스로 경제지식과 과학지식, 그리고 국제정치 동향과 약소민족에 대한 소양을 바탕으로 미의 가치를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예술적 감수성을 간직할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여자가 학문을 닦는 것은 그 목적이 여자의 인격을 높이려는 데 있으며 인격이 높아진다는 것과 자존심이라는 것은 하나"임을 가르쳤습니다. 남존여비 등 봉건적 질서가 온존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이만규는 남녀평등교육을 통해 여성 스스로 주체적 인격을 갖춰 당당하게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고 사회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전체 교원 1/3이 가입한 '조선교육자협회'의 실질적 지도자 이만규

이러한 교육자로서 이만규의 교육사상은 해방 직후 조선인민공화국(1945.9)의 시정방침, 조선인민당(1945.11)과 민주주의 민족전선(1946.2), 그리고 근로인민당(1947.5), 조선교육자협회의 강령 및 교육 정책에서 여실히 표현됩니다. 특히 해방 직후 자생적이면서도 전국조직을 갖춘 대중적인 교사단체 '조선교육자협회'에서 이만규의 역할은 매우 돋보입니다.

1947년 2월 창립 당시 280명으로 출발한 '조선교육자협회'는 불과 3달 사이에 9210명이 모이는 놀라운 조직력을 보입니다. 교사의 권익 보호와 해방 조선의 교육청사진을 고민하며 등장한 '조선교육자협회'는 당시 교원 3만 명 가운데 거의 1/3이 가입한 최대 교사단체였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교원노동조합의 성격을 띠었다고 볼 수 있는 '조선교육자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도 이만규였습니다. 1947년 7월 '조선교육자협회'가 발표한 강령과 정책에는 이만규의 교육 사상과 신념이 잘 녹아 있습니다.

초등 의무교육 시행, 학원 민주화를 위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숙청, 문맹 퇴치 시행, 정치교육의 강화, 봉건적·국수주의적·비과학적 교육 청산, 민주주의 교육이론 수립, 남녀 공학의 점진적 실시, 부인 해방과 계몽 교육 시행, 남녀평등 교육 실현을 위한 시급한 대책 등이 모두 이만규의 교육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히 해방 직후 교원노동조합의 선구자격인 '조선교육자협회'의 당당한 면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만규의 북쪽행은 이승만 정권의 백색테러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

1948년 이만규의 북행길 선택은 절친한 친구 여운형의 피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일제치하 고등계 형사 노덕술에게 체포됩니다. 숱한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다 2명이나 죽인 악질 경찰 노덕술에게 해방된 조국에서 체포돼 수모를 겪습니다. 풀려난 후 3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던 김원봉은 목숨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북쪽을 선택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만규 역시 두 딸을 남쪽 사회에 남겨둔 채 다른 가족을 데리고 부득불 생존을 위해 북쪽을 선택합니다. 일제치하 한글강습회 강사,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조선어학회 간사장으로 활약하며 조선어학회 사건(1942) 당시 귀 한 쪽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고문을 당했던 이만규는 진보적 민족주의자이지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이극로 선생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듯이 이만규도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폭압적인 이승만 반공 정권 아래 극우 친일세력의 백색테러의 위협이 시시각각 엄혹해지는 상황에서 이만규는 전쟁 전임에도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이 낳은 페스탈로치! 다음 장면은 이만규의 따뜻한 제자 사랑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1930년 들어 광주학생운동이 서울로 확산되던 당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던 배화여고보 제자들을 걱정하면서 이만규는 취조실 문틈으로 제자들이 취조 받는 상황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취조가 끝나면 일제 경찰의 폭행을 감시하며 경찰서에서 검사국까지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실로 조선 교육자의 귀감이자 사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태그:#페스탈로치, #이만규, #조선교육자의 사표, #역사왜곡, #최규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