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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민중총궐기 참가기 1]에서 이어집니다.

14일 오후 서울 서울시청 광장과 남대문 앞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및 농민대회에 참석한 노동자와 농민들이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고 있다.
▲ '민중총궐기 대회', 분노한 민중 14일 오후 서울 서울시청 광장과 남대문 앞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및 농민대회에 참석한 노동자와 농민들이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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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서울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오후부터 갠다는 일기예보만이 예측을 빗나갔을 뿐이다. 오후 4시가 가까워져서야 가까스로 한강을 건넜다. 점심 식사를 위해 휴게소에 머문 시간까지 포함하면, 무려 9시간 가까이 버스에 갇혀있었던 셈이다. 먹구름이 잔뜩 낀 서울 하늘은 당장이라도 폭우를 쏟아낼 것만 같았다.

광주로부터 줄곧 함께 줄지어 온 버스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으로 변한 고속도로를 피해 서울에 진입한 후 각기 지름길을 찾아 나선 까닭이다. 버스의 최종 목적지는 농민대회가 열리는 숭례문이다. 거기서부터는 시청 광장과 광화문까지 걸어서 행진해야 한다. 짓궂은 날씨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지 걱정이 됐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 일행을 맞이한 건 흥겨운 풍물 소리였다. 족히 일흔 살은 넘어 뵈는 촌로들이 신명 난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마다 '밥쌀 수입 중단', '농민 생존권 쟁취'라는 구호를 적은 띠가 둘러져 있었다. 그렇듯 신명 난 장단에 살려달라는 눈물겨운 아우성을 실어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채를 쥔 어르신들의 거칠고 굵은 손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나락을 담는 가마니를 뒤집어쓴 채 구호를 외치는 농민들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도로 위에서 울부짖는 수천 명의 농민들 중 나보다 어린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주름이 깊게 파인 깡마른 어르신들이 당신의 키보다 몇 배는 더 길고 무거운 깃대를 어깨에 지고 묵묵히 서 있었다. 그들의 연거푸 피워대는 담배 연기에서조차 절박함이 느껴졌다.

흉년이 들어도 죽고, 풍년이어도 가격이 폭락해 죽기는 매한가지라는 어르신들의 하소연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FTA' 체결로 농업을 볼모로 삼더니 'TPP'로 그 숨통마저 끊으려 한다는 절규가 폐부를 찔렀다. 철저히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농민들에게 과연 정부란 어떤 존재일까. 얼마 전 공무원인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국익'을 위해 누군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경쟁력을 잃은 농업 아니겠냐는 말을 들은 터다.

이 열기, 국민들에게 온전히 전해졌으면...

궂은 날씨 속에도 시청 앞 광장은 이미 엄청난 인파로 뒤덮여 있다. 아스팔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광장을 에워싼 높은 빌딩들 꼭대기 곳곳에서 기자들이 카메라로 내려다보고 있을 테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그 벅찬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치지 않던 보슬비는 어쩌면 광장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 위해 필요했는지 모른다.

중앙 무대 옆 두 대의 크레인에 매달린 스피커가 모두 우리 일행이 자리한 반대쪽을 향해 있다. 이곳보다 훨씬 더 많은 인파가 운집한 게 틀림없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일까. 조금 과장한다면, 광장에 펄럭이는 깃발만 만 개는 될 듯하다. 각종 단체의 이름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대구, 전주, 대전, 울산, 원주, 남원, 제주 등 전국의 지명들이 총망라돼 있다. 게다가 일본 철도노조와 아르헨티나 노조 등 해외 단체들까지 힘을 보탰다.

직종과 지역, 성별과 나이 등 어느 것 하나 같은 게 없지만, 노동개악과 국정교과서 강행 등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해 공감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기꺼이 힘을 보태려는 이들이다. 노인과 청년 둘이 단상에 올라 역할극을 통해 임금피크제 강행의 의도를 조목조목 짚어냈을 때는 공감의 함성이 드높았다. 그만큼 현 상황이 엄중하다는 증거다.

공중파든, 종편이든 방송사마다 카메라들이 시위 현장 주변을 분주히 오갔다. 논조야 어떻든 이 모습들이 최소한 내일이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지게 될 것이다. 거칠게 말해서 언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대규모 집회를 열 하등의 이유가 없다. 광장에 자발적으로 모인 십만여 명의 외침과 열기가 온전히 국민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대학로 방면에서 집회를 마치고 광화문으로 행진하던 시위대가 차단벽에 막혀 멈춰서 있다. 뒤편 언론사 빌딩 창문에 기댄 채 직원들이 시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어떤 기사를 쓰게 될까.
▲ 시위대를 창밖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언론사 직원들 대학로 방면에서 집회를 마치고 광화문으로 행진하던 시위대가 차단벽에 막혀 멈춰서 있다. 뒤편 언론사 빌딩 창문에 기댄 채 직원들이 시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어떤 기사를 쓰게 될까.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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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 행사로 '전태일 상' 시상식이 있었다. 무심코 지나쳤지만, 11월 13일은 그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지 45주기였던 날이다. 모두 숙연해진 가운데 차분히 행사를 이어갔고, 이내 사회자는 광화문 광장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제안을 했다. 이곳 말고도 시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별도의 집회가 있었는데, 정치, 사회, 교육, 문화 등 각 분야의 목소리를 담아 청와대가 보이는 그곳에 모이기로 약속돼 있었던 거다.

자리에서 일어나 광화문을 향해 눈을 돌려보니 이순신 동상 발아래로 높다란 차단벽이 일찌감치 세워져 있었다. 2008년 촛불 시위 때는 컨테이너 박스를 서로 용접해서 만든 '명박산성'이 등장해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더니만, 똑같은 자리에 또다시 '불통의 벽'이라는 조롱을 받는 차단벽이 세워진 것이다.  

경찰이 충돌을 유도한 셈

광화문 광장에 이르는 모든 길은 이렇게 차벽으로 막혔다. 바로 앞이 집이라는 아주머니 한 분은 결국 버스의 아래 바닥으로 기어 통과했다. '웃픈' 광경이었다.
▲ 골목길까지 막아선 경찰차벽 광화문 광장에 이르는 모든 길은 이렇게 차벽으로 막혔다. 바로 앞이 집이라는 아주머니 한 분은 결국 버스의 아래 바닥으로 기어 통과했다. '웃픈' 광경이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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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의 흐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집회 신고를 불허해놓고, 정작 경찰이 앞장서 차량과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선 셈이다. 자신 있으면 넘어보라는 식으로 충돌을 유도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흡사 조폭들이 몽둥이를 들고 길목을 지키고 선 모양새다. 백 보 양보해서, 집회 장소는 경찰이 정해줄 테니 너희는 그대로 따르라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지는 둘 뿐이다. 경찰의 지시에 순응하거나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거나. 순응한다는 것은 헌법상 집회의 자유를 스스로 부정하겠다는 뜻이며, 요구한다는 것은 곧 공권력과의 충돌을 의미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 같으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당연하게도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답대로 선택한 결과 역시 우리는 익히 봐왔다.

'불통의 벽'에 다가서기가 무섭게 스피커를 통해 "당신들은 지금 불법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경찰의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는 곧 물대포를 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길을 열어달라는 시위대의 요구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늘 물대포였으니, 서로 마주한 채 던지는 외침과 경고는 그저 요식행위일 뿐이다. 결국 엄청난 압력의 물폭탄이 굉음을 내며 시위대를 향해 쏟아졌다.

아스팔트 바닥에 물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무언가 깨지고 찢기는 소리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럼에도 시위대는 좀체 물러서지 않았다. 직격탄처럼 퍼부어대는 물대포가 거세질수록 그에 맞선 저항도 더욱 거칠어졌다. 물에 섞인 캡사이신으로 인해 얼굴이 발갛게 부어오른 이들이 속출했고, 급기야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는 전쟁 같은 상황으로 돌변했다.

시위대의 앞쪽에 있었지만 더 이상 나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되레 시나브로 뒷걸음질 치며 그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튀긴 물대포의 파편만으로도 연신 재채기가 나왔고,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아수라장인 그곳을 벗어나려니, 우금치 고개에서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동학농민군을 일본군과 함께 방어하던 관군의 좌선봉장 이규태가 남긴 일기 글이 떠올랐다. 기록으로 남은 120년 전 당시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수만 명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든다.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어떠한 담략인가.'

'후방'에는 광장이 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전방'과는 달리, '후방'은 민주주의의 실험장이었다.
▲ 시위대 '후방'의 문선대 공연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전방'과는 달리, '후방'은 민주주의의 실험장이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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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전방'과 달리 '후방'은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공간이었다. 어둠은 짙어져 갔지만 사람들은 그 어둠조차 즐겼다. 많은 사람들이 문선대(문화선봉대)의 공연과 함께했고, 도로 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토론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젖은 몸을 녹이기 위해 서로 어묵을 챙겨주는 모습도 보였고, 도로 위에 널브러진 쓰레기더미를 치우는 환경미화원들의 일손을 돕는 이들도 있었다.

교복을 입은 앳된 고등학생들도 거리에 나와 힘을 보탰다. 도로 한쪽에서 구호를 외치며 국정교과서 반대 피켓 시위를 이어갔다. 그들에게 고생한다며 따뜻한 차를 건네는 몇몇 어르신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했다. '외눈박이' 언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물대포가 버티고 선 '불통의 벽' 저 너머와는 달리, 14일 저녁 태평로는 말 그대로 거대한 '광장'이었다.

교복 차림의 앳된 고등학생들이 비오는 날씨에도 국정교과서 반대 피켓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 고등학생들의 집회 참여 교복 차림의 앳된 고등학생들이 비오는 날씨에도 국정교과서 반대 피켓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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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정훈 기자



태그:#민중총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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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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