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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시절 이메일로 초대장을 대량 발송했던 적이 있다. 예전부터 사용했던 구글 익명계정을 이용했다. 계정이름은 김전무였다. 다음날 전무라는 직함을 사용했다는 꾸지람을 들었다. 내게 전무란 단어는 全(오로진 전)  無(없을 무).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이었다.

몇 년 후에 나는 여전한 비정규직이었다. 며칠 전에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들은 내게 특이한 사람이라고 했다. 힐링이 필요한 사람인 것 같으니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동료들에게 건강진단서를 떼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구글로 돌아왔다. 점점 히키코모리가 되어갔다. 구글에서 나는 김전무라는 사람의 이름을 봤다.

이메일이 왔다.

"무진으로 가지 않을래?"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선배의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다. 난 찰나에 소설 <무진기행>을 도서관에서 빌려 기차표를 예약했다. 오후 3시 59분. 무궁화열차에 올라탔다. 소설 <무진기행>의 주인공은 제약회사의 전무자리를 노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나는 무직자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신분으로 입석표를 끊었다. 열차가 광주역에 정거했을때 <무진기행>에 등장했던 광주역 미친 여자를 떠올렸다. 김승옥은 희롱당하던 이 여인의 비명소리를 통해 젊은 날을 회상했고 우리는 그 사이렌의 목소리에 이끌려 환상 속으로 풍덩빠진다.

'어머니, 혹시 제가 지금 미친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원인들 때문일 테니 그 점에 유의하셔서 저를 치료해보십시오.' 이러한 일기를 쓰던 때를 이른 아침 역 구내에서 본 미친 여자가 내 앞으로 끌어당겨주었던 것이다. 무진이 가까웠다는 것을 나는 그 미친 여자를 통하여 느꼈고 그리고 방금 지나친, 먼지를 둘러쓰고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는 이정비를 통하여 실감하였다.' - 무진기행. 김승옥
                    
오후 7시 40분. 순천역에 도착했다. 여느 중소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어딘가에 바다가 있다는 느낌을 소금기 머금은 해풍이 알려줬다.  

밤에 만난 사람들

밤에 만난 사람들이란 <무진으로 가는 버스>, <밤에 만난 사람들>, <바다로 뻗은 긴 방죽>,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라는 4가지 소제목 중에 하나이다. 선배는 무진에서 본 첫 번째 밤손님이었다. 두 번째는 식당주인이었다. 식당주인은 서울말을 쓰고 있었다. 순천에 왔다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았다.

문예창작학과를 함께 졸업한 선배는 김새봄. 새봄출판사의 대표이다. 나는 소설 속 고향에서 만난 고향후배처럼 29살이다. 선배는 새봄출판사의 대표는 전무나 마찬가지였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말더듬이가 돼버린 3포세대를, 5포세대의 설움을 이야기했다. 나는 선배에게 뛰어난 말재주를 갖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김승옥의 <누이를 위하여>라는 작품의 다음 문장을 낭독했다.

누이에게 쓰고 싶던 편지의 한 구절-'도시에 가서 침묵을 배워 왔던 네가, 도시에서 조리에 맞지 않는 감정의 기교만을 배운 나보다 얼마나 훌륭했던가.' - 누이를 위하여. 김승옥
 
다음날 아침 김승옥 문학관을 갔다. 작품의 주된 소재였던 갈대와 습지가 펼쳐져 있었다. 김승옥 작가는 친필 사인을 해주시곤 선배가 출판한 필사책을 칭찬하셨다.
 
직접 문학관을 소개하시기도 했다. 김승옥 문학관은 아동문학 작가 정채봉 문학관을 접하고 있었다. 순천만을 오고가는 관광용 꼬마기차가 다니고 있고 관광객이 많아 문학관보다는 테마파크같은 분위기였다. 작가를 알아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보통 그의 책에는 젊은 날의 사진이 많이 실리기 때문이다.

친필 사인을 해주는 작가의 모습
 친필 사인을 해주는 작가의 모습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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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메모지와 볼펜을 휴대하고 있었다. 언어장애가 있기 때문에 언어 대신에 메모로 대체한다. 수화를 하시진 않는다. 그가 언어장애를 갖게 된 것은 2003년 중풍으로 쓰러진 직후였다. 이문구 작가의 부음을 듣은 직후였기 때문에 문단의 충격은 컸다. 신앙의 힘으로 건강을 회복하셨지만 언어장애를 앓게 된 것이다.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기념사진 속의 모습처럼 작가는 왕년의 배구선수 몸이 컸다. 손아귀힘도 좋으셨다. 한정식집에서 들어갈 때 한 손으로 큰 문을 열어제끼셨다. 그의 건강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갈비탕을 대접하셨고 잔반이 떨어지면 손수 챙겨주시고 먹으라고 내어주시는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김승옥 문학관에서 김승옥 작가와 가운데 김승옥 작가, (좌) 새봄출판사 대표 김서봄. (우) 김선태
 김승옥 문학관에서 김승옥 작가와 가운데 김승옥 작가, (좌) 새봄출판사 대표 김서봄. (우) 김선태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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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를 위하여>와 직접 만드셨던 영화가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젊은 시절에 쓴 글이냐고 여쭤보았다. 그리고 이 분이라면 청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휴지에 중앙시장을 가겠다는 메모를 남기셨다. 다음 행선지가 어디냐고 메모로 물으셨다. 김승옥 작가는 버스카드를 손에 쥐고 버스에 오르셨다. 우리도 갈림길에서 버스에 올라탔다. 작가님은 버스 창가에서 손을 흔드시면 작별인사를 했다.

용산전망대에서 본 순천만 풍경
 용산전망대에서 본 순천만 풍경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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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정식명칭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남북 30km, 동서 22km의 연안습지이다. 풍경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높이 92m의 야산 용산의 용산전망대으로 가야한다. 산을 오르며 김승옥이란 작가에 대해 생각했다.

김승옥 작가는 산문집 <내가 만난 하느님>에서 그의 성장 과정을 밝혔다. 1948년 그가 여덟 살 국민학교 1학년때 여순사건에 휘말려 많은 사람이 총살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이 사건으로 돌아가셨다. 3년 후 여동생이 열병으로 세상을 떴다.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유한한 존재란 사실이 그의 인생 문제가 되어 그를 괴롭혔다. 60~8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을 겪으며, 문인과 예술가들의 박해를 보며 고통에 빠져 절필했던 순간도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가 요즘 무신론자가 되어 가는 젊은이들을 걱정하며 그에게 기도를 멈추지 말라고 했던 부분이 생각났다. 용산전망대에서 신이 빚은 풍경을 김승옥이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순천만은 '방바닥에는 비단방석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화투짝이 흩어져 있었다'라는 무진기행의 문장이 떠올랐다. 실재로 그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했다. 어쩌면 무진을 빚은 신의 의도도 대신 들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순간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를 사랑하며 인간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신앙을 되찾는 장면을 떠올렸다. 하인숙을 사랑한 로쟈를, 소냐를 사랑한 김승옥이 안개라는 이불 속에서 함께 뒹구는 모습도 떠올랐다.

산을 내려와서도 우리는 한참 순천만을 맴돌았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서야 그곳을 빠져나왔다. 순천만 입구 근처에 자리한 무진식당이란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한정식을 먹다가 순천특산물인 순천막걸리를 마셨다. 무진의 명산물이 안개만이라는 소설이야기는 거짓말이었다. 구수한 순천막걸리에 게장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장님께 무진기행을 선물했다. 마지막으로 순천만의 노을을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순천행 버스를 기다리다가 무진기행의 다음 구절을 낭독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순천역에서 오래 머물고 싶어 야간열차를 탔다. 야간열차에서 순천의 풍경을 붙들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밀집모자를 벗지 않는 마지막 일탈을 즐겼다. 새벽에 도착한 수원역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나에게 무진은 현실이었고 김전무란 가짜 이름도 내 이름이었다. 나를 찾는 첫 번째 문학기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무진식당
 무진식당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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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문학기행, #순천, #김승옥, #청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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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복지, 사회, 문화,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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