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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백화점 직원들의 노동현실을 연재기사로 쓴 지도 어느덧 수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바뀐 것은 없고, 내 안에서 감정노동에 관한 여러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감정노동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감정노동 관련 법안이 통과되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내가 활동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우리동네 노동권찾기(아래 '우동')'에서는 고맙게도 이런 나의 의문들을 함께 토론해 주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논의 결과, 감정노동사회를 만들고 있는 세 주체를 정부와 기업, 소비자로 꼽았다. 이중 가장 적극적으로 노동자에게 감정노동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단연 기업이다.

고객과 직접 대면접촉을 하는 기업들(주로 서비스업)은 대체로 '저렴하고 좋은 상품'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더 친절한 서비스로 경쟁한다. 기업들은 경쟁하듯 CS교육을 통해 직원들에게 '더 많이 친절할 것'을 요구한다.

'고객만족'을 내세우던 기업들이 '고객감동'으로, 최근에는 '고객졸도'로 서비스 목표를 바꿔갈 때마다 진정 숨 막혀 졸도하는 건 감정노동자들이다. 고객이 놀라 졸도할 정도의 서비스라니, 도대체 그런 서비스가 왜 필요한가?

문제는 소비자들도 어느새 이러한 과잉친절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덜 누리면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무시당한 기분도 든다.

그렇다고 기업에 '선의'나 '정의'의 가치를 앞세워 더 이상 감정노동을 강요하지 않을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업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소비자다. 소비자가 과잉친절문화를 불편하게 여기고 거부한다면 조금은 다른 변화를 기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동에서는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서울시내 백화점 11곳의 이용객들을 대상으로 '노동인권감수성지수 테스트'를 진행했다. 내 안에도 혹시 타인의 감정노동을 지속하게 만드는 생각들이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소비자들이 나서서 감정노동을 거부하는 문화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다.

상품 가격에는 친절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백화점 이용객들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직원들에게 얼마나 크고 작은 감정노동을 요구하고 있었을까?

이번 설문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던 문항은 "많은 돈을 낼수록 그만큼 친절한 서비스를 기대하게 된다"는 항목이었다. 무려 69.4%가 이 문항에 "그렇다"고 답했다.

사실 이 질문은 전체 문항들을 꿰뚫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돈을 더 낼수록 더 친절해야 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친절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싼 돈으로 더 많은 서비스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되는 곳이라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의 표정이 무뚝뚝하면 불친절하다고 느낀다. 일반적으로 친절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상냥한 미소와 부드럽고 예의 있는 말투나 행동, 세심한 배려 같은 것을 접했을 때다. 대체로 사람의 감정이 담겨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상품가격에 미소, 다정한 말투, 공손한 몸가짐에 대한 비용이 담겨 있을까? 최근에 어떤 유통업체에서 직원들에게 "여러분이 받는 월급에는 고객에 대한 친절한 서비스의 가격도 포함되어 있어요"라고 말한 CS교육 담당자가 있었다. 그래서 한 30대 직원이 손을 들고 "그게 얼맙니까?"라고 물었더니 당황해서 끝내 답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설령 상품가격에 친절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감정과 관련한 부분에 가격을 매기는 일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이 문항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노동자의 감정노동을 만드는 데 가장 근간이 되는 인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문항과 비슷한 맥락으로 "직원이 어떤 상황에서도 고객에게 웃으며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은 기본이다"라는 말에도 61.4%가 "그렇다"고 했다. 어떤 부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친절하게 응대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입장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직업의식이 투철하다고 볼 수도 있고,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인격을 무시하는 잔인한 요구를 받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반면에 "고객이 직원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는 경우, '직원이 어떤 잘못을 했을까'하는 생각부터 든다."는 데에는 26.2%만 동의하여 어떤 상황에서든 무조건 고객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결과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고객졸도 서비스'에 졸도하는 감정노동자②]에서 이어집니다.


태그:#감정노동, #노동인권감수성, #백화점, #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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