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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농촌 들판에는 난데없이 6차산업화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 농업의 돌파구가 열린다며 정부는 강변한다. 그러나 6차산업화의 현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대보다 걱정이 먼저 보인다. 그곳에 농민은 없고 자본과 기업만 우뚝하다. 농업은 잘 안 보이고 공업과 서비스업만 무성하다.

그렇게 1차 농산물 재배는 없고 2차 농식품 제조와 3차 농촌관광과 유통 서비스만 있으니, 1곱하기 2곱하기 3을 해서 6차산업은 고사하고, 0곱하기 2곱하기 3을 하니 도로 0차 산업의 꼴이 된다. 2차와 3차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6차산업의 출발지점이자 바탕이 되어야 할 1차 산업이 비어있거나 모자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위장 6차산업'은 마치 공염불이나 신기루처럼 여겨진다.

정부의 느닷없는 6차산업 드라이브 정책에 6차의 의미와 의도를 잘 알 수 없는 농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입을 모아 불신과 우려의 목소리를 감추지 못 한다. "농촌의 모든 유·무형의 자원을 제조·가공해 유통·판매·문화·체험·관광서비스와 연계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6차 산업에 대한 정의가 그저 막연하고 막막하다며 한숨을 쉰다. 

무엇보다 '공동체농업과 농촌공동체' 방식을 '농정의 정도'로 알고 살아온 우리 농민들의 눈에는 왠지 옳고 바른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할 수 없는 남의 일처럼 들린다. 자본력과 기술력의 기업농을 내세운 6차산업화는 대다수의 소농, 가족농에게는 그림의 떡처럼 다가온다.

참여하고 싶어도 대다수에게 문턱이 높은 정책은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름기지 올바른 정책이라면 자본이 모자라고 기술도 부족한 소농일지라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정부가 좋아하는 표현대로 정책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가진 자만 독과점할 수밖에 없는 정책은 정책이 아니고 어쩌면 특혜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6차산업화든 융복합산업이든 대농이나 기업농이 아니라 중소농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땅히 마을과 지역사회 공동체를 사업의 기반으로 해야 한다. 거기에 사업을 추진하고 지원할 농민이 주도하는 전문적이고 도덕적인 농업회의소 같은 중간지원조직이 필요하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현실적 주장이 아니다.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미 선진 농업경영체의 최적 모델로 자리잡고 있다.

1500명 농민들의 협동연대 경영체 '슈베뷔쉬 할 생산자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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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명의 농민생산자들의 협동경영체, 슈베비쉬 할 생산자조합(Gemeinschaft)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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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이라 불리는 슈베비쉬 할(schwabiseh Hal|)은 독일 바덴-비텐베르크주의 작은 목가적 도시다. 인구는 3만6천 명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독일의 중요한 경제 중심지 가운데 한 곳으로 평가된다 경제는 주로 무역, 서비스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할' 지역은 호엔로에(Hohenlohe) 마을의 유기농업만으로도 충분히 유명하다. 그 유기농 식재료로 만든 맛난 음식은 나라 안팎의 관광객들을 지속적으로 호객하고 있다. 그 중심에 슈베비쉬 할 생산자조합(Gemeinschaft)이 있다. 조합의 기술지도사로 일하는 나드하 레온하드씨는 조합이 이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조합의 설립 목적 자체부터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삼았어요. 농업의 규모화나 기업화가 아니었어요. 1980년대 멸종위기의 재래종 돼지를 할 지방의 특산돼지로 되살리면서 조합의 역사가 시작됐어요. 1986년 설립 당시 불과 8명의 조합원으로 출발했는데 지금은 1500명 가까운 조합원이 모였어요. 연간 1억200만 유로(약 1400억 원)의 매출도 올리고 있고요.

조합의 회장은 설립 이래 연임하며 조합의 경영을 책임져 오늘날의 성과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어떤 조직이든 지도자가 중요하죠. 그리고 거기에 조합원들이 서로 협동하고 연대하는 힘이 결합되었죠. 또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지역에 기여하는 사업철학과 전략도 변치 않았어요. 전통돼지 한 품목이 성공하면서 지역 전체의 경기가 살아났죠. 조합은 지역의 관광업체와 협력해 지역관광산업을 촉진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어요."

슈베비쉬 할 생산자조합의 역사는 돼지육종협회에서 출발한다. 1988년에 생산자조합을 결성하고 1992년에는 상장된 주식회사도 따로 설립하며 성장을 거듭한다. 조합과 별도로 공장의 운영주체인 주식회사를 굳이 따로 설립한 이유는, 생산자조합에서 고기를 수매해주면 세금문제가 원활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자체 도축장, 소시지 가공장, 농민시장 등 1차 생산에서 2차 가공, 3차 직거래 유통에 이르는 이른바 6차산업화 과정을 내부 계열화했다. 이로써 지역 뿐 아니라 독일 전역을 대상으로 농식품을 판매하게 되면서 안정경영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역직판장 뿐 아니라 독일의 고급호텔, 유명레스토랑, 기업체 식자재, 루프트한자 기내식 등에서 최우량 식자재로 대우받고 있다.

4000종 로컬푸드 복합 직판장 '호헨로에 농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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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0종 이상의 로컬푸드를 직판하는 호헨로에 농민시장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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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베비쉬 할 생산자조합의 경쟁력은 한마디로 품질에서 나온다. 조합에 고용된 전문 기술지도사들이 수시로 생산자를 컨설팅하며 품질을 상향평준화시켰다. 유럽연합 최고 등급의 유기농 인증서 '외코테스트(Oekotest)'를 비롯해 Non-GMO 인증, 국제 표준규격, 독일농민협회(DLG) 골드라벨 인증 등 다양한 인증서가 조합 생산품의 품질과 진정성을 보증하고 있다. 

심지어 원산지 스페인처럼 도토리만 먹여서 키운 이베리코 돼지로 하몽(Jamon, 염장 건조 생햄)을 생산하기도 한다. EU의 지역특산물로 인정받은 암컷 슈베비쉬 헬리쉬 슈바인종과 수컷인 피에트램종을 교배한 돼지도 특별하다. 소시지 내용물은 당연히 지역농산물을 원재료로 한다. 지역에서 생산하지 않는 양념류는 루마니아, 인도 등의 생산지에서 현장 기술지도를 해서 생산한 것만 공수해 사용한다. 유해 식품첨가물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과는 다른 지역이나 조합에서 흉내낼 수 없는 차별화된 생산·가공 전략, 그리고 개발기술이 있어서 가능하다. 우리의 농식품부에 해당하는 독일의 소비자·식량 및 농림부 장관이 우수 사례지로 방문할 정도로 공인받고 있다.

"농민시장은 2007년에 문을 열었어요. 총면적 950㎡의 농민시장에서는 4000여 종류의 로컬푸드를 직거래 판매하고 있어요. 직판장 외에도 레스토랑, 허브가든, 빵가게, 지역여행사, 어린이 놀이터, 태양광발전소 등 복합시설을 함께 운영합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다보면 이 조합의 역할은 사실상 한국의 지역농협의 그것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다만 독일에서는 농민 스스로의 힘으로 자치하고, 한국은 사실상 행정이 관치하는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사업 성과의 수혜자가 독일에서는 농민에게 온전히 돌아가고, 한국에서는 농민은 소외되고 행정이나 농협이 차지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또 조합은 생산자에게 기술지도사를 통해 기술지도를 한다. 한국의 농업기술센터가 하는 일이다. 생산자는 기술지도 비용으로 연 550유로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그만큼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농민들은 생각한다. 모든 농민은 생산자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조합에서 가공·판매까지 책임지고 감당해주기 때문에 농민은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다. 생산자가 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농민들이 주인으로 자치하는 슈바츠군 농업회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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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들이 선거로 회장을 직선해 자치하는 슈바츠군 농업회의소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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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동쪽 35km 지점의 로츠홀트지역에는 농민들이 자치하는 슈바츠 군단위 농업회의소가 있다. 티롤주 농업회의소 산하 3개 지역, 9개 시군 단위 농업회의소 가운데 하나다. 오스트리아의 다른 농업회의소와 마찬가지로, 농민 기술 지도, 농업정책 지원 등 우리의 농업기술센터의 역할을 대신한다. 오히려 지자체 관할이 아니라 지자체보다 상위의 기관으로 대접받는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에는 우리의 농업기술센터 같은 기관은 굳이 필요없다.

농민은 모두 농업회의소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물론 연 40~100유로의 회비도 납부해야 한다. 업무와 책임은 어느 나라의 농정당국과 다를 바 없지만, 6년 임기의 회장은 정규 공무원이 아니라 농민들 손으로 직접 선출한 선출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오직 농민만 출마할 수 있다. 회의소의 직원은 명실공히 농업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다. 정년이 보장되는 준 공무원 신분이다. 농업회의소의 인건비 등 예산은 전액 정부에서 지원한다. 그러나 간섭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한국도 역시 농업회의소를 민관 거버넌스의 구체적 대안으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성공적인 협치를 위한 전제조건인 행정의 태도 변화는 요원하다. 상근인력의 인건비 등 예산은 지원하지 않고 시범사업만 독촉하고 있다. 행정이 기존의 '갑'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슈바츠군의 사례를 따라할 필요가 있다. 관에서 먼저 목과 어깨의 힘을 빼지 않으면 농업회의소도, 민관거버넌스도 성공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가 이처럼 농민 자치기구인 농업회의소를 전면에 내세워 구현하려는 농정의 기조는 역시 '사람 사는 농촌'이다. '돈 버는 농업'이 아니다. 농업의 규모화나 현대화가 아니라 소농, 가족농이 농촌을 떠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농촌은 온 국민의 휴양지, 농민은 온 국민의 별장지기"라는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다.

농업의 10가지 기능, 독일이 농업을 지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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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무트 트락슬러 슈바츠군 농업회의소장과 황석중 연수단지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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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트락슬러 슈바츠군 농업회의소장은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에서 본 듯한 오스트리아 전통의상을 즐겨입는다. 그만큼 농촌의 전통문화, 그리고 농부로서의 자긍심이 대단한 것이리라. 농민 출신으로 농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직선회장이다. 독일처럼 오스트리아도 농민이 농촌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있도록 지원하는 게 농정의 지상과제라고 강조한다.

"농가소득의 60%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지급합니다. 농민이 소를 기르지 않으면 나무가 무성해져 아름다운 농촌문화경관이 사라지게 되잖아요. 농민이 농촌을 떠나거나 농사를 포기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농민의 경관 유지 기능을 인정해 축산농가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 거죠."

오스트리아에서는 1ha 당 160유로, 고산지는 500유로로 차등지급한다. 경사지가 많은 산악지대로 갈수록 더 많이 지급한다. 그만큼 농업이나 주거여건이 열악해 농민들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산지대인 티롤지방은 1ha 당 800유로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황석중 연수단 지도교수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토록 농업과 농촌과 농민을 보호하는 이유가 농업의 10가지 기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도 농업과 농촌과 농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10가지 기능 가운데 한 마디라도 틀린 말이 있다면 어디 한번 찾아보라. 나는 한 글자도 찾지 못했다.  

하나, 농업은 우리의 식량을 보장한다.
둘, 농업은 우리 국민산업의 기반이 된다.
셋, 농업은 국민의 가계비 부담을 줄여준다.
넷, 농업은 우리의 문화경관을 보존한다.
다섯, 농업은 마을과 농촌공간을 유지한다.
여섯, 농업은 환경을 책임감 있게 다룬다.
일곱, 농업은 국민의 휴양공간을 만들어준다.
여덟, 농업은 값 비싼 공업원료 작물을 생산한다.
아홉, 농업은 에너지 문제 해결에 이바지 한다.
열, 농업은 흥미로운 직종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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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가지 농업의 기능이 지켜지는 독일의 전형적인 '사람 사는 농촌' 풍경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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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슈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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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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