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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시간이었다. 5모둠이 시끌시끌하다. 평소에도 의견 충돌이 많은 모둠이기는 한데, 오늘따라 언성이 더 높아지는 걸 보니 오늘도 의견이 쉽게 모이기는 틀렸다. 모둠원끼리 어른 공경 프로젝트 계획을 세우는데, 공경의 대상을 선정하는 것에서부터 의견이 갈린 모양이다.

가만 들어보니, 희진이랑 석주는 유치원 선생님들을 도와드리는 일을 하고 싶은데, 수훈이는 강경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처럼 절대 받아들일 모양이 아니다. 계획서 제출 시간은 다가오고, 그럴수록 세 명은 더욱더 자기들의 의견을 내세우기에만 바쁘다. 결국, 제출된 5모둠의 계획서에는 '유치원 선생님'이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수훈이가 양보 아닌 양보를 한 모양이다. 쉬는 시간에 책상에 엎드린 수훈이를 잠깐 불렀다.

흥선대원군 같은 수훈이?

"수훈아, 도덕시간에 의견 조정하는 게 쉽지 않았어?"

"음... 저는 유치원에는 가고 싶지 않은데요. 막 애들이 가자고 해서요. 음... 좀 짜증났어요."

"맞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이 나기도 하지. 선생님도 그러는 걸? 결국, 수훈이가 양보한 것 같던데, 이유가 뭐였어?"

"희진이랑 석주는 유치원 선생님 돕는 일에 찬성했거든요."

"그래, 모든 일들을 전부 다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때로는 양보하고 또 가끔은 욕심 부리기도 하는 거야. 이번에는 수훈이가 멋지게 양보했으니까, 한 번 모둠에서 정한대로 해보는 거야. 또, 알아?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아쉬움의 숨을 삼키는 수훈이었지만, 나의 말을 이해했는지 금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속으로 나는 이 순간이 아직은 어린 수훈이에게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수훈이는 주어진 과제도 뚝딱 잘 해결하고 공부도 곧 잘하는 한 마디로 '우등생'이다. 하지만 우등생인 수훈이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

바로, 상대를 향한 배려와 양보였다. 아마도, 우등생인 수훈이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양보하는 경험 보다는 자신의 의견이 선택되는 일들이 훨씬 많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훈이는 실패보다는 성공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수훈이는 모둠 활동에서 상대의 의견에 대해 고집스럽고 공격적인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실제로, '가만히 있어 봐', '그건 아니야', '안 돼'는 모둠 활동에서 수훈이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이었다.

나는 그런 수훈이가 모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가끔은 내려놓고 상대의 의견을 위해 배려하고 양보하는 경험을 더 많이 해보고, 그 경험이 얼마나 행복하고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내는지를 직접 경험하기를 바랐다.

의견 충돌로 어긋난 공경 프로젝트를 하나의 소중한 기회로 생각한 것도 여기에 있었다. 수훈이가 자신의 의견과는 다른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하며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수훈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뒤, 공경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도덕 시간. 5모둠은 우리 학교 부설 유치원으로 향했다. 5모둠 세 명은 각 반으로 찢어져 유치원 선생님들을 도와 선생님들에게 공경의 마음을 전달할 계획이었다. 5모둠을 포함한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학교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공경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는 바람에, 유치원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지만 유달리 수훈이가 어떻게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맞을' 수 있다는 사실

우리 반의 공경 프로젝트가 모두 종료되고, 난 유치원에서 돌아온 수훈이를 곧장 불렀다.

"수훈, 유치원 가서 뭐했어?"

"아기들이랑 놀아줬어요! 중간놀이 시간 이었거든요."

"그래, 어땠어?"

"진짜 재밌었어요. 귀엽고. 유치원 수업하는 거도 보고 신기했어요."

"어이구 잘됐네. 고생했어. 봐, 다른 친구 의견도 생각보다 재밌지?"

"네!"

수훈이의 한층 높아진 목소리와 웃음이 참 좋았다. 자신의 의견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의 의견도 얼마든지 '성공'이 될 수 있다는 낯선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지는 않았을까 싶었다. 어쩌면, 자신이 아쉬움을 삼키며 했던 배려와 양보가 새로운 성공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잠깐이나마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며칠 후에도 5모둠은 또다시 의견 충돌로 시끌시끌해졌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펼치는 수훈이가 있었다. 나는 수훈이가 며칠 만에 몇 번의 모둠 활동으로 단번에 바뀌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단지, 수훈이에게 배려와 양보를 통해 만들어지는 새롭고 또 행복한 경험의 기회를 전해주고 싶을 뿐이다. 그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미래의 수훈이를 더 멋진 친구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2015년 3월 2일부터 시작된 신규교사의 생존기를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태그:#초등학교,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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