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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걸린 오페라 <장미의 기사> 플래카드
 시내에 걸린 오페라 <장미의 기사> 플래카드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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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벨 정원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내리고 건물마다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우리는 타대우스 로팍 미술관(Galerie Thaddaeus Ropac) 옆으로 난 문을 통해 미라벨 정원으로 들어간다. 미술관 옆에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관광을 하는 여행사도 있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사운드 오브 뮤직>을 관광 아이템으로 하는 음악도시다. 음악도시이기 때문에 1920년부터 매년 여름이면 잘츠부르크 축제(Salzburger Festspiele)가 열린다.

이 축제에서는 음악, 연극, 오페라 분야에서 200개 이상의 공연이 이루어진다. 음악연주회는 모차르트 음대와 레지덴츠 그리고 축제극장에서, 연극은 돔 광장에서, 오페라는 주립극장에서 열린다. 잘츠부르크를 방문한 24일 우리는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의 연극 <예더만(Jedermann)>,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 공연 플래카드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2015년 축제는 7월 18일부터 8월 30일까지 열리고, 이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 25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미라벨 정원은 크게 네 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고 작은 화단으로 이루어진 대 정원, 장미정원, 오렌지 정원, 난쟁이 정원이 그것이다. 이들 개개 정원에는 꽃이 가득하고, 분수와 조각 그리고 나무들이 있다. 아내와 나는 먼저 대정원을 살펴본다. 이곳에는 정원 가운데 분수가 있고, 그 주변에 자연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인 지수화풍(地: Erde, 水: Wasser, 火: Feuer, 風: Luft)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다.

파리스의 헬레나 납치
 파리스의 헬레나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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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에네아스의 안키세우스 구출
 아에네아스의 안키세우스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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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
 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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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가 안태우스를 물리침
 헤라클레스가 안태우스를 물리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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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 내용이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첫째 트로이 왕자가 사랑하는 헬레나를 납치한다. 둘째 트로이 영웅 아에네아스가 아버지 안키세우스를 구출해낸다. 셋째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한다. 넷째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센 신적인 존재인 안태우스를 헤라클레스가 물리친다. 이들 작품은 오타비오 모스토(Ottavio Mosto)에 의해 1690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네 조형물 앙 옆으로 그리스 신화 속의 남녀 신들이 각각 8명씩 난간 위에 표현되어 있다. 대표적인 신이 크로노스, 주피터, 바쿠스, 아테나, 비너스 등이다. 이곳에는 또한 페가수스 분수가 있다. 이 분수는 미라벨 궁전의 서쪽, 정원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분수의 가운데 있는 페가수스는 날개 달린 말로, 잘츠부르크 성당 쪽을 응시하고 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경건한 마음으로 선행하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저 멀리 보이는 성당과 성채

미라벨 정원에서 바라 본 성당과 성채
 미라벨 정원에서 바라 본 성당과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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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대정원 남쪽으로 보면 잘츠부르크 성당과 성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이들 건물이 크고 높은데 위치하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 성당은 건물의 높이가 32m, 탑의 높이가 91m나 된다. 이 성당은 12세기 콘라트(Konrad) 폰 비텔스바흐 주교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1598년 불에 타서, 1614년부터 1628년까지 백작이자 대주교인 파리스(Paris) 폰 로드론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이 건물은 당시 알프스 이북에 건설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건물이었다고 한다. 멀리서 봐선지 탑과 돔의 꼭대기 부분만 보인다. 파리스 폰 로드론 대주교는 1622년 잘츠부르크 대학을 설립하는 등 잘츠부르크의 정신적·지적 발전을 위해 애를 썼다. 그 때문에 잘츠부르크 대학의 공식 명칭이 파리스-로드론-대학이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잘츠부르크 성당 지하에 묻혀 있다.

잘츠부르크 성당과 성채
 잘츠부르크 성당과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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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성채는 1077년 피난성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에버하르트(Eberhard) 폰 레겐스부르크 대주교 때인 1200~1246년에 성곽의 틀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 후 고딕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이 일부 가미되면서 간돌프(Gandolf) 폰 쿠엔부르크 때인 1681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803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정치적인 통치권이 상실되었고,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성채는 병영, 창고, 마구간 등으로 사용되었다.

잘츠부르크 성채는 시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상징적인 건물이어서, 잘츠부르크 관광의 상징이자 아이콘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박물관, 문화예술 교육장과 행사장, 축제장 등으로 활용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그리고 1953년부터는 매년 여름에 국제 미술 아카데미가 열려 300명 정도의 예술가와 예술애호가들이 행사에 참가한다고 한다. 이 아카데미를 처음 연 사람은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쉬카(Oskar Kokoschka)다. 

잘차흐 강변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잘차흐강에서 바라 본 구시가 풍경
 잘차흐강에서 바라 본 구시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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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벨 정원을 나온 우리는 주립극장 앞으로 해서 마르크트 광장으로 간다. 마르크트 광장 8번지에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891) 본가가 있다. 이곳 본가에서 모차르트는 1773년부터 1781년까지 살았다. 그러므로 모차르트의 잘츠부르크 생활은 25년 동안 계속되었다. 모차르트는 1781년 3월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2세의 즉위식 공연을 위해 빈을 방문했고, 1891년 죽을 때까지 빈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카르트(Makart) 다리로 이어지는 요셉 프리드리히 훔멜 거리에는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의 생가가 있다. 카라얀은 훔멜 거리 1번지에서 태어나 1926년까지 살았다. 그리고 1929년까지 빈으로 가 음악학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고향인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 지휘로 데뷔했고, 1930년 울름 시립극장의 악장으로 초빙되었다. 그 후 그의 지휘자 경력은 베를린 필 악장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이제 잘차흐 강변에 이른다. 강 주변 건물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마카르트 다리(Makartsteg)를 건너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강변 선착장에는 유람선도 보인다. 다리를 건넌 우리는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에 있는 모차르트 생가를 찾아간다.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로코코 양식의 노란색 벽은 여전하다. 이번에도 역시 너무 늦게 와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

땅거미를 뚫고 거리와 광장을 헤매다

레지덴츠 광장: 앞에 성당이, 오른쪽에 레지덴츠가 보인다.
 레지덴츠 광장: 앞에 성당이, 오른쪽에 레지덴츠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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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초인종 줄만 만져보고는, 우리는 성당, 레지덴츠, 축제극장을 보러 간다. 성당으로 가는 길에는 상가들이 즐비하다. 이들을 대충 대충 보면서 우리는 레지덴츠 광장으로 서둘러 간다. 광장 가운데 분수가 있고, 서쪽에 레지덴츠가 있다. 레지덴츠는 잘츠부르크 주교의 거처로 1120년 경 처음 세워졌고, 15-16세기 현재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번 중수와 개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레지덴츠는 1803년까지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거주했고, 그 후에는 오스트리아 황실 소유가 되어 황족들이 살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박물관, 미술관, 행정관서, 교육기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건물은 사합원 양식으로 사방에 건물이 있고, 안쪽에 중정이 있는 형태다. 그러나 건물이 워낙 커서 일반적으로 궁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당 서쪽 방향 가운데 문에 쓰인 1628이라는 글씨
 성당 서쪽 방향 가운데 문에 쓰인 1628이라는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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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남쪽에는 성당의 측면이 보인다. 성당을 돌아 서쪽 문으로 갔으나 문을 닫은 지 오래다. 세 개의 철제문 위에 보니 774, 1628, 1959라는 숫자가 보인다. 그것은 이 성당이 축성된 해를 의미한다. 774년은 잘츠부르크 성당이 완성되어 베네딕트 수도원장 주교인 비르길(Virgil)의 축성을 받은 해다. 1628년은 성당이 현재와 같은 바로크 양식으로 완공되어 대주교인 파리스 폰 로드론에 의해 축성된 해이다.

그런데 이 성당이 1944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돔과 성당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 복구와 복원작업에 들어갔고, 1959년에 이르러 원래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1959년 축성식이 있었고, 이때 악장인 요셉 메쓰너(Joseph Messener)의 '폭격미사곡'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돔 광장을 서성인다. 이곳 돔 광장에는 무대장치와 관객석이 있다. 그것은 이곳에서 축제기간 중 연극이 공연되기 때문이다.

카피텔 광장의 '발켄홀-모차르트 공'
 카피텔 광장의 '발켄홀-모차르트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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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카피텔(Kapitel) 광장으로 간다. 여기서 카피텔은 회의장이라는 뜻으로 성당 참사회 또는 총회가 이곳에서 열려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 카피텔 광장에는 커다란 황금공 위에 올라가 있는 한 남자상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잘츠부르크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독일 조각가 슈테판 발켄홀(Stephan Balkenhol)이 만들어 2007년 이곳에 설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발켄홀-모차르트 공'이라고 부른다.

공은 강화 유리섬유로 만들었으며, 지름이 5m, 무게가 2t에 이른다. 황금으로 도금한 공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남자상이 서 있다.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었으며, 청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게가 300㎏이나 나간다고 한다. 받침대부터 공 그리고 남자상까지 예술작품의 높이는 9m에 이른다. 이곳 카피텔 광장에서는 남쪽으로 성채를 바로 올려다 볼 수 있다. 그리고 광장에서는 여름 한 철 축제 행사가 열려, 천막이 처져 있는 둥 어수선한 편이다.

잘차흐강 야경
 잘차흐강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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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축제극장으로 가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생략한다. 이제 회원들과 다시 만나기로 한 모차르트 생가로 돌아간다. 광장에서 우리는 잠시 '거리의 속삭임(Street Whispers)'라는 악사들의 연주를 감상한다. 어스름 저녁 파장이라 그런지 음악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모차르트 생가에서 만난 우리 회원들은 다시 잘차흐 강변으로 나간다. 이제 어둠이 더 많이 내려 불을 켜지 않은 건물이 없다. 잘차흐강에 비친 불빛이 나의 감성을 자극한다.  


태그:#잘츠부르크, #미라벨 정원, #잘차흐강, #성당과 성채, #‘발켄홀-모차르트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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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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