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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치를 찾으러 갈 수 없었다
▲ 김치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치를 찾으러 갈 수 없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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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서 적응이 되지 않던 기숙사 아파트를 나와 월 18만 원짜리 셋방을 구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없어서 아무런 살림살이를 갖추지 못한 채 두달을 살았다. TV 하나 없는 빈방에서 혼자 생활하는 게 외롭고 힘들었지만 불편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지내던 기숙사보다 마음은 더 편했다.

스무살.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었다. 집을 떠나 구미로 올라와 혼자 살게 되기까지, 몇 달 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머니께는 내 이런 상황을 말씀드릴 수 없었다. 그냥 어머니를 걱정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내가 처음 구미로 올라올 때 취직한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잠시 지내던 아파트 기숙사를 그 회사의 기숙사라고 말씀드렸고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계절이 바뀌면서 집에 두고 온 겨울 옷들을 택배로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아들이 살고 있는 기숙사가 석적에 있는 아파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셨다. 하지만 그 일이 이후 일어난 사건의 시발점이 될 줄은 몰랐다.

어머니는 그 때 아들의 기숙사 주소를 메모 해두셨다가 겨울 무렵 손수 담근 김치를 택배로 보내셨다. 게다가 기숙사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걸 알고 계시던 어머니는 그 사람들이 다 함께 나눠먹어도 될 만큼 많은 양의 김치를 보내셨다. 하지만 그 김치가 기숙사로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그 기숙사에 살고 있지 않을 때였다.

택배로 배달온 어머니의 김치는 그렇게 어디론가 사라졌고 내 손에 들어올 수 없었다. 기숙사 바깥에 살았어도 택배를 찾으러 가면 되는 일인데 회사에 말도 하지 않고 회사까지 그만둔 뒤였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과 마주칠까 두려워 차마 그 동네로 갈 수 없었다.

어머니가 타지에 있는 아들 생각하며 고생해서 만든 김치를 그렇게 어이 없이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아니 버렸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아직도 모르신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14년이 지났지만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죄송스럽다.

남은 시간은 1년... 또 다시 백수가 되었다

용역 업체 소속으로 집에서 가까운 대기업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인력 파견 용역 업체 소속으로 집에서 가까운 대기업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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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문턱에 접어들었을 때 공단동에 있는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만두게 된 이유는 3교대 근무를 하다 보니 낮밤이 바뀌고 주말도 없는 통에 진짜 내가 해야 할 '병역 특례' 자리를 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퇴사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번에도 내 마지막 모습은 좋지 못했다. 회사에 그만두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마음먹은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그 용역회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다.

용역회사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 데다 나 같은 사람들을 계속 유지관리해서 다른 곳에 또 취직을 시켜야 그 회사가 돈을 벌게 되니 나에게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일했던 그 회사의 동료들은 나로 인해 한동안 힘들었을 거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미안하고 철없는 행동이었다. 마지막에 그렇게 나오지만 않았어도 어머니의 그 김치를 그렇게 버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병역특례를 받기 위해 구미로 올라온 지 3개월 만에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나에겐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내 보금자리가 있었다. 집도 절도 없이 모텔 방을 전전긍긍하던 그때와 달랐다.

당시 병무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자신의 입대 예정일을 조회할 수 있었다. 병역 특례를 받으려면 입대 예정일 전에 병역 특례 지정업체에 취업해서 병무청에 '산업기능요원 복무신고'를 해야 한다. 복무 신고가 된 날로부터 36개월간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하면 소집해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 나에겐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안에 병역 특례 업체에 취업하지 못하면 내 계획과 달리 군대에 가야 했다. 1년, 어찌 보면 긴 시간인데 불투명한 미래로 인한 불안감은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고 조급한 마음이 들게 했다. 그래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던 거다.

회사를 그만두긴 했는데 마냥 놀면서 병역 특례 업체를 찾을 수는 없었다. 언제 취업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또 아무 회사나 취직해서 다니게 되면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 될 게 뻔했다. 생활비 정도만 충당이 될 정도에 시간적 여유가 많고 책임감을 좀 덜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했다.

결국 나는 다시 그 용역 업체 사무실을 찾아갔다. 주말에 근무하지 않고 교대 근무를 하지 않는 곳으로 일자리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일자리를 요청하고 며칠이 지났을 무렵 용역업체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일할 곳은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모 대기업이라고 했다. 용역 업체 파견직이었지만 그렇게 나는 우리나라 1등 대기업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태그:#기숙사, #김치, #택배, #백수, #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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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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