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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선운중 학생들이 22일 '다카시마 섬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공양탑 가는 길 정비'를 위한 모금활동을 학교 내에서 시작, 25일까지 이어간다. 이번 모금활동을 준비한 선운중 3학년 배은송, 강다희, 이슬비, 정경진양(왼쪽부터).
 광주 선운중 학생들이 22일 '다카시마 섬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공양탑 가는 길 정비'를 위한 모금활동을 학교 내에서 시작, 25일까지 이어간다. 이번 모금활동을 준비한 선운중 3학년 배은송, 강다희, 이슬비, 정경진양(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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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20일 오후 11시 20분, 김태은 선운중 국어교사의 휴대폰이 다섯 차례 울렸다. 발신자는 선운중 3학년 학생 이슬비양. 깊은 밤, 학생이 교사에게 메시지를, 그것도 다섯 개나 연속으로 보낸 까닭은 무엇일까. "선생님~ 늦은 시간에 카톡 죄송해요ㅠㅠ"라고 운을 뗀 이양은 "하시마섬 관련된 모금(방법)을 찾았어요"라고 적으며 느낌표(!) 세 개를 붙였다.

학생 : <무한도전>에서 하하와 다카시마 섬에 갔던 (서경덕) 교수님 있잖아요! 그 교수님에 대해 찾아봤거든요~ 유캔스타트라는 단체와 함께 다카시마 공양탑 가는 길을 정비하기 위한 모금을 하더라고요~!!! 아직 24일이나 남았대요. 모금 마감까지~~~
선생 : 대박! (중략) 아주 멋었다. 슬비 짱!
(...)
학생 : 저도 완전 뿌듯하고 기분좋아요~~~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꾸벅).
선생 : 네가 만든 기회야.

이 두 사람, 무슨 작당모의를 한 걸까.

역사시간에 본 <무한도전>, 일이 커졌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학생들이 강제징용 희생자를 기리는 공양탑과 관련된 MBC <무한도전> 영상을 보고 있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학생들이 강제징용 희생자를 기리는 공양탑과 관련된 MBC <무한도전> 영상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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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 벽면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기리는 그림과 편지가 붙어 있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 벽면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기리는 그림과 편지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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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 앞에 놓인 조선인 강제징용 희생자를 위한 모금활동 안내판 앞을 학생들이 지나고 있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 앞에 놓인 조선인 강제징용 희생자를 위한 모금활동 안내판 앞을 학생들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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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며칠 전 있었던 역사 수업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영주 선운중 역사교사는 3학년 학생들 수업에서 '일제 강제징용 현장인 하시마 섬(일명 군함도)과 다카시마 섬'을 다룬 MBC <무한도전> 영상을 교육 자료로 사용했다. 23일 선운중에서 만난 이슬비양은 "이 영상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된 친구들이 많았고, 분노하는 친구들도 많았다"고 떠올렸다.

선운중만의 특별한 공간인 '인문공간 2037(아래 2037)'에서 어떤 활동을 할까 고민하던 이양은 "하시마 섬의 진실을 1, 2학년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어" 이것저것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무한도전>에 출연해 '다카시마 섬 조선인 강제징용 공양비'를 찾아나선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공양탑 가는 길 정비를 위한 펀딩'을 진행 중인 걸 알게 됐다.

<무한도전>이 방영한 수풀로 뒤덮여 '길 아닌 길'의 모습을 띤 공양탑 가는 길은 많은 시청자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자아낸 바 있다. 

전부터 2037에서 아이스크림을 판매해 온 이양은 점심시간 동안 아이스크림과 함께 간단한 간식을 팔아 모금액을 모으기로 결심한 뒤, '동지' 세 명(3학년 배은송·정경진·강다희양)을 모았다. 이들은 22~25일 어묵, 콘치즈, 쿠키 등의 간식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기로 정했고, 슈링클스(그림을 그려 구우면 1/7 크기의 플라스틱 작품으로 변하는 마술 종이) 체험, 희생자에게 보내는 편지 및 그림 공모전도 준비했다. 2037 벽면엔 일제 강제징용의 진실을 담은 전시물을 붙이고, <무한도전> 영상도 틀어놓기로 했다.

한편 지난 3월 선운중에 만들어진 2037은 선운중 주소인 '선운로 20번길 37번지'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공간 구상은 물론, 운영까지 학생들이 직접 맡고 있는 자율 공간이다(관련 기사 : "잠만 자던 학생, 글쓰기 시작"... 공간 바꾸면 아이가 바뀐다).

"아픈 역사일수록 더 꺼내 보듬었어야..."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학생들이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 그림을 그리고 있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학생들이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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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학생들이 조선인 강제징용 희생자 공양탑과 관련된 MBC <무한도전> 영상을 보고 있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학생들이 조선인 강제징용 희생자 공양탑과 관련된 MBC <무한도전> 영상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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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 이틀 째인 23일 낮 12시 30분, 선운중 2037을 찾았다. 입구에 "2037에서 알아보는 '하시마섬'의 진실"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놓여 있었다.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학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날 간식 메뉴는 콘치즈. 일단 장사는 '대박'이었다. 네 학생이 준비한 콘치즈 30컵은 30분 만에 모두 동났다. 미리 사둔 아이스크림 100개도 40분 만에 완판, 급히 40개를 더 사다 냉동고를 채웠다.

한켠에선 1학년 학생들이 모여 검은 종이에 강제징용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공양탑 그림과 함께 "너무 늦게 알게 돼 죄송합니다", "이젠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일본은) 하시마 섬의 강제노동을 인정하라"는 내용을 종이에 적어 벽에 붙였다.

현재 수풀로 덮인 공양탑 가는 길 대신, 미래의 잘 닦인 길을 상상해 그린 그림도 여럿 보였고, 아베 일본 총리의 얼굴이 담긴 그림도 눈에 띄었다. 박다희양을 비롯한 여러 학생들이 강제징용 희생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 붙이기도 했다.

"하시마 섬 속 사람들께. 우리가 매일 먹는 쌀알 하나하나가 당신들이 계시던 하시마 섬에선 단비 같은 존재인지 몰랐습니다. 아픈 역사일수록 더 꺼내 보듬어 줄 수 있어야 했는데 몰랐습니다. 나는 몰랐습니다…. 우리의 역사 속 당신을…. 당신의 쌀밥 한 그릇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 강제징용 희생자를 추모하는 편지가 붙어 있다.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 강제징용 희생자를 추모하는 편지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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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양은 "(학생들이) 많이 안 올까봐 걱정했는데 정말 뿌듯하다"며 "(이번 모금활동을) 준비하면서 이불 옆에 펜이랑 종이를 두고 잘 정도로 제대로 잠을 못잤는데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은송양도 "학생들이 많이 몰리고 갑자기 전자렌지가 잘 돌아가지 않아 짜증내기도 했는데 졸업하기 전에 이렇게 뜻 깊은 활동을 할 수 있게 돼 너무 좋다"고 말했다.

"점심도 못 먹었는데 괜찮냐"라는 질문에 배양은 "밥은 못 먹었지만 애들의 사랑을 먹었어요"라고 말하며 민망한 듯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정산 후 시무룩... "그래도 괜찮아!"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학생들이 조선인 강제징용 희생자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며 간식을 판매하고 있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학생들이 조선인 강제징용 희생자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며 간식을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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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모금활동에 참여한 배은송양이 간식 판매를 마친 뒤 돈을 세고 있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모금활동에 참여한 배은송양이 간식 판매를 마친 뒤 돈을 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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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모금활동에 참여한 학생들과 김태은 선운중 국어교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모금활동에 참여한 학생들과 김태은 선운중 국어교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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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이 끝나가던 이날 오후 1시 20분, 2037도 한가해졌다. 네 학생은 손을 부지런히 '넣었다, 뺐다'한 '돈통'의 뚜껑을 열어 정산을 시작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하아…. "분명히 정확히 계산했다 생각"했는데, 돈이 많이 빈다. 이틀 동안 이들이 번 모금액은 3만 1000원. 학생들의 어깨가 쳐졌다.

김태은 교사는 학생들에게 "오늘 왜 돈이 비는 걸까", "너무 정신없이 진행되니까, 내일은 줄 세울 친구 한 명을 더 섭외해보자"라고 말하며 학생들을 토닥였다. 그는 기자와 따로 만나 "학생들이 스스로 준비한 이 활동을 통해 경제적 관념을 깨닫고, 실수하고 실패함과 동시에 배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2037이 주로 3학년 학생들에 의해 돌아갔는데 그들이 졸업하기 전에 1, 2학년 학생들에게 좋은 샘플을 선보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를 기획하고 그 기획을 위한 절차를 고민해봐야 하는데, 교사가 판을 벌려놓고 '이거 해'라고 하면 학생들은 한 번도 그러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채 성인이 되고 만다"며 "이 활동이 학생들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한 학생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 관련 전시물을 보고 있다.
 23일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한 학생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 관련 전시물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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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학생들이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선운중 내 자율공간인 '인문공간 2037'에서 학생들이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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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선운중, #무한도전, #하시마, #다카시마, #공양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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