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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게스트하우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저녁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어머니가 내게 사진 하나를 보여주셨다. 사진에는 분홍색인 것 같기도 하고 보라색인 것 같기도 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와, 예쁘네요. 이게 무슨 꽃이에요?"
"철쭉이야. 여긴 한라산이고. 지금이 한라산 철쭉 철이지. 철쭉은 지금 아니면 못 봐. 며칠 뒤에 서울에서 일행이 한 명 올 거야. 한라산 오르러. 식이도 같이 갈 건데(식이는 장기수). 보름씨도 갈래?"

그렇게 해서 사장님 어머니와 함께 한라산을 오르기로 약속했고, 그날이 밝았다. 그런데 전날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다. 비가 와도 산에 오를 수 있나 싶어 장기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한라산 가나요?" 몇 분이 지나자 답 메세지가 도착한다. "가요! 가요!" 사장님 어머니는 40년 넘게 산을 타고 있는 등반 전문가이다. 그분이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갈 수 있는 걸 테다. 

9시까지 내가 그쪽으로 가기로 한 터라, 8시부터 시작되는 조식을 먹을 여유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빈속으로 등산을 할 수는 없겠기에 토스트를 들고 가면서 먹기로 했다. 귤 잼을 듬뿍 바른 토스트의 단맛을 느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다음에 오는 버스만 타면 늦을 일은 없을 거였다.

전에 말한 적이 있듯, 이날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혼이 났다. 딴 델 보고 있다가 버스를 놓쳤고, 부랴부랴 손을 휘저으며 따라가 겨우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정류장에서 딴짓했다고 면박을 들은 뒤 기가 죽은 나는 작은 목소리로 목적지를 댔다.

"세화 2리 사무소요."
"세화리가 두 군덴데. 어디를 말하는 거에요?"
"네? 아, 잠시만요…"

세화리가 두 군데라고? 나는 얼른 지도 어플을 실행하고 세화 2리 사무소 근처에 뭐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확신 없이 말했다.

"표선면?"

다행히 제대로 대답한 것 같았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버스 요금을 책정해 주었고 카드로 결제한 후 무사히 버스에 탔다.

제주에서 버스를 탈 때는 타면서 버스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해야 한다. '탐라장애인 종합복지관이요~', '가시 남동입구요~', '성산리 취락구조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처음엔 이게 너무 번거로웠다. 입에 익지 않은 정류장 이름을 대느라 몇 번씩 연습하기도 했고,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목적지의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확인한 적도 있다.

그런데 계속 타고 다니다 보니 이 방식도 꽤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탈 때 금액 책정을 마치기 때문에 내릴 때 굳이 또 카드를 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릴 때마다 주섬주섬 다시 지갑을 꺼내야 했던 서울과는 달리 그냥 가뿐히 내리면 됐다.

나는 왜 한라산을 오르는 걸까

안개 속 윗세오름 오르는 길
 안개 속 윗세오름 오르는 길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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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 윗세오름 오르는 길
 안개 속 윗세오름 오르는 길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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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지 않게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사장님 어머니는 이것저것 많이도 챙겨놓고 계셨다. 인원수에 맞춰 김밥과 과일, 그리고 초콜릿까지. 각자의 가방에 하나씩 넣어주시며 혹시 일행과 떨어졌는데 배가 고프면 먹으라고 하신다.

한 시간쯤 후에 호탕한 웃음이 매력적인 일행분이 도착했다. 말을 끝맺을 때마다 '아하하하' 웃으시는 분이었다. 그분이 그렇게 웃으면 사람들은 절로 따라 웃게 됐다. 나도 처음 보는 분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계속 킥킥거렸다. 그렇게 서로 웃음을 주고받고 있는 사이 일행은 총 6명으로 늘어났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고 있던 10살짜리 초등학생과 아이 엄마도 함께 가기로 했단다. 자, 이제 한라산으로 출발이다.

한라산 국립공원 사이트를 보면 한라산에는 7개의 탐방로가 있다. 그중 우리가 오를 영실코스는 영실휴게소에서 시작해 남벽분기점까지 가는 코스이다. 우리는 끝까진 가지 않고 휴게소에서 3.7km 거리에 있는 윗세오름까지만 가기로 했다.

한 시간을 달려 영실휴게소에 도착했다. 산에 오르기 전 각자 마지막으로 등산 준비를 했다. 나는 가방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사장님 어머니가 챙겨주신 먹을거리와 물을 확인하는 게 다였다. 사장님 어머니와 일행분은 완벽한 등산복 차림이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등산용품이었다. 멋진 지팡이까지!

반면 나는 영 형편없는 복장이었던 것 같다. 사장님 어머니는 내가 입은 반바지를 보더니 왜 옷을 이렇게 입고 왔느냐며 나무라신다. 위로 올라가면 분명 추울 거라고. 산을 오를 땐 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한다고.

그러게, 긴 바지라도 입고 올 걸 왜 반바지를 입고 온 걸까. 그런데 막상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반바지를 입고 오길 잘한 것 같기도 했다. 겨우 십여 분 걸었을 뿐인데 땀이 삐질 나기 시작한다. 옆에서 걷던 장기수도 (어머니 말을 듣고) 괜히 긴 바지를 입고 왔다며 연신 덥다 투덜거린다. 비교적 완만한 산길이 얼마간 이어졌다. 그러다 한순간 진짜 산행이 시작됐다.

넘어지지 않게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바위나 나무뿌리 등에 손을 짚어가며 산을 오르는데, 문득 내가 왜 한라산을 오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원래 등산을 싫어하는 데 말이다.

원래도 등산을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미련을 깨끗이 버리게 된 건 5년쯤 전에 관악산을 오르고 나서였다. 그때 발을 된통 삐었다. 능숙하게 산을 타는 일행들의 속도에 맞추려고 무리를 하다 그만 발을 헛디딘 탓이었다. 사람들이야 앞서가든 말든 속도에 맞게 천천히 오르면 될 일이었는데 괜한 일을 만든 거였다.

털썩 주저앉은 나를 사람들이 일으켜 세웠다. 결국 일행 중 몇 명은 제대로 산을 타지도 못하고 나 때문에 중간에 내려와야 했다. 이 일 이후로는 다시는 산을 타지 않았다. 그리곤 간혹 사람들이 산에 오르자 하면 '등산이 싫다'며 끄떡하지 않았다.

안개 속 윗세오름 가는 길, 바위 무더기 위를 걸어야 했다
 안개 속 윗세오름 가는 길, 바위 무더기 위를 걸어야 했다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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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왜 한라산을 오르고 있는 걸까. 오름 때문이다! 오름 정상에 서서 내려다보는 제주가 좋았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제주는 내가 알던 제주보다 더 아름답고, 광활하고, 정이 넘쳤다. 오름의 맛에 제대로 빠져든 것이다.

그래서 한라산을 오름의 형쯤으로 생각하고자 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을 오르며 용눈이 오름, 아부 오름을 연상했다. 어렸을 적에 한라산을 오른 적이 있었음에도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막연히 생각해버린 것이다. 그저 오름 정상에 서는 기쁨을 또 한번 느끼고 싶어 허리만큼 올라오는 바위들에 몸을 의지하며 한라산에 오르고 있는 거였다.

그렇게나 싫어하던 것을 이렇게나 대책 없이 다시 하는 걸 보니, 싫고 좋고 따지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좋다가도 싫어지고, 싫다가도 좋아지는 걸. 나는 매번 그렇게 좋고 싫고를 확실히 따지며 기호를 분명히 해왔다.

바보 같은 나를 슬쩍 비웃으며 커다란 바위에 손을 얹으려는데 갑자기 또 다리가 삘 것 같았고 혼자 뒤처지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하지만 바위 위로 몸을 올리며 곧 부질없는 생각과 감정을 몰아냈다. 뒤처지면 뒤처지는 대로 올라가면 그뿐이라는 것, 산을 타는 자세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장기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씨, 힘들다. 힘들어. 내가 왜 여길 따라왔지. 누나. 난 오름도 오르기가 싫다고요. 그때 누나랑 올랐을 때가 처음 오른 거에요. 내가 제주에 쉬러 왔지 운동하러 왔나. 아, 힘들어. 아, 정말.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뒤따라오던 그가 뒤통수에 대고 뜨거운 입김과 함께 힘들다며 노래를 불렀다. 덩치가 큰 장기수는 움직이는 걸 딱 질색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왜 한라산을 오르기로 결심한 걸까. 아무래도 사장님 어머니의 꼬임에 넘어간 게 분명해 보였다.

장기수에겐 미안했지만 그가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뒤처져도 그만이지만, 오늘은 뒤처질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보다 한술 더 뜨는 친구가 뒤에서 저리 투덜대며 올라오고 있으니.

안개 속 한라산의 아름다운 정취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철쭉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철쭉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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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들에 눈이 쌓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 나무들에 눈이 쌓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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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어머니와 일행분은 안 보인지 이미 오래 됐다. 10살 아이와 엄마도 초반엔 속력을 내다 나중에는 우리와 함께했다. 어느덧 해발 1500m 지점에 이르렀다. 조금만 더 가면 윗세오름이라는 생각에 힘이 솟는다.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던 우리 네 명은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장기수는 사진기를 꺼내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의 특히 구상나무를 보며 "겨울에 오면 정말 죽이겠다!"라는 말을 열 번 정도 내뱉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겨울에 오면 끝내줄 것 같은 아름다운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 길목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길목의 모습이 바로 이러할 것 같았다. 이색적이고 찬란하며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독특한 한라산만의 정취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나올 수 있는 원인의 8할은 안개 때문인 것 같았다. 안개 덕에 방금 머리를 감고 나온 것처럼 머리카락이 축축해지긴 했지만 보는 즐거움이 찝찝함을 훨씬 앞섰다.

생전 처음 보는 식물들에 놀라 구경을 하다 저기 저만치에 피어있는 철쭉을 발견했다. 한라산에선 6월 중순까지가 철쭉 철이다. 당시 철쭉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며칠인 것 같았는데, 안개 때문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홍빛 철쭉을 마음껏 보지는 못했다. 올라오다 군데군데 피어있는 철쭉을 본 게 다였다.

몸의 힘듦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찔한 분위기와 절경은 계속 이어졌다.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안개는 바람에 계속 휘날렸다. 우리는 그 안갯속을 별말 없이 걸었다. 얼마간 걷다 위를 올려다보니 저 위에서 사장님 어머니와 일행분이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에 재회한 우리는 쉼터에 서서 과일과 초콜릿을 꺼내 먹었다. 산 중턱에서 안개에 갇힌 채 아삭한 사과를 씹고, 달콤한 초콜릿을 녹여 먹는 맛은 정말 설명할 길 없이 좋았다.

그렇게 조금씩 위로 오르고 오르다 보니 어느새 윗세오름에 도착했다. 이곳에도 역시 안개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안갯속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도 가득했다. 우리도 그들 속에 끼어 밥을 먹기로 했다.

초등학생 아이 엄마가 쏜 컵라면을 각자 들고 대피소 밖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사장님 어머니가 준비해준 김밥을 뜨거운 라면 국물에 푹 찍어 먹는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사람들이 등산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정상에서, 또 때로는 산 중턱에서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조금 힘이 들기는 하지만 이 맛 때문에도 가끔은 등산을 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김밥도 맛있고, 라면 국물도 끝내줬는데 점점 힘이 빠졌다. 라면을 먹는 팔이 후들거렸고, 반바지 아래의 맨 다리도 덜덜덜 떨렸다. 어떻게 아셨는지 사장님 어머니가 커다란 수건 하나를 주셔서 그걸 다리에 덮으니 그나마 좀 나았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조금 괜찮다 싶었는데 추위는 점점 더 심해졌다. 나처럼 반바지를 입고 온 10살 아이는 울음을 터트릴듯한 표정을 짓더니 엄마랑 함께 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완전 새파래. 곧 얼어 죽을 얼굴이야"

윗세오름에서 본 까마귀
 윗세오름에서 본 까마귀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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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안개가 가득했던 주위가 순간 맑아졌다. 그제야 저 위 한라산 정상이 보였다. 기다렸단 듯이 사람들은 사진기를 꺼내 들고 한라산의 속살을 사진기에 담느라 바삐 움직였다.

사람들이 한라산 경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까마귀를 쳐다보고 있었다. 까마귀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훈련된 조교를 연상시켰다. 누군가 과자를 던져주자 그걸 받아먹기도 했다. 그렇게 잠시 까마귀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주위는 다시 안개로 덮여버렸다.

그때 내 얼굴을 본 사장님 어머니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재촉한다. 그리고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 자기 얼굴 어떤지 모르지? 완전 새파래. 곧 얼어 죽을 얼굴이야."

이제는 온몸이 다 떨리고 있었다. 나 때문에 내려가게 되는 건 싫었지만 괜찮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말 너무 추웠다. 부디 다른 사람들은 한라산을 나처럼 얼렁뚱땅 오를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을 타려면 무엇보다 옷은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한다.

어느 정도 내려가니 추위도 가시고 우리는 여유롭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려가면서 아이 엄마와 나, 그리고 장기수는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역시 가장 젊은 장기수의 사랑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아무렴, 사랑하기에 참 좋은 나이 아닌가. 그런데 장기수는 사랑 이야기를 하다 말고 우리 두 누나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않은 채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연애고 사랑이고 뭐고 세계 여행이나 떠나고 싶단다. 뭐, 이런 재미없는 마무리를.

장기수에게 사랑 이야기를 더 해보라며 채근하는 아이 엄마의 말에 강력하게 동조하며 속으로 반성했다. 나 역시 연애고 사랑이고 뭐고, 지금껏 다른 것에 더 눈독을 들이며 살아오지 않았나. 그래서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별로 재미있어 하지 않았구나! 역시, 연애고 사랑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다섯 시간에 걸친 한라산 등반이 끝났다. 올라갈 땐 기운이 펄펄 났던 10살 꼬마는 힘이 들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땠냐고 어른들이 물어보니 씩 웃으면서 좋았단다. 아이의 웃음을 보고 어른들도 크게 웃었다. 등산은 끝났다. 이제 또 모두 제 갈 길을 갈 일만 남았다.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개인블로그에도 중복게재합니다.



태그:#제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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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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