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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광운대학교에서 열렸던 '법륜스님 & 김제동의 청춘콘서트'에 다녀왔다. 지난해 청년학교를 하면서 법륜스님의 책들을 (게으른 정신 탓에 정독까진 못했지만) 훑어보게 됐고 법륜스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특히나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될 청년들을 위한 활동들을 많이 하고 계시는데 아주 감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 청년학교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열렬한 법륜스님의 팬이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김제동 역시 텔레비전을 돌리며 '톡투유' 등을 가끔 보면서 '그냥 연예인, 개그맨이 아닌 김제동이기에, 인간에 대한 진실된 정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프로그램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두 분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시간이 맞아 떨어졌고 말로만 듣던 청춘콘서트에 다녀오게 된 것이다.

이날 청춘콘서트의 테마는 '여행'이었다. '행복의 나라로 오세요'가 슬로건이었고 캐치 프레이즈는 '행복의 나라로 놀러와, 마음껏 웃고 꿈꾸고 사랑하자'였다. 입장권 역시 '오청춘'이란 이름의 (모든) 청년에게 발행된 비행기 티켓 모형이었다. 행복의 나라행 비행기를 타고 행복의 나라에 놀러가자는 의미였다.

이날 법륜스님은 '행복원로'로서 청춘들의 질문을 듣고 즉문즉답을 해주셨다. 항공정비사가 되려고 전공을 하고 있는데 나중에 자기 적성과 맞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된다는 대학생의 고민을 시작으로 친정 어머니와 남편과의 더 나은 관계를 원한다는 얘기까지, 여러 고민들이 나왔다. 법륜스님의 말씀에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 공통된 기반이 있었다. 긍정적 사고 방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항공정비사가 되고 보니 이게 내 길이 아니라서 (예를들면) 가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어려서부터 가수를 할 수 있었더라면 발휘했을 100의 기량은 발휘하지 못하겠지만, 80만 발휘하더라도 나머지 20은 항공정비사를 했었던 그 경험과 배움으로 채울 수 있다. 그런데 그 20을 거기서 채우지 않고 100 모두 가수로서 채우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려 놓아야 할 '욕심'인 것이다. 참 맞는 말씀이셨고 나도 동의했다. 그러면서 법륜스님은 이어 말하셨다.

"사람은 원하는 것을 성취해낼 때 행복함을 느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성취할 수는 없다. 100명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데 100명이 다 대통령이 된다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겠나.

10명의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하고 원하는데 어떻게 10명의 남자가 여자 한 명을 나눠 가지겠나. 그렇기에 우리는 원하는 것을 다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신 이렇게 생각해보자. 나는 이 여자와 백년만년 사랑하고 싶은데 이 여자가 나에게서 떠나갔다. 슬프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나는 다른 수많은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생긴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떠난 여자친구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할 일이다.

내가 만약 내 스스로 이 여자를 버리고 다른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다면 나는 바람둥이라고 욕 먹었을텐데 여자가 먼저 떠나줬기에 내가 다른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냐."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바라보지 말고 다른 시점에서 바라볼 줄 아는 눈을 키우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렇게 스님은 '이미 일어나버린 현상, 주어진 환경, 삶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옳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든,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을 생각하며 만족할 수 있다면, 그렇게 장점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다면 불행해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불행해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 행복하단 뜻이 될 수 있을까. 불행의 부재가 행복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스님의 말씀 속에 있는 한계가 보였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 사회의 한계. 나는 부모님께서 맨날 싸우고 별거까지 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는데 그러니 내 남편과 알콩달콩은 바라지도 않고(욕심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는 것.

나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회 속에서 자랐으니 더 나은 건 바라지도 말고 더 비극적인 사회가 아닌 것에 감사하며 살자는 것.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한계까지 볼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는 없다"는 그 비극적인 사실. 그러니 그냥 내가 어떤 것을 성취하지 못했더라도 그것에 역시 장점이 있기 마련이니 장점을 보며 만족하자는 것. 어떤 면에서 보면 그 합리화와 포기가 우리를 행복에 조금이나마 더 다가갈 수 있게 해 주는 방법이라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아이러니인가.

그 아이러니가 이상했다.

새장에 갇힌 새가 떠올랐다.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만약 자유로운 새장 밖의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죽어버릴지 모른다. 절대 새장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새장 안을 바라보기로 한다.

"새장 속에는 물도 있고 밥도 놓여져 있지. 앉아 쉴 수 있는 나무도 있어."

그래서 새는 행복하다고 믿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새는 정말로 행복하게 살다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진짜 행복인지 모른다. 새는 정말로 행복하다고 믿었고 행복하게 살다 죽었으니까. 하지만 새장 바깥에서 새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가슴이 쓰리다. 새는 행복하게 살다 죽었는데, 왜 가슴이 쓰린 걸까.

새의 입장에서는 절대 극복할 수 없을 '새장 탈출'이라는 이 한계 자체가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행복한 줄 알고 살다 죽지만 이야기 자체는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그런 아이러니한 동화가 있다면, 그 동화는 희극일까 비극일까. 

거기에 더해 만에 하나라도 새장 속 새마저도 그 아이러니를 인지하게 된다면, 그 새는 '불행이 없는 삶'을 살 수는 있지만 절대 행복할 수도 없다. 자신의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아이러니를 스스로가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자에게서 이와 관련될 수 있는 질문이 나왔다. 스님께서는 좋은 일들을 하고 계시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스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장 청년들의 여드름을 짜주며 눈 앞의 단순한 문제들을 치유하는 것뿐이지 여드름이 생기는 그 원인, 그 근본을 고치고 계시지는 않는것 같다는 말이었다. 물의 모양을 바꾸기 위해선 물이 담긴 그릇을 바꿔야 하는데 그릇을 바꿀 생각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실제 비유였다).

스님께서는 왜 지금 당장 여드름을 짜주는 것 역시도 중요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질문자가 스님의 <새로운 백년>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는 것일 수 있는데(장난 반 사실 반), 스님도 사실 단순한 현상뿐만 아니라 거시적 변화를 위한 활동들 역시도 계속하고 계시다고 하셨고 나 개인적으로 역시 스님의 말씀에 동의했다.

거시적인 목표만을 위해서 이상적인 활동만을 할 순 없다. 당장 눈 앞의 치료해야 할 문제들도 함께 해결하면서 해야 그 효과가 더 커진다는 데도 동의했다. 그에 덧붙여 스님께선 그렇기에, 물이 담긴 그릇(사회)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들이 힘을 합쳐 투표를 해야 한다고 하셨고 타당한 논리였다.

그러면서 우리 20대 청년들이 해내야 할 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가셨다. 시대적 과제가 왜 있는지, 왜 중요한지, 왜 해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아직 공부를 많이 해보지 않아 나는 어떤 판단을 섣불리 내리고 싶지 않지만 대부분의 말씀에 동의했고 그런 조언들에 감사했다. 

일제 치하에 있을 당시 독립투사들은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역할을 해냈다. 민주화를 위해 우리 부모세대는 목숨 걸고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우리는 목숨을 걸 필요도 없다. 그만큼 좋은 시대로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대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평소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지켜보며 옳은 판단을 내리고, 총·칼·목숨이 아닌 엄지 손가락 하나만 들고 투표장에 가 투표를 하는 것 뿐이다. 또한 우리의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잘 파악해보고 그에 따르는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셨다.

다 맞는 말이다. 청중들이 동의한다는 뜻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그런데 나는 왜 여전히 우리의 한계가 처절하게 느껴지고 스님의 이 맞는 말씀들에도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던 걸까. 스님께 여쭤보고 싶었다.

손가락 밖에 요구하지 않는 투표, 당연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우리들의 삶은 너무나 절박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는데 청년이 되고 보니 우리 사회는 이미 이렇게 돼 있었고, 이 모든 잘못된 현상들을 인지하고 지켜보고 행동하기에는 눈앞에 주어진 우리의 하루가 너무나 가혹하고 우리의 한계는 너무나 명확하다.

당장 이 강연이 끝나고 나면 (나를 포함해) 여기서 스님 말씀에 동의하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우리 청년들 모두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날 학교로, 직장으로, 아니면 백수로서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학교에서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교육, 우리의 역사조차 힘 있는 세력에 의해 왜곡된 교육을 받고, 인간성을 없앤 경쟁에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직장에서는 불합리함에 침묵하는 것이 사회인으로서의 역할임을 배우고 과도한 업무량과 기계적인 일들에 깔려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는 호사가 된다. 백수들은 모든 걸 다 떠나 당장 오늘 입고 먹을 걱정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자신들의 잘못인 듯한 주변의 시선을 견뎌내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쓰는 이 사회 속에서 여전히 배고프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심지어 많은 것들이 잘못됐다고 인식할 수 있는 시간조차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하나가 되고 우리의 시야가 더 넓어졌다고 믿게 해 준 인터넷, 시간 날 때면 들여다보는 스마트폰 속 세상조차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장악당했고 굴복당한 미디어들의 거짓되고 왜곡된 정보는 '사실'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세뇌시키고 머리를 마비시킨다.

그렇기에 이렇게 옳은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모으는 시간이 중요하다지만 당장 이 강연장에 온 우리 모두는 내일이면 살아남기 위한 전쟁터 속으로 돌아가 생존을 위해 허덕여야 하는 힘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곳에 우리 말고, 국회의원 혹은 재벌가 자녀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온 사람이 있을까. 이것이 너무나 답답한 우리의 한계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데 스님께선 말하고 계신다. 긍정적 사고를 가지고 바라보라고. 이 모든 시니컬한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옳은 말씀임에는 변함이 없다. 긍정적 시선을 가지지 않으면 새장 속의 삶은 너무나 비참하고 힘겨울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욕심을 버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 힘들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불행의 부재를 위한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을 얻는 방법 또한 아니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법륜스님 다음으로 김제동이 '행복장관'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저는 김제동보다 훨씬 어리지만 '씨' 호칭을 붙이지 않겠습니다 미리 죄송합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관계와는 다르게 연예인들은 특이하게도 이름 뒤에 '씨'를 붙이면 뭔가 더 친근한 느낌이 들어 버려서 제가 친근하게 부르는 걸 싫어하실 수도 있으니 존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김제동은 특유의 입담과 재치, 그만의 통찰력을 담은 적절한 사회 풍자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시종일관 웃음이 터졌고 유쾌했고 때론 가슴 아프기도 했다. 진실된 말과 입담으로 청중들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그 역시 후반엔 통일에 대한 우리 청년들의 시대 과제에 대해서 말했고 그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지금 우리 청년들이 통일을 통한 세대적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설득했다…라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는데 다 아주 타당했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 세대적 자부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면, 김제동은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 다들 그들만의 세대적 자부심이 있는데 우리 20대는 이 시대에 무언가를 이뤄냈다는 세대적 자부심이 없다. 개인적 고민들에 허덕이느라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들이 그걸 해내야 할 때다. 나는 사실 여러분들 덕분에 이제 돈도 많이 벌었고 인기가 있다면 인기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자꾸 TV에 나오고 그러는 이유는 이 자리에 있기 위해서다. 여러분들이 내 말을 들어줘야 하니까. 계속 영향력 있는 사람이어야지 이런 자리에도 있을 수 있으니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의 말 대부분에 동의했고 자신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청년들을 향한 그의 노력에 감사했다. 나 역시 다른 청중들과 함께 뜨거운 박수를 치고 그의 말에 환호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역시 그럴 수가 없었다.

법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처럼 우리의 한계에 대한 답답함이 갈수록 커져만 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두분 다 자세하게 재미있게 조리있게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주셨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책임감 있는 투표를 하는 것이란 것도 알고 있다.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고 우리의 시대적 과제에 대해 공부하고 행동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하는 이 가혹한 현실은 누가 책임질 수 있는가?

김제동의 말대로, 그는 데이트 비용도 벌었고, 자신이 원하는 토크를 하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돈을 안 받더라도 이런 자리에 나와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들을 전달하려 애쓰고 소통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청년들은, 어려서부터 잘못된 교육을 받아왔을 뿐 아니라 그 거짓과 진실이 얽히고 설킨 넘쳐나는 정보들에 뒤덮여 있는 데다가 당장 데이트는커녕 먹고사는 문제조차, 하루 하루를 살아남기조차 힘든 삶 속에 놓여있다. 김제동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 세대에게는 시대적 과제를 이뤄낼만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는데" 어떤 여유를 어디서 가져와서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고민해보고 그것을 위해 힘쓸 수 있을까?

비판적이게 들릴 수도 있으나 사실 비판이 아니다.

답답해서 그런다. 나도 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고 힘쓰고 싶다. 아주 많이.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되묻는 거다. 정말로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김제동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 예전 어떤 강연에서도, 청년들이 자신들에게 딱 한마디만 하라고 한다면 어떤 말을 하겠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고. 여기 모인 우리 청년들에게도 그 말을 하고 싶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럽다 새끼들아(사과)."

이 모든 비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겐 젊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에 부럽다 이 젊은 청년들아. 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청년 중 하나인 나는, 박수와 환호를 내지르기는 커녕 답답함의 돌덩이가 목에 꽉 막힌 것만 같았다.

법륜스님은 불경의 부처에 대한 한 구절을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내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글을 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메모를 해놓지 않아 안타깝지만 정확하게 기억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의도는 이런 것이었다. 행복은 달성 했을 때 얻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행복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 속에서 이미 나는 행복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 모두 행복하자고.

이 결론 역시 여지껏 법륜스님이 말씀하신 그 긍정적인 사고로 바라봤을 때 존재했던 행복이었다. 여전히 맞는 말씀이지만 갇힌 새장 속에 있어야만 했던 우리들의 그 한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해결이 가능은 할까. 여전히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이 새장은 작게 보면 우리 사회, 크게 보면 (모두가 원하는 걸 다 이룰 순 없다는) 우리 인간의 한계다.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고 노력하는 그 과정이 행복이라는 것, 원하는 걸 다 이룰 순 없다는 인간의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노력하는 그 과정이 행복이라는 것. 그렇게 믿고 그 과정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 그건 우선 행복할 수 있으니 옳은 말이지만 한계 속에서의 행복일 뿐이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비극이란 말인가.

강의가 끝날 때까지 계속 질문을 하고 싶어 기회를 엿봤으나 시간은 너무 짧았다. 게다가 청중들은 법륜스님과 김제동의 말에 환호했고 정말로 행복하게 보였다. 한 마디라도 더 이들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청중들을 방해하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나는 정말 묻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한계에 대해서, 비극적 아이러니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합리화 하는 방법, 그래서 자살하지 않고 행복하게(믿으며) 살아나가는 방법은 이미 많이 말해주셨고, 우리가 미래를 짊어진 대한민국의 청년으로서 어떤 의식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지도 충분히 말해주셨고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당장 우리의 현실, 가혹한 하루 속에서 우리의 한계를 마주하면서도 어떻게 행복할 수 있고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정말 다 좋은데요, 저희는 지금 당장,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그걸 가르쳐주세요."

'이걸 왜 이분들에게 물어, 니가 그동안 열심히 안 살았나보네' 하고 생각하는 청년들도 있을 수 있고, '저게 모든 청년의 마음은 아니야! 나는 잘 살고 있어!' 하는 청년들도 있을 수 있다. 나도 내 심정이 모든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역시 대한민국의 청년 중 하나다. 특히 우리나라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이 대한민국 땅에서 잘 살아보고 싶어하는 청년이다. 다른 나라로 가 아예 새로운 시작을 하려 하는 젊은 청년, 부부들도 심심찮게 봐왔고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잘 살고 싶다. 게다가 그냥 잘먹고 잘 살고 싶은게 아니라 꿈을 쫓으며 살고 싶다. 난 실제로 가진 것 없어도 아직까지 꿈 하나만큼은 확실히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부자 청년이다. 그렇기에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다고 감히 생각한다.

매일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한다. 매일 현실을 보고, 한계를 보지만 또 마음먹기에 따라 진정한 행복도 보면서, 그 아이러니를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하루 하루를 살아나간다. 그렇기에 이 부분에 대한 법륜스님과 김제동의 의견을 조금이라도 들어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이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묻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위안을 바랬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한계와 현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 또 스스로 더 열심히 그 해결방안을 찾아보자고 말해줬더라면 이렇게까지 비극적인 현실의 돌멩이로 목구멍을 꽉꽉 채운 것 같은 느낌은 조금 덜 들지 않았을까. 조금이라도 더 힘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

토크 콘서트는 요술당나귀라는 밴드와 청년 자원봉사자들이 나와 모두 함께 율동에 맞춰 '행복의 나라로 놀러와'라는 노래를 부르며 끝났다. "다들 조금은 더 행복해지셨죠?" 하고 밝게 묻는 사회자에게 우렁차게 "네!" 하고 대답하는 청중들 사이에서 나는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청춘콘서트를 비난하려 한다거나 법륜스님, 김제동이 이상적인 말만 하고 있다고 비판하려는 목적이 전혀 아니다.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꼈지만 그저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했고 질문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혹시 이렇게 글이라도 쓰면 그분들께서 읽어주시지 않을까 해서 쓰게 된 거다. 좋은 시간이었다. 오후 7시에 시작해서 오후 10시가 넘어 끝난 긴 시간이었지만 온갖 생각들을 해보느라 지루할 새가 없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좋은 말들을 해 주시는 법륜스님과 김제동의 청년들을 향한 애정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공연장을 나오며 친구들에게 "누구 술 먹고 있대. 그쪽으로 가자"는 대학생들, "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며 전화를 하는 학생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틀린그림맞추기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청년을 보았다.

저녁도 안 먹었기에 집에 가는  길에 두유라도 사먹어야겠다 생각했다. 편의점에서 900원짜리 두유를 사서 빨대를 입에 물었다. 허기진 배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며 행복함을 느꼈다. 진심으로! 그러나 동시에 이 작은 하나에 행복을 느끼는 내 자신이 씁쓸한 것 또한…,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는 여전히 어렵기만 하고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 아이러니와 현실의 한계를 온 몸으로 받으며 내 앞에 놓인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청년이다. 


태그:#청춘콘서트,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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