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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본 총리가 추진하는 전쟁 법안에 대해 일본 시민 사회는 '아베 퇴진'과 '전쟁 반대'를 외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안보 투쟁 이후 일본 사회에서 처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일본 시민 사회도 놀라고 있습니다.

코리아연구원은 전쟁 법제를 반대하는 일본 시민 사회의 움직임과 이의 배경이 되는 일본의 전쟁 법안 및 전후 일본 정치사에 대해 이영채 일본 게센여학원대 국제사회학과 교수의 글을 2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일본 시민 사회의 움직임은 한반도의 평화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 기자 말   

일본 시민 사회가 '전쟁법안'과 아베 정권에 대해 폭발했다. 지난 8월 30일 참의원에서 심의 중인 안전보장관련법안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항의 행동이 있었다. 일본 전역에서 모인 약 12만 명의 사람들은 도쿄 나가타쵸의 국회의사당 앞과 주변을 가득 메웠다.

나가사키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 고베에서 신칸센을 타고 온 사람, 유모차 탄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고등학생 및 대학생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전쟁법안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국회 앞에 모여 들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집회였지만, 1시에는 경찰의 저지선이 무너졌고 국회 정문 앞 도로로 대중들이 진출했다. 일본에서 대중이 국회 정문 앞으로 진출한 것은 1960년대 안보 투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국회 정문 앞으로 진출한 일본 대중

공식 행사에서는 4개 야당 대표들의 연대 선언, 저명한 평화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연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SEALDs : 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의 전쟁법안 반대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같은 시간 일본 전국 300여  곳에서 '전쟁법안 반대, 아베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 행동이 공동으로 진행됐다. 사회자는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12만이 모였습니다. 전국에서 100만이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해냈습니다. 전쟁 반대! 아베 반대!"

항상 침묵하고 지켜만 보던 부동의 일본 시민 사회가 드디어 전국적으로 일어선 것이다. 혁명은 아니더라도 혁명적인 순간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한 이러한 전국적인 저항에도, 아베 내각의 퇴진과 안보 법안 폐기는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안 성립 이후에도 이러한 저항 운동이 쉽게 사그러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시점에서 왜 일본 시민 사회는 침묵을 깨고 일어난 것일까? 대중적인 저항에도 아베 내각은 왜 일방적으로 안보 관련 법안 성립을 멈추지 않는가? 이러한 대립 정국 속에서 발표된 전후 70년 아베 담화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하나 하나 간단한 질문들이 아니다. 일본 사회의 정치적 변화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운명과도 깊게 연관되어 왔다. 현재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 전개 방향을 주시하는 것은 한국 시민 사회에도 중요한 과제다.  

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실패와 아베 정권의 등장

지난달 30일 오후 일본 국회의사당 주변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추진하는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몰려 시위를 하고 있다. 경찰이 버스로 차 벽을 만들어 시위대가 국회 의사당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오후 일본 국회의사당 주변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추진하는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몰려 시위를 하고 있다. 경찰이 버스로 차 벽을 만들어 시위대가 국회 의사당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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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내각은 일본의 보수 정치 지형으로 보면 극우 보수에 가깝다. 제2차 아베 내각의 등장은 결국 전후 일본 정치 세력 중에서 혁신 세력 및 중도(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약화가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후 일본 정치를 지배한 것은 소위 '55년 체제'다. 1955년에 사회당 좌우파가 통합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재계 및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자유당을 통합해 자유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국회에서 40여 년간 절대 다수를 유지해왔다. 

1993년 신당 연합인 호소카와 정권에 의해 정권을 잃은 자민당은 사회민주당과 연립정권을 성립해 집권당에 복귀했다. 1996년에는 하시모토 내각을 성립함으로써 수권 정당으로 다시 등장했다. 하지만 재집권한 자민당의 보수주의는 정치 및 경제 개혁의 한계에 봉착했다. 그러자 2001년 자민당 내의 비주류에 속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지지했다. 고이즈미는 "자민당을 부수겠다"는 말로 집권에 성공했다. 이로써 보수 정권은 다시 한 번 연명할 수 있게 됐다. 

고이즈미 내각은 우체국 민영화 등 개혁적 이미지를 부각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 노선을 표방하면서 빈부 격차를 가져왔으며, 일본 정치의 고질적 문제인 관료 정치와 재벌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고, 집권 5년간 야스쿠니 신사를 매년 참배하는 등 실질적인 보수 우익 노선을 표명하며 아베 정권 등장의 길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90년대 냉전 붕괴 및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 후 사회당 및 공산당 세력의 약화 속에서 호헌 세력의 축이 무너져 내렸다. 고이즈미 내각 성립 이후 자민당 내의 중도 보수 세력의 약화 및 우경화가 뚜렷해졌고, 자민당 내 우익 세력의 성장은 두드러졌다. 2006년 9월,고이즈미 정권의 토대 위에서 등장한 제1차 아베 내각은 기다렸다는 듯 '전후로부터의 탈각'을 주장하면서 헌법 개정을 통한 전쟁 이전으로의 복귀를 표명했다.

제1차 아베 내각은 준비도 되지 않은 추상적인 헌법 개정 정책으로 야당 및 일본 시민 사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게다가 고이즈미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후유증을 받아안았다. 결국 제1차 아베 내각은 붕괴했다. 이것으로 자민당의 보수주의 정치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일본 국민은 강한 정치 지도자를 원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4일 오후 도쿄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전후 70년에 관한 역사인식을 반영한 담화(일명 아베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4일 오후 도쿄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전후 70년에 관한 역사인식을 반영한 담화(일명 아베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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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을 대체하는 일본 보수 정치는 오자와 이치로 등 자민당에서 탈당한 자유주의 보수 세력, 센고쿠 민주당 간사장 등 사회당에서 탈당한 혁신 세력, 그리고 칸 나오토 등 시민 운동 그룹이 결합한 민주당으로 헤게모니가 넘어갔다. 민주당은 집권 자민당을 심판하자는 논리로 2009년 역사적인 야당으로의 정권 교체를 이루고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을 성립했다.

하지만 하토야마 내각은 국민의 높은 기대에도 오키나와의 후텐마 기지를 헤노코로 이전하려는 계획을 백지화하고 현 외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끝내 지키지 못해 조기 붕괴했다. 하토야마 내각의 실패에는 외무성을 비롯한 친미파 관료의 방해의 영향도 컸지만, 천안함 침몰 사건의 한반도 상황 등 외부적 영향도 컸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은 자민당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온 공공 사업을 중지하고, 빈곤 격차 해소와 복지정책을 확대하려고 노력하는 등 정책의 전체 방향성은 타당했다. 하지만 무모한 재정 계획과 추상적인 정책 내용들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게다가 2011년 3월 11일 촉발된  국가 위기적 상황(대지진, 쓰나미, 방사능피해)에서 총체적인 정권 운영의 무능함을 보여 국민의 실망을 넘어서 강한 반발심을 불러 일으켰다.

잃어버린 경제 20년, 3.11 이후의 국가적 위기 사태의 봉착, 사회당 및 공산당의 혁신 세력의 붕괴, 자민당 내의 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개혁의 한계, 민주당의 중도 보수 세력의 무능력과 집권 실패는 일본 국민으로 하여금 강한 정치적 지도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토대 위에서 제1차 내각의 실패에도 아베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보수 우익 세력은 "강한 일본을 되찾겠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다시 자민당으로 정권 교체를 이뤘다.

일본의 국민은 전후 국가 체제의 실패를 인정하고 장기적인 새로운 대안 사회로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전후 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강한 일본 사회를 되찾는 단기적인 이해 관계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국가 위기의 대중 심리 속에서 내셔널리즘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한 파시즘적 요소를 잉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2부에서 계속)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이글을 쓴 이영채 교수는 일본 게센여학원대 국제사회학과 교수입니다.



태그:#아베담화, #55년 체제, #학생긴급행동, #일본 극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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