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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5년 여름, 유다정과 양수빈은 인턴으로 평화네트워크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둘은 대표님의 우연한 제안으로 '해방·평화 70년 기념 평화 기행'에 합류하게되었습니다. 2015 평화기행은 참여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재단 사람, 한반도 문제를 걱정하는 학자 모임 ASCK (Alliance of Scholars Concerned about Korea)등의 시민단체, 학술단체가 주최했습니다. 8월 8일 학술행사를 시작으로, 총 3일 간 안산, 서울, 철원, 양주 등지를 돌며 한반도의 해방과 분단 이후 70년, 질곡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평화기행은 두 새내기 인턴들이 평화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또한 앞으로 이어질 2편의 기사를 통해 다른 시민들과 이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숙소였던 두루미 평화관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사방은 익어가는 벼로 그득했고, 상쾌한 아침이었다. 몇 십년전 여기저기 지뢰가 터지던 척박한 황무지였음을 믿을 수 없었다. 두루미 평화관 주민들이 만들어주신 아침을 허겁지겁 먹고, 철원 노동당사로 출발했다. 철원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포격으로 인해 앙상한 뼈대만 남은 철원 노동당사

철원 노동당사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3-5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 22호이다. 이 곳은 해방후 한국 전쟁 전까지 북한의 영토였기에, 철원군의 노동당사로 지어진 곳이다. 노동당사로 오르는 계단에는 전쟁 때 탱크가 계단을 밟은 흔적이 고스란히 있었다. 건물 외벽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건물 안은 포격으로 인해 부서져있었다. 건물 외관은 시멘트를 발라 대리석같이 보이는 효과를 내고, 안은 벽돌로 지어서 당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노동 당사를 짓는 것 치고는 검소하게 지었는데, 그 목적은, 당시 주민들의 세금 부담을 덜기위한 것이라고 했다.

현재 철원 노동당사는 당시 철원에서 공산당 치하에서 반공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고문당하던 곳으로 주로 소개되는 것 같다. 요즘처럼 남북이 서로를 공격을 주고받고 서로를 악마화, 적대시하는 때에, 철원 노동당사에서 반공 교육보다도 현재진행형인 한국 전쟁으로 인한 전쟁의 참상, 남북한의 적대적 공생관계 유지를 뒷받침했던 몰이성적 이념 갈등 등이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두천 성병 관리소, 국가가 방조한 외화 벌이를 위한 여성 수단화

동두천 성병관리소에 도착했다. 두레방 이라는 단체에서 김태정 활동가가 오셔서 설명해 주셨다. 두레방은 과거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셨던 한국 여성, 그리고 현재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는 외국인 여성들을 돕는 동두천의 단체이다.

성병 관리소는 현재 사유지여서, 누군가가 양봉을 하고 있었다. 성병 관리소는 2층으로, 아무도 돌보지 않는 건물이었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파편이 많았고, 계단이 부실하게 지어져있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한번에 10명씩만 올라가야 했다. 방안은 내무반 구조였다. 창문에는 쇠창살이 있었다. 병원이자 수용소로 인권의 사각지대였던 동두천 성병 관리소의 면모를 짐작케 하는 곳이었다.

동두천 성병 관리소 내부.
 동두천 성병 관리소 내부.
ⓒ 평화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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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성병 관리소 내 정리되지 않은 모습.
 동두천 성병 관리소 내 정리되지 않은 모습.
ⓒ 평화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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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성병관리소 바닥의 유리파편들.
 동두천 성병관리소 바닥의 유리파편들.
ⓒ 평화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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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성병 관리소 옆의 공터에서 기지촌 형성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국 전쟁 이후 남북이 분단되자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게 되었다. 주둔하는 미군은 30만이었다가, 60년대가 되자 4-5만이 되었다. 동두천에 주한미군 1개 사단이 남았고, 15000명 정도 주둔했다. 당시 동두천 주민보다도 군인이 더 많았다. 머무르는 미군들을 위한 집, 유흥거리가 필요했고, 자연스레 기지촌 중심으로 윤락가 및 상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2500명에서 3000명 정도의 여성이 기지촌 여성으로 등록되어 있었고, 미등록 여성 까지 합치면 6000명에서 7000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5-60년대는 대한민국이 못살아서 기지촌에서 벌어들이는 달러가 외화벌이에서 10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기지촌 주변 시설이 낙후되어 있어서 이로 인한 미군들의 불만이 있었다. 휴가 때 한국에 있기보다 오키나와를 가는 미군들이 생겨났다. 당시 한국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을 통해 외화의 10 – 20 퍼센트를 벌어들였기에, 미군의 씀씀이가 중요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71년 기지촌 정화사업을 시작했다. 도로 설비, 화장실 재정비 등을 했고 성병 관리도 그중 하나였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은 미군이 그들에게 와서, "너한테 병이 옮았다"라고 지목하면 무조건 관리소로 끌려들어갔다. 수치심도 수치심이지만, 성병 관리소에서는 구타와 성적 착취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치료를 위해 페니실린을 과다 투여해 쇼크사로 돌아가신 분도, 그곳에서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곳에서 교육이 열리기도 했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로 칭송받았었고 미군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기지촌 여성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기지촌 여성들은 더러는 자의로, 더러는 인신매매로 왔다. 그러나 그들이 버는 수익은 포주에 의해 관리되었고 이들은 임금 착취와 협박 등으로 여성들을 기지촌에 계속 잡아두었다. 그리고 국가는 성병관리소 등을 통해 기지촌 여성들을 국가적으로 관리하고 그들의 피해를 방치한 책임이 있다.

워낙 가난하다보니 외화 벌이를 위해 미군을 붙잡아두려는 한국 정부의 안간힘도 느껴졌지만, 그 것을 위해 여성들을 타자화, 수단화하여 착취하고 억압한 사실, 그리고 이 것이 계속 은폐되고 국민의 관심을 잘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기지촌 여성 문제, 현재 진행형

기지촌은 주둔하는 미군의 수가 줄어듬에 따라 상권이 현격히 작아져 있었다. 그러나 기지촌 여성 피해자는 계속 존재한다고 김태경 활동가님은 계속 설명을 이어가셨다. 이제 현직 한국 여성은 거의 없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는 외국인 여성들이 한국에서 가수 활동을 할 수 있는 E-6비자를 받아서 기지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한국 식당이나 카페서 노래를 하며 돈을 번다고 생각할 뿐, 성적인 서비스는 생각하지 못하고 온다. 2003년,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여성이 이 비자를 받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지금은 필리핀 여성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한국과 필리핀 현지에 기획사가 있고, 이들은 자신이 노래하는 비디오를 녹화하여 우리나라의 문화관광부에 보내고, 문화관광부가 허가하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다. 요즘은 필리핀 정부에서 이런 비자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필리핀에서 여성들이 홍콩이나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간다고 한 다음, 그 곳들을 거쳐 배를 타고 한국에 들어온다.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은 휴무가 없다. 낮에는 밖에 못나가고, 팔아야 되는 엄청난 주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성매매를 해야한다. 미군 기지촌 여성과 미군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동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심각하며, 태어난 아이들 중 다수가 미군에게 버림을 받아서 교육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상점들이 불편해 할 것 같아 우리가 기지촌을 잘 돌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미군 기지촌 여성 문제가 현재형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는 기지촌 여성들이 많이 묻혀있다는 상패동 공동묘지에 갔다. 잡초가 무성해서 다른 분들이 낫을 들고 잡초를 베서 길을 터주셨다. 그 곳은 일제 시대부터 무연고 무덤이었고, 기지촌 '언니'들은 1960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집중적으로 묻혔다고 한다. 1970년대 말에는 1200개의 묘가 있었다. 지금은 잡초가 워낙 많아, 낫으로 누군가가 길을 터주셔서 겨우 공동 묘지 안쪽 까지 갈 수 있었다. 이름도, 묘비도 없이 봉분들이 있고, 가끔 번호판이 있다. 1992년 미군 케네스 마클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던 기지촌 여성 윤금이 씨도 여기에 화장되어 있다. 막걸리를 뿌리며 잠시 그 묘지에 있는 넋들을 추모하는 자리를 가졌다. 많은 무연고자들이 묻혀계시겠지만, 가난해서, 가진 것이 몸밖에 없는 여성이라서 끌려와 온갖 고초를 겪다가 제대로 묻히지도 못했을 '언니'들을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졌다.

한때 애국자로 칭송 받으며 외화 벌이 도구로 관리, 이용되었지만 '쓸모'가 다하자 버려진 한국의 기지촌 '언니'들. 그리고 현재 한국의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까지... 젊은 여성들을 이용하여 국가를 빙자해 자신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했던 수많은 아빠, 삼촌, 오빠들의 사과와 반성, 그리고 실질적 보상이 필요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쟁의 위협을 머리에 이고 사는 한반도의 피해,'효순이 미선이 추모 공원'

마지막 일정은 경기도 양주의 효순이, 미선이 추모 공원 이었다. 길에서는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고, 장갑차 뿐 아니라 그냥 자동차 사고가 나기에도 쉬온 자리였다. 추모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2002년 6월 13일, 당시 중학생이던 심효순, 신미선 양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는 일이 일어났다. 그날은 임시 공휴일이었는데, 이들은 오전에 친구의 생일 파티를 가는 길이었다. 그 일대 주민들은 워낙 미군의 훈련에 길들여져 있어 장갑차 소리가 익숙해 알아서 피하고, 또 미군들은 주민들이 길에 있기보다 생업에 종사하는 오전 시간에 훈련을 하는 식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경기도 양주의 신효순 심미선 추모비.
 경기도 양주의 신효순 심미선 추모비.
ⓒ 평화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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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음은  분단과 많은 군대 주둔으로 인해 높아진 안전에 대한 위협 그리고 그것을 미연에 방지 하지 못한 만반의 준비를 하지 못한 군과 관의 부주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역 정부, 미군, 그리고 주민들이 더 세밀하게 소통하고 훈련 시 가이드라인을 짜고, 또 도로를 잘 정비 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군대가 민간인이 사는 지역에서 훈련을 해야하는 남북 분단 및 휴전의 상황일 것이다.

마무리: 공감과 기억으로 찢어진 평화를 이어붙이기!

이번 기행은 한반도의 격동의 근현대사 현장에서 직접 피해를 입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식민 지배, 전쟁, 분단, 독재, 경쟁 성장을 이끌었던 국가와, 국가가 미처 혹은 고의적으로 국가의 역할을 하지 않아 소외되고 짓밟힌 수많은 개인들의 삶을 안산 단원고에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화천 베트남 참전 기념관에서, 철원 두루미 평화촌에서, 동두천 기지촌에서, 양주 효순이 미선이 추모 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평화 운동 새내기로서 적합한 시기에 갔던 기행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부재가 빈번했던 한반도에서 다양한 이유로 평화를 잃은 개인들을 만나고, 공감해보려고 했던 좋은 기회였다. 평화를 해치는 사람, 피해보는 사람이 따로 있다. 무고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팔과 다리를, 목숨을 잃고 잊혀졌거나 잊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또한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고 살아간다. 평화는 무엇이고, 평화 운동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해야되는 지 고민이 많았는데, 우선 이번 기행에서 알게 된 일들을 공감하려 노력하고, 기억하고, 알려나가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고, 평화 운동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그:#미군, #기지촌, #효순이, #미선이, #노동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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