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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종대로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 철거로 성공회 서울대성당이 대로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서울 세종대로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 철거로 성공회 서울대성당이 대로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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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내려다본 성공회 서울성당 모습. 국세청별관이 자리에는 기둥만 남아있다. 서울시는 이 자리에 시민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성공회 서울성당 모습. 국세청별관이 자리에는 기둥만 남아있다. 서울시는 이 자리에 시민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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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유럽에 온 것 같아요."
"서울에 이렇게 예쁜 성당이 숨어있었나."

요즘 서울 세종로 서울시청과 덕수궁 부근을 걷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한 마디를 하고 지나간다. 평소 못 보던 성당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다. 실은 새로 생겼다기보다는 숨어있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지난 5월까지만 해도 이 성당 앞에는 큰 건물이 떡 버티고 있어서 큰길 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 큰 건물은 옛 국세청 별관으로, 78년 전 일제가 조선체신사업회관이란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서울시가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여름 내내 철거 작업을 벌여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일제가 영친왕의 생모 엄 귀비의 사당인 덕안당을 헐고 지은 만큼 일제잔재 청산 차원에서 허물었다는 언론보도도 많았지만 그보다 이 건물이 그간 역사의 풍파 속에서 여러 번 변형을 거친 끝에 본 모습을 잃었기 때문에 보존 가치가 없어졌다는 평가가 많았다.

덕분에 이 성당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성당의 정식 명칭은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다. 1911년 제3대 주교로 임명된 마크 트롤로프에 의해 건립이 주도됐으며 아더 딕슨의 설계에 따라 1922년에 착공되었다.

'성내 4면이 보이기 쉽겠도다' 100년 전 예언 이제야 실현

당시 <조선성공회월보> 제 69호(1914년 3월)에는 성당의 건립계획이 착수되던 때의 상황을 "이미 남대문으로부터 경복궁까지 대로가 준공되었으매 이제 건축하고자 하는 새 성전이 미려한 위치를 점령하겠고 성내 4면이 보이기 쉽겠도다"라고 쓰여있으니, 당시의 예언이 100년 가까이 지나 실현된 셈이다.

처음에 라틴형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던 이 성당은 건축비 부족으로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밋밋한 일자모양의 건물만 지어진 채 '예비대성당'이란 이름으로 1926년 5월 축성식을 가졌다.

그러던 중 지난 1993년 영국 런던 교외의 한 도서관에 아더 딕슨의 설계도 원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 발견돼 1996년 당초의 설계대로 오늘날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건물은 로마네스크식으로 외벽의 기초부와 뒷면 일부에는 화강석을 쓰고 나머지는 붉은 벽돌을 사용했다. 지붕의 기와와 처마 등에 남아 있는 한옥 양식은 딕슨이 서양식을 고집하지 않고 당시 주변 건물들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것을 보여준다.

성당 뒤켠에 있는 전통 한옥식 사제관은 1987년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외쳤던 6월항쟁의 진원지였다. 서울시가 20일 오후 공개한 국세청 별관 터에는 22개의 기둥만 남아있었다.

22일에는 일본 공사 동상 거꾸로 세우기 행사 열려

국세청별관(가운데 하얀 건물)이 철거되기 전인 지난 5월 덕수궁 주변 모습. 빨간 지붕의 성공회성당 건물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다.
▲ 철거 전 모습 국세청별관(가운데 하얀 건물)이 철거되기 전인 지난 5월 덕수궁 주변 모습. 빨간 지붕의 성공회성당 건물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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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을 총지휘한 서해성 예술총감독은 "일제의 체신이나 광복 뒤 납세라는 수직적 권위의 공간이 시민 중심으로 수평화하는 역사적인 변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국세청 별관 철거 후 이곳의 지상부에는 광장, 지하부에는 덕수궁 지하보도와 연결되는 시민문화공간을 조성을 위해 현상설계공모를 진행하고 있다.

한편, 서울시는 한일합병조약 조인 105년만인 오는 22일 남산 북쪽 기슭 한국통감 관저 터에 남아있는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거꾸로 세우는 행사를 갖는다.

'거꾸로 세운 동상'은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며 남작 작위를 받았던 하야시 곤스케 동상의 판석 3점을 활용하여 제작됐다.

광복 이후 동상은 파괴됐지만 지난 2006년 예장동 2-1번지에서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이라고 쓰여진 동상 좌대 판석 3점이 발견됐다.


태그:#국세청별관, #성공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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