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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지 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 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 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가사 中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의 첫직장에서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의 첫직장에서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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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혼가정에서 늦둥이로 태어났다. 어머니에겐 나와 성이 다른 두 아들과 딸이 있었고 아버지에겐 나와 어머니가 다른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다보니 나는 제대로된 소속감을 가지지 못한 채 마음 고생을 하면서 자랐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국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다시 헤어지셨다. 그 뒤로 나는 어머니와 살았다. 어릴적부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맞고 살던 모습을 너무 자주 봐왔던 터라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다.

어머니쪽에 있던 형들과 누나는 이미 시집 장가를 갔고 아버지쪽에 있던 형은 아버지와 떨어져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가끔 어릴적 할머니댁에 가면 형을 만나곤 했었다. 하지만 자주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깊은 정이 들 겨를도 없었다.

열 아홉, 내가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경북 칠곡에 있는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할머니와 함께 살던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평소에 연락을 안 하고 살았었기에 웬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다.

그 전화 연락을 받았던 날은 내가 주간근무를 하는 날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가봐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었다. 조장님께 말씀드리니 사무실에 이야기 하고 가보라는 말을 했다.

직생생활 첫 경조사...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유모를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물었다
 이유모를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물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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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그 회사도 관리자들도 어이가 없다. 아무리 실습사원이라지만 취직을 하면 회사의 규정등에 대해서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바로 현장에 투입해서 일시키기 바빴지 그런 교육은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경우엔 휴가가 며칠이 주어지는지, 회사에서는 어떤 것들을 해주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조모상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으로 내려간 날이 월요일 저녁이었다. 아버지가 살고 있던 집으로 찾아가 할머니 사진 앞에서 형과 함께 밤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날 할머니 시신을 화장시키기 위해 울산의 한 화장터로 갔다. 그 때까지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내 친할머니지만 어릴적부터 특별한 추억도 없었고 그 다지 깊은 정이 들 겨를없이 살아왔었기 때문인 듯했다. 반면 어린시절부터 할머니 손에 자라온 형은 세상이 다 끝난 듯한 눈물을 보였다.

화장터에서 잠시 시간이 나 건물 뒤로 돌아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슬프진 않지만 마음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뒤 형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함께 담배를 피면서 말했다.

"어떻게 너는 눈물 한방울 한흘리냐... 그래도 네 친할머닌데.."

형은 나에게 그 말을 하면서 목이 메여 말끝을 흐렸다. 잠시 뒤 할머니의 화장 차례가 되어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와본 화장터, 관을 앞에두고 화장터에 일하시는 분께서 할머니께 마지막 전할 말을 한마디씩 하라고 했다. 그제서야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올라왔고 그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쉴 새 없이 그렇게 한참을 할머니 관 앞에서 울고서야 할머니를 보내드릴 수 있었다.

화장터를 나와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갔다. 이왕 내려온거 주말까지 쉬었다가 월요일에 회사에 출근할 생각이었다. 조모상의 경우 통상 휴가일수가 이틀 내외로 상을 치르고 바로 회사로 복귀를 해야 했는데 그런 개념이 없었던 나는 '일 다 끝내고 알아서 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 개념이 전혀 없는 사회초년생이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하나 왜 복귀 안 하냐고 전화하는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입사한 지 몇 달 안 된 실습사원이라지만 엄연히 회사의 사원인데 회사는 물론 직원들까지도 누구 하나 조의금을 내지도 화환을 보내지도 위로의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그 당시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고 섭섭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단지 다음주 월요일에 출근을 했을 때 내 맘대로 일주일을 쉬었다며 엄청 욕을 먹었다. 조모상은 휴가가 며칠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건지 누구도 그런말을 해주지 않았으면서 소리만 지르는 관리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직장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원래 사회란 이런 것인지 내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이 시골에 쳐박혀 있어서 될 일인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름의 끝자락에 처음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12시간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면서 내 손엔 한달에 80여만 원의 월급이 들어왔다. 처음엔 마냥 그 돈이 신기했지만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 나에겐 내 인생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태그:#조모상, #경조사, #직장생활, #화장터, #실습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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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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