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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태어난 시인 박인환은 만 서른이 안 된 1956년 3월 20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돌연한 그의 죽음은 아직 전후의 피폐와 암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문화예술계에 깊은 충격과 슬픔이었다. 불과 얼마 전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명동 술집 거리를 잔잔한 감동으로 적셨던 참이라, 박인환이 그렇게 세상을 버릴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주만큼 명을 타고나지 못한 요절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깊었기 때문인지, 박인환의 마지막 작품 <세월이 가면>은 이미 1956년 당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붙여져 전설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설의 대표적인 예로 이 노래가 즉석에서 작사, 작곡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근년 몇몇 서지 연구의 성과로 그러한 전설의 오류는 다행히 상당 부분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런데, 노래 <세월이 가면>의 역사를 더듬는 데에 매우 중요한 점인 첫 번째 음반 녹음에 관해서는 확실한 실물 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그간 계속해서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다. 명동 술집에서 처음 발표될 당시 테너 가수 임만섭 또는 배우 겸 가수 나애심이 즉석에서 불렀다는 기록에 따라 나애심이 처음 녹음을 했다는 설이 있고,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가수 현인이 처음 음반을 발표했다는 설도 있었다. 또 1960년대에 데뷔한 가수 최양숙이 최초 녹음 가수라는 아무 근거 없는 주장도 인터넷상에서 종종 찾아 볼 수 있었다.

 <세월이 가면> 최초 음반 딱지. 인쇄 오류로 박인환이 '박헌환'으로 표기되어 있다.
 <세월이 가면> 최초 음반 딱지. 인쇄 오류로 박인환이 '박헌환'으로 표기되어 있다.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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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의 경우 1959년에 <세월은 가고>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유성기음반이 실제 확인되므로, 지금까지는 현인 최초 녹음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인정되어 왔으나, 최근 그보다 시기가 훨씬 앞서는 나애심 녹음 유성기음반이 발견되면서 그간의 혼란이 결국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나애심의 유성기음반은 신신레코드에서 발매된 것으로 음반일련번호가 S438인데, 같은 음반사에서 발매한 S447 <마닐라 무역선>, S448 <삼국지> 같은 노래가 1956년 9월 이미 발표되어 있었으므로, <세월의 가면>의 발표 시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1956년 4월 중순에 간행된 주간지 기사에서 "여배우이며 가수인 나애심양이 자진 부르고 싶다고 해서 그 후 나양의 오빠인 작곡가 전오승씨의 편곡지휘로 서울방송국을 통해서 방송하는 동시에 레코드에 취입하게 되었다고 한다"는 대목이 확인되기도 하므로, 이번에 발견된 나애심의 음반은 대략 1956년 5월 전후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인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음반의 상업적 성공으로 연결시키고 싶었을 음반회사 입장에서 보면 최대한 서둘러 발매하는 것이 당연했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가면>은 나애심의 첫 번째 음반 이후 여러 가수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거듭 녹음해 발표했다. 1959년 현인 곡 외에 1968년 현미 곡, 1972년 조용필 곡, 1976년 박인희 곡 등이 잘 알려져 있는 경우이다. 하지만 1956년 창작 당시의 가사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은 역시 나애심의 녹음이다. 다른 곡들은 일단 제목부터 <세월은 가고>, <세월은 가도> 등으로 원작과 차이를 보이기도 하고, 원작 가사 일부를 통째 들어내기도 했다. 반면 나애심의 곡은 조사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박인환의 가사와 그대로 일치한다.

 1956년 6월 월간지에 게재된 <세월이 가면> 첫 악보
 1956년 6월 월간지에 게재된 <세월이 가면> 첫 악보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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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편곡으로 보아서는 나애심 녹음도 작곡자 이진섭의 원 곡조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56년 6월 월간지에 실린 <세월이 가면>의 최초 악보는 6/8박자로 되어 있으나, 나애심의 노래는 4/4박자로 되어 있다. 기본적인 선율은 유사하지만 음표에 가사를 붙이는 방식이 훨씬 복잡하게 되어 있어, 원 악보와는 꽤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반면 현인 이후로 녹음된 곡들은 대개 3박 계열로 편곡이 되었고, 현재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박인희 곡도 그렇게 녹음이 되었다.

이번에 <세월이 가면> 최초 음반을 발견한 옛 가요 사랑모임 '유정천리'에서는 오는 11월 창립 기념 모임을 통해 공개 감상의 자리를 우선 마련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후 관련 자료를 좀 더 보강해 문단 작가들이 만든 옛 가요를 모은 복각 음반을 제작할 것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지금 그 사람 몸은 가고 없지만, 그 노랫말 곡조는 우리 가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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