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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인 더위

바야흐로 말복을 앞둔 이즈음 더위는 절정인 듯하다. 한여름 혹서(酷暑)나 한겨울 혹한(酷寒)은 노약자에게는 내성이 약하게 마련이다. 이즈음은 혹서기로 내 전화에는 친지의 부음이 자주 뜬다.

지난 5일 서울의 한 사진작가 전시회에 초대를 받고 망설이다가 더위를 핑계로 불참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 뙤약볕임에도 원주 역에서 12시 29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탔다. 그날 전시회 오픈은 오후 5시이기에 청량리 역에 도착한 뒤 미리 약속해 둔 한 출판사 대표와 가을 예정으로 펴낼 출간문제를 얘기하는 도중 손전화로 문자를 받았다.

"교우 한승옥 소천. 서울 성모병원 영안실. 국문과 동기 내일 6시 조문."

순간 나는 머리가 '멍' 한 충격을 받았다. 다시 문자가 왔다.

"아버지(한승옥 미카엘)께서 어제 밤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경황이 없어 이렇게 문자 드리는 점 용서해 주십시오. 아들 한아름 올림."

나는 그 길로 곧장 문상을 가느냐로 고심하는데, 이 기회에 문상 온 다른 친구들과 만나는 것도 의의 있는 일이라는 출판사 대표의 조언과 애초 약속한 전시장 오픈시간과 겹치기에 다음날 약속시간에 맞춰 다시 상경키로 했다. 사실 이즈음은 나이가 든 탓인지, 세월이 각박한 탓인지 최근에는 궂긴 때나 오랜만에야 동기 친구들의 얼굴을 보고 있다.

이튿날도 날씨는 푹푹 쪘다. 친구에게 마지막 가는 여비만 보태기에는 뭔가 아쉬워 A4 용지를 꺼내 만년필로 몇 자 적었다.

"한승옥 교수! 먼저 하늘나라로 잘 가시게. 친구 박도 재배(再拜)"

그의 영정사진

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 앞에서 친구와 함께 (오른쪽 고 한승옥 교수, 왼쪽 기자).
 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 앞에서 친구와 함께 (오른쪽 고 한승옥 교수, 왼쪽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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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약속시간에 맞춰 열차를 타고 서울성모병원 영안실로 갔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인지, 그 시간 여러 성도들이 빈소에서 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틈에 먼저 온 친구들과 안부 인사를 나누자 연도가 끝났다.

그제야 연도로 조문치 못한 친구들과 빈소로 가서 분향을 한 뒤 그의 영정사진을 보자 갑자기 울컥 울음이 치솟았다. 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흐느끼며 친구에게 "미안해!"를 반복하며 사죄했다.

지난 5월 초순 무렵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을 듣고 전화를 했다. 수원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하기에 나는 곧 문병을 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곧 메르스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병원 방문도, 특히 노약자 문병은 극구 자제하라고 연일 매스컴에서 야단법석이었다. 그래서 나는 메르스가 진정되기를 바랐고, 그만 일상 일에 빠져 지냈다.

더위도 한 풀 꺾이고 내 일도 어지간히 끝낸 뒤 그가 그때까지 입원해 있다면 병원으로 가고, 그 전에 퇴원하였다면 그의 집 동네로 가거나 내가 사는 원주로 모셔 맛있는 음식을 들며 정담을 나눠야겠다고 작정했더랬다.

사실 나는 그의 병환이 그렇게 심한 줄도, 또 그렇게 빨리 갈 줄도 몰랐다. 그는 그새 병상에서 때때로 내가 한 약속을 곱씹으면서 얼마나 기다리며 원망했을까. 그런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에게 더욱 미안했다. 나는 그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제부터는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친구, 정말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때 검은 상복을 입은 그의 막내딸이 나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선생님을 좋게 추억하고 있어요. 지난해 초여름, 왜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원주로 가서 막국수도, 메일전도, 감자전도, 수육도 참 맛있게 먹었고, 자작나무 숲 미술관도 관람하고, 풍수원 성당에도 갔었지요. 아버지는 그날이 참 행복했던 날이었다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그랬다. 그날 그는 딸에게 핸들을 맡기고 내가 사는 원주로 와 초록의 향연을 흐뭇이 만끽하고 돌아가면서 매우 즐거워했다. 그때 핸들을 잡은 따님 곁에서 활짝 웃으며 또 만나자고 손을 흔든 게 내가 본 그의 마지막 잔상이다.

사실 세상사란 생각하기 나름이다. 막내딸 한예슬 양의 말처럼 만남 못지않게 헤어지는 모습도 중요한데, 병마에 시달리는 그의 야윈 모습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친구의 뇌리에 남기는 것이 더 나을지도.

아마도 따님은 그렇게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 그날 청량리 역에서 밤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차창 유리에 그의 모습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그리고 다정하게 클로즈업되었다.

나는 그를 1965년 3월 5일 등교 첫날 첫 시간 고대 본관 301호 강의실에서 만났다. 나는 그때 무척 가난하여 전기 대학은 학비가 싸고 취직이 확실하게 보장된 국립사범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응시했으나 실력이 부족하여 낙방했다. 그래서 꿩 대신 닭으로 그해에만 후기였던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과에 응시하여 다행히 합격했다. 하지만 사립대학은 학비도 국립대에 견주어 무척 비쌀 뿐더러, 앞날이 불투명하여 대학 합격은 그저 덤덤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대학을 졸업한 게 기적일 정도로 정말 힘들게 다녔다. 대학 8학기 중 한 번도 쉽게 등록한 적이 없었고, 4년 동안 거처는 열 번 정도 옮겨 다닌 듯하다. 그 시절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특히 시골출신들은 대부분 비슷했을 것이다. 나는 고교시절 집안사정으로 1년 학교를 쉰 적이 있기에 대학재학 중 휴학은 영 졸업치 못할 것 같은 예감으로 군 입대도 미룬 채 학훈단을 지원하였다. 그도 같은 학훈단 후보생이라 우리는 4년 동안 줄곧 동문 수학한 사이였다.

고대 국문과 65 학훈단후보생동기들(오른쪽부터 임봉재, 황태연, 박도, 이상길, 한승옥, 기주연, 민병기...이 가운데 벌써 두 친구가 고인이 되었다.)
 고대 국문과 65 학훈단후보생동기들(오른쪽부터 임봉재, 황태연, 박도, 이상길, 한승옥, 기주연, 민병기...이 가운데 벌써 두 친구가 고인이 되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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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대학시절 낭만은 없었다

나에게 대학시절 낭만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나는 그 시절 한창 젊은이들이 드나들었던 '세시봉'이나 '르네상스'니 하는 음악감상실도, 당구장도, 여대 앞을 서성거린 적도 없었다. 4년 내내 감색 교복 아니면 검정물들인 군복을 입고 다녔고, 전공 학점 이수에다 교직과목 이수, 거기다가 학훈단 군사훈련으로 대학 3, 4학년은 고3 수험생 못지않게 바빴다. 그런 바쁜 틈에도 입주가정교사 등, 아르바이트로 그저 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나도, 그도 대학 졸업 후 육군 장교로 전방에서 2년 4개월의 소대장 복무를 마치고 곧장 교단에 섰다. 그는 고교에 있으면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교단(숭실대)에 섰다. 그는 내가 줄곧 고교교사로 있는 게 보기에 안쓰러웠든지, 자기 대학 대학원 진학을 극구 권유했다. 나는 그의 청에 대학원에 응시했으나 또 낙방이었다. 결정적인 요인은 영어 읽기 시험을 잡쳤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생 영어로 앞길이 막혔는데 고교입시, 대학입시에도 전기에서 모두 낙방한 것은 유독 영어 성적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아가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운 토종인데다가 나중에는 집안이 기울어져 학교 다녀오면 소를 먹이고 쇠죽용 꼴을 뜯거나 땔감용 나무를 한다고 낙동강둑을 헤매거나 금오산 기슭을 오르내렸기에 그 시절 공부는 교실에서 배운 게 고작이었다. 고교(중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는 신문배달을 하였는데 그 무렵에는 조석간제로 하루에 두 번 배달했기에 잠자는 시간조차도 부족할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양풍은 아주 질색하셨다. 그 탓에 나는 왜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말과 글을 두고 영어를 죽기 살기로 배워야 하는지 그 까닭을 그때도 지금도 잘 모르고 있다. 왜 국문과 대학원 시험에 전공은 제쳐두고 영어 읽기시험만으로 합격불합격을 판가름하는지 도무지 대학 처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할 무렵 그 시절 끗발 좋은 고향 후배가 한 중진의원 보좌관으로 추천하겠다는 걸 나는 일언지하 거절했다. 그 시절 나는 교사, 작가, 기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면서 모교 교사로 등단하는 게 그때의 내 꿈이었다.

그 얼마 후 그 친구가 국문학과장에게, 대학원 측에 말을 잘해 합격했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끝내 등록치 않았다. 그 후 나는 고교시절 은사가 이끌어줘서 모교로 갔지만, 모난 성격으로 배겨내지 못하고 일년만에 뛰쳐나와 이대부고에서 28년 동안 죽 평교사로 지내다 정년도 채우지 못한 채 교단을 떠나 강원도 산골로 내려왔다.

독이 된 평론가의 호평

나는 고교시절 글을 잘 쓴다고 여러 선생님들의 총애를 무척 받았다. 신문배달로 그 바쁜 와중에서도 학생기자로 어떤 때는 학보의 지면을 반 이상 내 작품이나 내가 쓴 기사로 채우고 심지어 선생님의 조사까지도 내가 썼다. 고2 때 내 소설을 보신 곽종원 문학 평론가는 "고등학교 학생 작품으로 이만한 수준도 드물 것이다"라고 호평을 해주셨다.

내 작품을 본 어느 여대생은 주책없이 팬레터를 학교로 보내 그게 친구들에게 알려져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 시절 나는 가난한 고학생이었지만 글 쓰는 데는 자신감이 넘쳤고, 그게 심해 내적으로 오만, 교만했다. 그때 그 평론가의 말씀이, 선생님들의 칭찬이, 그때 받은 팬레터가 평생 나에게는 독이 되었다.   

교단에 선 후 해마다 신춘문예나 각종 공모에 응모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오만과 교만 탓이었다. 그것을 내가 깨달은 것은 쉰 가까운 나이였다. 오만과 교만은 모든 인생길에 독약이요, 실패의 지름길이었다. 나중에는 아예 소설 쓰는 것을 포기하고 교육신문이나 이런저런 잡지에다 학교생활 이야기나 칼럼을 쓰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1988년 나의 첫 에세이집 '비어있는 자리'가 출판되자 제자들이 이대동창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 그는 내 산문집을 다 읽고 일부러 학교 앞으로 찾아왔다.

"자네 글이 너무 좋아 밤을 새우다시피 다 읽었네. 마침 성당 주보에 리뷰도 실었지."

그는 원고지 30매 정도의 긴 리뷰를 출력하여 나에게 전했다.

"설송, 왜 소설은 안 쓰고…."
"소설을 쓰지 못해 에세이를 쓰는 거야."
"소설이 별개야? 자네 솜씨로 에세이를 조금 더 길게 쓰면 소설이 되는 거야. 네 글 솜씨가 아까워."

1967년 가을 고려대 국문학과 65 동기 학훈단 친구들과 용문산 1박2일 캠핑 때(오른쪽부터 임봉재, 한승옥, 민병기, 박도, 앞에 앉은이 이상길 후보생)
 1967년 가을 고려대 국문학과 65 동기 학훈단 친구들과 용문산 1박2일 캠핑 때(오른쪽부터 임봉재, 한승옥, 민병기, 박도, 앞에 앉은이 이상길 후보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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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두들기다

그때 그가 던진 말은 내 영혼을 두들겼다. 나는 그의 말에 용기백배했다. 그 후 그는 평론가로 내 첫 작품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의 작품해설도 써주었다. 나는 2010년 3월 26일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맞아 '영웅 안중근'을 출판했다. 그의 소개로 그가 다니는 성당 방구들장 신부님에게 책을 보냈더니 이틀 만에 문자가 왔다.

"안 토마스가 부활하신 듯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영웅 안중근' 300권만 보내주십시오."

믿어지지 않아 출판사로 문자를 그대로 전달했다. 며칠 지나 확인하자 그새 미리네 유무상통 마을로 출고했고, 이미 입금조차 완료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방 신부님에게 감사의 뜻으로 그 몇 해 전에 쓴 '길 위에서 아버지를 만나다'라는 책을 보냈다. 그런데 신부님은 사흘 뒤 또 300권을 주문했다. 마침 출판사에 재고가 200여 부밖에 남지 않아 대표는 전국서점에서 시판 중인 것을 긴급 회수해 납품했다고 한다.

그 뒤 '영웅 안중근'을 다시 일천 부나 더 사주셔서 출판사에서 아예 한 쇄를 더 찍었고, 이후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등 고가의 책을 출판할 때도 수백 권씩 구입해 주셔서 그동안 출판 불황에도 나는 계속 30여 권의 책을 쓰고 펴낼 수 있었다. 지금 반성해 보면 내가 잘 나거나 잘 쓴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승옥 친구를 비롯한 여러 친구와 제자들이 도와 준 결과였다.

일찍이 공자께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중에 시듦을 안다"는 말이다. 나는 이제 친구가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그의 깊은 우정을 깨달은 우화 속의 청개구리가 되었다.

한 미카엘이시여! 천주님 나라에서 영생하시옵소서. 그리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족들의 건강과 평화를 기도드립니다. 


태그:#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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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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