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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고향이자 지진 피해지역이기도 한 오컬둥가 룸자타에서의 빵 배급 일정을 모두 마쳤다. 홀가분한 가운데 산중에 밤을 맞았다.

우리 부부는 장인어른과 아내의 다른 어머니 그리고 처제와 동서, 조카들까지 어울려서 맛난 저녁 식사 시간을 함께 했다. 네팔에서의 저녁 식사에는 토속주가 항상 곁들여진다. 술이 약한 내게는 가장 취약한 게 술 마시는 일이다. 40도를 넘나드는 독한 '럭시'는 즐거운 자리에 인사를 주고받는 익숙한 술이다.

룸자타를 떠나며

한국이주노동자 쉬리 람 터무의 집에 가는 길.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아내 나. 옥수수밭에 임시거처로 마련된 함석 지붕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거처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 한국이주노동자의 집을 찾아 한국이주노동자 쉬리 람 터무의 집에 가는 길.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아내 나. 옥수수밭에 임시거처로 마련된 함석 지붕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거처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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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것은 뒤끝이 없는 술이란 것이다. 럭시를 곁들여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술이 익을 무렵 식사가 시작된다. 나는 식사가 끝나기도 전 독한 럭시에 취해 곧 잠을 청하자고 안달한다. 바쁘고 힘겨운 여정 덕분에 피곤한 몸은 가눌 길이 없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곧 카트만두로 돌아가야 하는 나는 식사를 물리기도 전에 눈꺼풀의 무게에 힘겨워하다 그대로 잠에 취했다. 잠결에 다른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아내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또 그대로 잠이 든다. 알람시간에 맞춰 잠에서 깬 우리는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나는 장모님께서 여행용 가방에 가득 챙겨주신 옥수수와 밀가루 등을 걸쳐 메었다. 두 개의 여행용 가방에 가득 담긴 옥수수와 밀가루는 카트만두에 처제와 아내가 함께 나눌 몫이란다.

잠에서 깨자마자 50kg은 넘을 것 같은 무게의 짐을 멘 나는 헉헉대며 지프차가 출발하는 곳까지 도착했다. 시간은 아침 4시 20분. 동서가 오고 룸자타에 사는 막내 처제가 찌아를 끓여서 어린 아들과 배웅을 나왔다. 아내와는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다른 어머니에 대한 그 어떤 불편도 없다. 아내와는 결혼 후 처음으로 대면한 사이지만 참으로 정겹고 훈훈한 자매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곧 지프차를 타고, 룸자타의 어린 꿈들을 두고 카트만두로 향한다. 아내는 어린 세 살배기 때 고향과 안타깝게 작별했던 것을 이제야 끝낸 셈이다. 이제 훈훈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내며 떠나는 것이다.

반복된 여진으로 돌카로 가는 다리 붕괴

무너진 집들이 불안한 것처럼 길 위에 여행자들도 항상 불안한 산 비탈길을 가다. 지프차에서 내려서 걷고 있다. 하얗게 무너진 산을 보면 짐작이 되리라.
▲ 지프차에서 내려서 걷다. 무너진 집들이 불안한 것처럼 길 위에 여행자들도 항상 불안한 산 비탈길을 가다. 지프차에서 내려서 걷고 있다. 하얗게 무너진 산을 보면 짐작이 되리라.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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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카트만두 근교에서 취약지구를 찾아 빵을 전달하고,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일정을 고려해서 원거리 취약지역을 찾아 배달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주 배달지로 계획한 돌카에 가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연이은 여진으로 돌카로 가는 다리가 붕괴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네팔인들은 강력한 두 차례의 여진에도 다리가 붕괴되지 않았다는 것을 작은 자부심으로 여겨왔었다.

우리는 같은 길을 돌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지진 파괴현장을 목격했다. 카트만두에서 룸자타로 향했을 때는, 지치고 힘들어 잠들고 깨기를 반복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폭격을 맞은 듯 보이는 산악지역의 집들이 마치 하늘을 붙잡고 있는 듯 불안한 모습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네팔 산악지역의 집들은 옹기종기 모여 있기보다는 드문드문 떨어져 있다.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이어지는 산마을을 보는 순간 한탄스런 한숨이 이어지는 것은 안타까움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집이 다 쓰러져 가는데도 그곳에서 머물고 있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대나무로 엮어서 만든 임시거처에 몇 장의 함석을 지붕에 얹었다. 모자란 부분은 옥수숫대를 받쳐 지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오가는 길은 여전히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탄 지프차에는 지붕 가득 짐을 싣고 각자가 소지한 짐까지 가득이다. 산중에 무너진 집들만큼이나 위태하다.
▲ 우리가 탄 지프차 그리고 무너진 산 마을에 집들 우리가 탄 지프차에는 지붕 가득 짐을 싣고 각자가 소지한 짐까지 가득이다. 산중에 무너진 집들만큼이나 위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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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마을을 잇고 산중에 도시가 건설되는 이유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들의 삶의 근거지를 지키고자 하는 네팔인들의 안간힘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거들어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하지만, 나의 한계는 분명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결론에 도달하며 사색을 잇는다.

우리가 룸자타를 떠나 오컬둥가로 이동할 때는 연이틀 내린 비로 도로 사정이 최악이었다. 더구나 카트만두 고향 사람들에게 보내는 룸자타 가족들의 정성까지 보태어져, 차량은 정원을 초과한 것은 물론 적재정량도 훨씬 초과한 상태였다. 아슬아슬한 산 비탈길을 지날 때 휘청거리는 지프차에 몸을 기댄 산중 사람들에게, 우리네 상식은 무의미하다.

지프차가 승차할 사람을 모두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순간 이미 예견된 일이다. 하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못하는 정성이다. 결국 산 비탈길에서 낮은 고개조차 편히 넘지 못한 지프차에서 우리는 모두 내려서 걸어야했다. 두 세 차례 오르고 내리고 걷기를 반복해서 오컬둥가에 도착했다.

오컬둥가를 지나고 나면 길이 비교적 완만하다. 그럼에도 지프차는 헉헉대며 승객들을 불안하게 했다. 결국 순코시(Sunkoshi)를 건너기 전에 승객들은 카자(Khaja, 간식)를 먹고 차량을 점검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승객들이 모두 간식을 먹고 나서도, 차량은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차량 정비를 마친 지프차는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산중 지진피해를 입고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나, 불안하게 지프차를 타고 가는 여행객이나 피차일반으로 불안한 날들을 지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꿈은 불안을 모른다

아이들이 놀고 있다. 룸자타에 또 다른 학교 모습이다. 천막과 함석지붕이 대세가 된 형국이다. 처제 집에서 병아리와 어미닭을 보았다. 어린 날의 동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 룸자타의 또 다른 학교 아이들이 놀고 있다. 룸자타에 또 다른 학교 모습이다. 천막과 함석지붕이 대세가 된 형국이다. 처제 집에서 병아리와 어미닭을 보았다. 어린 날의 동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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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개, 두 고개 불안을 이어가는 듯 길을 넘고 넘어 아스팔트 깔린 도로에 접어들었다. 비포장 도로는 여전히 바쁘게 포장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별 동요 없는 일상을 지내고 있었다. 지진이 난 지 두세 달이 지났다. 그래서일까? 빠른 변화를 용인하지 않는 네팔사람들의 특성 때문일까? 길은 바쁘게 놓이고 있지만,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은인자중한 모습뿐이다.

무너진 집터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는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움 속에 고난을 이겨내는 인간에 의지와 인내가 어디까지인가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우리네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도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삶을 보는 느낌이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런 가운데 부모는 아이들을 키우고, 아이들은 학교를 오간다. 동무와 손을 잡고, 어린 동생들과도 손을 잡고 그렇게 어우러진다. 험난한 산길과 위태위태한 집들 속에서 하루하루 삶을 이겨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함석 한 장 전해주지 못한 채, 내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빵 한 조각 주는 게 전부이다. 나는 나의 무기력함을 한탄한다.

절망 속에서도 인간이 인간을 보듬을 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저 아이에 모습을 보라!
▲ 우산 속에 아이를 보라! 절망 속에서도 인간이 인간을 보듬을 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저 아이에 모습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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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산중에 사는 네팔 사람들의 삶은, 이제 함석 한 장 얻는 게 유일한 꿈처럼 되어버렸다. 아이들은 그나마 함석과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교실에서 교육을 받으며 미래를 꿈꾸고 있다.

우리는 그런 길을 보고 오며 숱한 절망처럼 무너진 집들을 살폈다. '아휴!', '어!', '아~!' 하고 탄성과 비명 그리고 한탄을 연발하며 왔다. 해야 할 일은 많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그래도 내가 가능한 일을 하며 그들의 꿈을 함께 키워 가는데 힘을 쓸 생각이다. 이제 또 하루가 갔다.

카트만두까지 1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갈 때는 예정보다 2시간 일찍 도착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험난한 과정이 있었다. 새벽 4시에 출발한 우리는 저녁 6시가 넘어서야 카트만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2박 3일에 일정을 무사히 마친 우리 부부는 전날 도착한 대학생 최성락씨와 네팔화가 람 바하루드 타다를 집으로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다음날 귀국하는 최성락씨를 송별하기 위한 시간이다. 지친 몸을 가누기 힘들었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는 마음이다. 맥주 한두 잔을 곁들여 정신없이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지쳐 잠이 들어버렸다.


태그:#룸자타, 오컬둥가, #함석 한 장의 꿈, 우산 속에 아이, #산악지역의 피해현장, #김형효, 먼주 구릉, #돌카의 다리 붕괴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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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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