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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돌아간 후 아내와 나는 장인어른과 셋이서 담소를 나누었다. 아내에게는 참 깊은 고민의 시간일 수도 있는,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다.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와 그리고 아내의 아버지인 장인어른과 셋이서 마주앉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버지의 정이 그리웠을 아내에게 축복 같은 시간이다. 태어나 3년을 산 집에 대한 추억이 없는 아내다. 자신이 태어난 방도 모르는 가운데 마주 앉아 그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장인어른은 그런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작은 장작을 피워 물을 끓이고 있다. 전통차인 찌아를 내기 위해서다. 사위가 끼어들었지만 불편 없이 행복한 시간이다. 아내와 장인어른은 간간히 끼어든 나의 농담에 반응하며 파안대소를 하기도 하고 조금은 마음 아픈 이야기들도 나눈다. 그렇게 아침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고향집에서 20년만에 이루어진 아버지와 딸의 대화 그리고 지진으로 무너진 집을 수리한 지붕을 살펴보았다. 다락방은 아직 수리중이었다.
▲ 아버지와 딸의 대화 고향집에서 20년만에 이루어진 아버지와 딸의 대화 그리고 지진으로 무너진 집을 수리한 지붕을 살펴보았다. 다락방은 아직 수리중이었다.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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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둥가 그리고 그 지역에 작은 면소재지인 룸자타 아내의 집 옥탑방에서 창문으로 군소재지인 오털둥가를 바라다보았다. 걸어서 2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먼거리인데 지척이다. 어린 조카가 돌담길 사이에 섰다.
▲ 옥탑방에서 바라본 오컬둥가 오컬둥가 그리고 그 지역에 작은 면소재지인 룸자타 아내의 집 옥탑방에서 창문으로 군소재지인 오털둥가를 바라다보았다. 걸어서 2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먼거리인데 지척이다. 어린 조카가 돌담길 사이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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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한국에서 불법체류를 하며 일하다가 2년 전 당국에 의해 강제출국 당한 람  까지 구릉 형님은 아내의 오래된 이웃이다. 아내는 그런 이웃도 기억 못할 정도로 흐릿한 기억 속에 고향이다. 하지만 나와 결혼 후 한국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어 이제는 익숙한 인연이 되었다.

람까지 구릉 형님 집에 인사 겸해서 찾아갔다. 전날에도 찾았으나 밤늦게까지 농사일에 바빠 빵만 전하고 왔다. 한국병이라고 할 만큼 한국에서 일하다 온 네팔사람들은 여전히 네팔에서도 바쁘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람 까지 구릉 형님은 깊은 산악지역에 옥수수 밭에서 밤 11시까지 일을 하신다니 거의 철인처럼 일하는 거다. 그의 나이 60이 넘은 지 오래다.

이날 아침에도 집으로 가져온 옥수수대에서 옥수수를 따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에서 지낸 이야기, 한국에 네팔 모임들에 대한 이야기, 지금 지내는 이야기 등등 이야기가 끝이 없다. 하는 수 없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고 아침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자리를 떠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다시 200명의 학생과 교사, 교직원들을 위해 준비한 빵을 가방에 담고 커다란 비닐봉투에도 나누어 담았다. 9시 30분 아침 조회가 시작되고 10시부터 수업이 시작된다고 했다.

우리는 학교 교장 아히라즈 구릉과 통화를 마친 후 곧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하자 곧 아히라즈 교장과 인사를 나누고 조회가 진행 중인 학생들에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한쪽 편에서 사진을 찍고 조용히 동영상을 촬영했다. 양철지붕에 대나무로 엮어만든 교실이 이채롭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서글픈 사연을 안고 있다. 나의 어린 시절 분교에 교실이 없어서 잔디밭이 잘 조성된 묘지에서 보낸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장면이었다. 곧 조회가 끝났다.

대나무와 양철지붕 안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만나 빵을 전하였다. 그들의 꿈은 히말라야보다 크리라 믿는다. 빵을 전달하고 학교 측에 아내와 나의 네팔어 시집을 전했고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축원을 받는 카다를 받았다.
▲ 대나무와 양철로 지은 교실 안에 아이들 대나무와 양철지붕 안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만나 빵을 전하였다. 그들의 꿈은 히말라야보다 크리라 믿는다. 빵을 전달하고 학교 측에 아내와 나의 네팔어 시집을 전했고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축원을 받는 카다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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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와 양철지붕 그리고 작은 운동장에서 빵을 받아든 아이들과 함께
▲ 빵을 받은 아이들과 함께 대나무와 양철지붕 그리고 작은 운동장에서 빵을 받아든 아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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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도움으로 아내는 우리가 전달하는 빵에 대해 설명하고 학교 교사들과 아이들을 대동하고 온 학부형들이 조회 시간에 맞춰 줄지어 선 아이들에게 함께 빵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우리가 전하려는 빵은 모두 전달되었다. 나의 뜻과 후원인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한 사진 촬영을 하고 곧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곧 교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내와 내가 쓴 책을 선생님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는 교장 아히라즈 구릉의 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들은 교실로 향하고 자리를 잡아준 후 모든 선생님들이 교무실로 집결했다. 교장 선생의 인사 그리고 모든 선생님들이 우리의 뜻과 오늘 일에 감사한다는 마음으로 아내와 내게 카다를 걸어주었다. 뜻하지 않은 축원이었다.

네팔에서 흔한 카다 의식이지만 그만큼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소중하고 경건한 의식이고 생각지도 않은 일이기에 더없이 고마웠다. 짧은 일정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마쳤다. 빵 670여 봉지 2500여 개를 오지의 지진피해지역 학교와 병원,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전한 것이다. 행복한 아침 맑은 하늘에 구름이 멋들어지게 흘러간다.

룸자타의 돌담길, 면사무소, 옥수수밭에 엎드려 도리를 심는 산골마을 사람들, 아내와 처제 가족이 함께 룸자타 공항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 한반도를 닮은 땅 룸자타 룸자타의 돌담길, 면사무소, 옥수수밭에 엎드려 도리를 심는 산골마을 사람들, 아내와 처제 가족이 함께 룸자타 공항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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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룸자타에 있는, 네팔에서도 가장 안전한 공항으로 알려진 룸자타 공항을 구경하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아침 식사를 큰 처제 집에서 준비했다고 한다. 그 길로 식사를 위해 길을 간다. 아침 10시가 조금 넘었는데 한국의 한여름 두 시 정도의 불볕더위를 능가한다.

하지만 우리는 룸자타에 멋진 모습을 두루 보았다. 내가 보기에, 룸자타 제일의 아름다움은 돌담길이다. 그리고 밤하늘의 맑은 별이다. 우리는 그런 호사를 누렸다. 이틀 낮과 밤 동안에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불볕더위를 이겨낼 재간이 없어 그냥 낮잠을 자기로 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어둠이 내리기 전 다시 길을 잡았다.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쉬리 람 터무의 부탁을 받아서다. 그는 네팔지진 후 끝없는 걱정과 근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늙은 부모님만 머물고 있는 집안에 안부가 궁금했던 그는 우리 부부가 네팔 행을 결심한 후 곧 자신의 집을 찾아줄 것을 부탁해왔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일정도 예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오지를 찾아 빵을 전한다는 계획이 실행되는 첫날에 우리는 오컬둥가 룸자타에 가기로 했고 때맞추어 그의 부모님을 대신 찾아가 만난 것이다.

쉬리 람 터무는 자신의 집에 상태를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호소했고 우리는 그 미션을 수행했다. 그는 우리 부부에게 "수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우리 집에 안부를 전해준 사람이 없었다. 지진 이후 노심초사한 마음을 이제야 편히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왔다.


태그:#아버지와 딸의 대화, #지진 피해를 입은 학교, #대나무와 양철지붕 교실, #룸자타 공항, 돌담길, #먼주 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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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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