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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헌정파괴세력'이 이겼다. '공화파'가 패했고 '왕당파'가 승리했다. 고종석이 평한 2012년 대선의 상흔이다.

흔히 정치의 영역에서 절반을 뚝 잘라 어느 한편에 우겨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척박한 우리네 지형에서, '진실은 회색지대에 있다'란 클리셰는 양쪽에서 지탄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생각을 옳다 여기고 살아가는 이가 고종석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서른 해 가까이 진영에 구애받지 않는 언론인으로 살았다.

고종석 선집 시사 <정치의 무늬>
▲ 책표지 고종석 선집 시사 <정치의 무늬>
ⓒ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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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무늬>는 그가 과거에 쓴 시사에세이를 묶어 펴낸 책이다. 지면을 통해 조각나 있던 글들이 한 권에 담기니 그의 뚝심 있는 시선이 새삼 느껴진다. 복거일(물론 저자는 과거 대담에서 복거일에 대한 지지가 <현실과 지향>까지라고 확고하게 선을 그었다)이 보이고 칼 포퍼가 느껴지는 글들이지만, 그가 2012년 일관되게 풀어놨던 글들은 특히 흥미롭다.

저자가 평소 자신을 표현하는 '자유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우리가 우선 그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의 과거 대담집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의미는 많이 변질돼 있다. 이유는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많은 이들이 '고전적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거기다 군부독재세력이나 그 지지자들이 자유주의자를 참칭해왔단 배경도 한몫 거든다.

그가 칭하는 '진짜 자유주의자'는 공동체가 평등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 영역을 침범하는 데 반대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는 개인주의자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말했다. 그런 그가 마땅히 2012년 대선을 이렇게 평했다.

리버럴 진영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이번 12월 대선의 본질이라 여기는 것은 민주화세력과 소위 산업화세력의 대결도 아니고, 호남(플러스 알파)과 영남의 대결도 아니고, 중하층계급과 상층계급의 대결도 아니다. 이번 선거의 본질은 공화파와 왕당파의 대결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헌정수호세력과 헌정파괴세력의 대결이다. - <정치의 무늬>에서

그는 글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유권자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란 점을 거듭 지적했다. 당시 새누리당의 누군가가, 혹은 민주당의 누군가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명박 정권이 갖는 권력 핵심부의 무능과 파렴치를 따라갈 수가 없으리라 예상했다.

박근혜가 대통령, 공동체의 긍지에 심각한 손상

그러나 '상징적 차원'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2012년 대선 전) 균형이 와르르 무너진다는 것. 국사 교과서는 친일과 독재에 더욱 너그러워질 것이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종속 파시즘이 한국사에서 정통성을 부여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를 막아야 하는 이유로, 역사의 정통성이 식민주의 부역세력과 파쇼세력에게 부여된다면 그 나라 구성원이 긍지를 느끼기 힘들 것이란 점을 들었다. 

대한민국 시민들이 누려야 할 복지는 꼭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정신적 복지가 외려 더 소중할 때도 있다. 그 정신적 복지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 긍지일 테다. 민족을 배신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람의 딸이, 더구나 아버지가 한 짓은 뭐든 잘한 일이라고 우겨대는 딸이 공화국 대통령이 된다면, 대한민국 시민들의 긍지는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밥 세끼 입에 들어간다고 공동체의 긍지를 포기한다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를 게 뭔가? 그것이 박근혜가 다음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이유들 가운데 하나다. - <정치의 무늬>에서

결국 그의 우려에도 박근혜는 '대통령'이란 칭호를 거머쥐었다. 현실은 어떻게 됐는가. 안타깝게도 예측은 정확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주변을 '박정희족'들로 채우고 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유신헌법'의 초안을 만들고 유신 정권 중 4년 반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냈다. 허태열 전 비서실장도 박정희 시대에 관료 일을 시작했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과 이병호 현 국정원장은 박정희 재임 당시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급격히 기울어지는 역사인식, 경악스럽다

그뿐인가. 내각 인사청문회에서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다. 후보자들은 5.16군사쿠데타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동문서답하기 바쁘다.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류길재), "깊은 공부가 안 되어 있다"(조윤선), "그 문제에 직답을 못 드리는 이유를 이해해 달라"(서남수), "답변이 어렵다"(황교안), "역사적 사실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황찬현)는 둥 눈치 보기만 급급하다.

분명한 '쿠데타'를 두고 왜 그토록 발언을 아끼는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요구하는 건 나라의 장관과 국무위원이 된다는 책임의식이지, 대통령의 가신이나 개인비서의 자격을 검증하기 위한 아부 경쟁이 아니다.

거기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6월 22일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일본을 향해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고 말했다. 사적인 '과거사'가 있어 이를 혼자 내려놓겠다면 말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참담한 시절을 보낸 할머니들이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다.

그의 동생은 한술 더 떴다. 박근령은 지난 30일 일본 포털사이트 니코니코와의 대담에서 "(과거사와 관련한 일본의) 사과에 대해서 자꾸 이야기하는 건 우회적으로 부당하다는 생각으로 얘기를 했다"란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알려졌다. 거기다 일본 정치인의 신사참배에 대해선 "(신사참배 문제는) 내정간섭이라고 (대담에서) 이야기했다"면서 "나쁜 사람이니까 묘소에 안 찾아갈 거야, 그게 패륜이라는 것"이라고도 말했단다. 경악스럽다.

"박정희 찬양? 말리지 않겠다, 다만..."

문제는 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과연 땀 흘리는 노동의 가치를 알 수 있을까. 현재 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명분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2012년 12월 19일,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를 찾아갈 거란 느슨한 기대는 와장창 무너졌다. 저자가 쏟아낸 글들은 여러모로 2012년 대선 결과가 최악의 선택이었음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박 의원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이유는 이 밖에도 많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월급을 받아보지 못했으리라. 다시 말해, 진정한 뜻에서 노동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한국의 '보통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노동 없는 삶을 살아온 그가 지닌 재산은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그 재산을 그가 지니는 것이 정당할까? - <정치의 무늬>에서

지금 박근혜는 마치 박정희와의 '일체화'를 꾀하는 듯 보인다. 여기에 편승해 박정희를 찬양하는 세력은 물을 만났다. 이제 저자가 지적했다시피 아슬아슬 유지하던 균형점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굳이 역사 속 여러 위인을 제쳐두고 박정희를 존경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이런 제안을 한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것은 자유다. 세상에는 별 사람, 별별 취향이 다 있으니까. 그러나 그 이름을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사람 할 짓이 아니다. 무고하게 그의 손에 죽거나 다친 이들의 직계가족이 지금도 살아있으니 말이다. 꼭 그를 찬양하고 싶으면, 죽기 직전 상태에 이르도록 물 담긴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있거나 고압 전류를 온 몸에 흘려보라. 또는 인연이 닿는 조폭에게 부탁해 내장이 터져 나올 정도로 얻어맞아보라. 그러고 나서 아는 검사나 판사에게 부탁해 괜히 10년이고 15년이고 감옥살이를 해보라. 그 감옥살이 동안 역사학자 한홍구의 글을 읽어보라. 그 뒤에도 사람들 앞에서 박정희를 찬양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병은 죄악이 아니고, 병증은 설득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니. - <정치의 무늬>에서

다가올 2017년을 위해, 우리는 역사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뚜렷한 '헌정수호'와 '현대사 복원'이 아직은 요원해 보이고, 그가 쓴 과거의 글은 '현재 진행형'이 돼 가슴을 후빈다.

덧붙이는 글 | <정치의 무늬> (고종석 지음 / 알마 펴냄 / 2015.06 / 2만2000원)



정치의 무늬 - 시사

고종석 지음, 알마(2015)


태그:#고종석, #정치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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