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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타계한 스티브 잡스는 '현실 왜곡 분야(reality distortion field)'에 능통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애플의 한 엔지니어가 만든 신조어로 알려진 이 말은, 어려운 문제의 난이도를 왜곡시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게 하는 잡스의 능력을 꼬집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잡스는 이런 류의 접근법 덕분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의 낙관주의는 회사의 성취와 동료들의 충성심에 일조했다고 한다. 현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그만의 낙관주의가 창조적인 힘을 발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논지를 빌려 표현하면 인간의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모두 현실을 부정하는 본능적인 성향에서 비롯되었다. 낙관주의는 실제 현실의 비관적인 측면을, 비관주의는 실제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의 현실 부정은 실로 인간됨의 원초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진화심리학자 고든 갤럽은 침팬지를 대상으로 거울 테스트를 실시했다(이하 자기 인식 관련 실험은 크리스틴 케닐리의 <언어의 진화>에서 빌려옴.) 영장류인 침팬지가 거울 속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으로 인식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험 결과 갤럽은 침팬지가 거울 속 이미지를 자기 자신으로 이해한다고 결론 내렸다.

미국의 과학자 다이애너 라이스와 로리 마리노는 2000년에 돌고래를 대상으로 자기 인식 실험을 했다. 이들 역시 거울을 실험 도구로 활용했다. 먼저 돌고래가 거울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몸 부위에 검은색 표식을 칠했다. 수조 바깥쪽에 거울을 붙여 돌고래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관찰했다.

돌고래들은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는 거울 쪽으로 헤엄쳐 와서 몸에 칠한 표식을 확인하려고 했다. 연구자들은 돌고래가 스스로를 보려는 욕구를 가진다고 보았다.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돌고래 역시 자기 인식 능력이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런 가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침팬지나 돌고래가 자기 인식이 가능하다면 언젠가 이들은 인간처럼 진화를 거듭해 마음(정신)을 소유하고 문명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 곧 자아를 갖는다는 것은 언어와 같은 추상체를 사용하거나 같은 종 내의 다른 개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정신적 토대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의과대학 석좌교수 아지트 바르키와 애리조나대학교의 유전학자 대니 브라워는 '마음의 이론(Theory of Mind, ToM)'을 통해 이러한 전제를 반박한다. 인간과 비슷하게 자기 인식이 가능한 동물 종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이들 중 어떤 종도 자기 종의 다른 구성원들이 자기 인식을 한다는 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이 다루는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출현하게 된 진화상의 중요한 이행 과정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종이 되었으며, 매우 지적인 다른 동물들이 수백만 년 동안 진화 기회가 있었음에도 인간과 같은 정신적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한 까닭이 그러한 이해 과정의 유무에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인간이 거쳐온 진화적 이행 과정의 핵심을 'ToM'과 '부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부정은 "의식하게 되면 참을 수 없는 사고, 감정 또는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불안을 누그러뜨리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로 정의된다.

저자들에 따르면 ToM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그런데 완전한 ToM(자기를 인식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인격이 있음을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은 양날의 칼과 같다.

완전한 ToM을 처음으로 획득한 어느 특정 종의 한 개체는 자기 종의 다른 개체들도 개체성이 있음을 전적으로 이해한다. 언뜻 보기에 이런 인식은 긍정적인 것 같다. 다른 이들을 통제하거나 심지어 속일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가 속한 종의 다른 개체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나면 완전한 ToM을 지닌 개체는 자신의 필멸성과 죽음의 위험(죽음 현저성)도 깨닫게 된다. (314쪽)

완전한 ToM에 따라 인간의 필멸성을 인지하게 된 최초의 조상 인류를 상상해 보자. 저자의 말처럼 죽음에 대한 지식도 없고, 죽음의 위험을 함께 논의할 동료도 없는 그는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오늘날 우리 인류의 조상이 되어 주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저자는 완전한 ToM을 지닌 개인(들)이 필멸성과 죽음의 위험성을 부정하는 능력을 동시에 획득하기 위해 현실 전반을 부정하는 일반적인 메커니즘을 진화시켰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전반적인 현실 부정이 가능해지고 나면 죽음의 위험성에 대한 선택적인 무관심 또한 가능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완전한 ToM 획득과 필멸성의 이해는 처음에는 부정적인 특성이다. 하지만 이 부정적인 두 가지 특성이 한 개인에게서 동시에 일어나면 서로 상쇄를 일으켜 완전한 ToM을 발전시키는 개인들이 필멸성의 위험을 부정함으로써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도록 만든다.

일단 이 조합이 작은 집단에서 확립되고 나면 두 가지 능력을 지닌 개인들은 긍정적인 혜택을 많이 얻는다. 우선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능력을 포함하여 완전한 ToM의 모든 혜택을 얻는다. (316쪽)

인간의 부정 본능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를 갖는다. 저자의 말처럼 인간은 개인이나 가족, 사회, 공동체 수준의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현실을 부정한다. 그 반면에 현실 부정 성향을 시인하고 그러한 중요한 사안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다.

부정 본능의 부작용을 시인하면서 "모든 인류의 복지를 위해 아울러 우리의 생물권과 지구를 위해 현실 부정 능력을 잘 활용해야 마땅"(310쪽)한 이유다. 레오 톨스토이의 고전적인 단편 <인간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가 주는 교훈이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소설에서 파홈이라는 욕심 많은 사람이 바시키르 부족을 만난다. 부족민들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다니면서 경계를 표시해 놓은 만큼의 땅을 비교적 싼값에 몽땅 팔겠다고 파홈에게 약속했다. 다만 해가 질 때까지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했다. 파홈은 이 쉬운 일을 거뜬히 해낼 것이라고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일단 출발하고 나자 파홈은 너무 욕심을 부린 나머지 조금이라도 더 땅을 차지하려고 더욱더 큰 원을 그렸다. 제때에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깨닫자 죽자고 달려서 해 지기 직전에 되돌아왔지만 그만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바시키르 부족민들은 혀를 차면서 애석해했다. 파홈의 종은 삽을 들어 주인을 누이기에 충분히 긴 무덤을 파서 그를 묻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에게 필요한 무덤의 길이는 채 2미터가 되지 않았다." (279~280쪽)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부정 본능>(아지트 바르키․대니 브라워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5.6.26 / 400쪽 / 1,8000원)



부정 본능 -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고 잘못된 믿음을 가지며 현실을 부정하도록 진화했을까

아지트 바르키 & 대니 브라워 지음, 노태복 옮김, 부키(2015)


태그:#<부정 본능>, #아지트 바르키와 대니 브라워, #부키, #마음의 이론(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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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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