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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는 남미의 내륙 국가다. 원래 잉카 제국의 일부였다가 16세기에 스페인에게 정복을 당해 200년 간 식민 지배를 받았다. 1809년에 독립을 선언한 이후 16년 간 전쟁을 치른 끝에 1825년 공화국을 건립했다. 공화국 출범 이후 1981년까지 193번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볼리비아가 비교적 안정된 나라가 된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 다국적 기업 벡텔에 상하수도 운영권을 팔아버리고, 일방적인 민영화에 따라 수도료가 100퍼센트 인상되면서 벌어진 2000년 '물 전쟁', 대표적인 천연자원 중 하나인 천연가스의 미국 수출 계획에 반대하여 일어난 2003년의 '가스 전쟁'을 호되게 겪은 뒤였다. 그 최전선에 볼리비아 제80, 81대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와 그의 정치적 탯자리인 MAS(사회주의운동당)이 있었다.

2004년까지 볼리비아는 라틴아메리카에서 한 번이라도 대중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는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그러니까 투쟁의 물결은 민중의 분노가 갑자기 분출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볼리비아에서 정치가 기능하는 방식에 반대하는 기나긴 결집의 결과였다. (중략) 투쟁하는 동안 대중이 제기한 요구에 대한 거부가 공동의 부정적인 관점을 이루었다. 이를 통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회적 부문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182~183쪽)

<탐욕의 정치를 끝낸 리더십, 에보 모랄레스>는 200여년 볼리비아 공화국 역사에서 첫 토착민 대통령으로 연임에 성공한 에보 모랄레스의 리더십을 분석한 책이다. 볼리비아에서 광범위한 현장조사를 벌인 저자는 모랄레스 대통령을 기준점으로 삼아 소수의 기득권층이 독점하고 있던 권력을 볼리비아 민중이 되찾게 된 과정을 통시적으로 살폈다.

저자가 주목하는 모랄레스 리더십의 핵심은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볼리비아는 오랫동안 '대표성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시민들은 정치가가 시민의 이해를 대표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었고, 정당은 오직 소수 특권층의 배타적인 이익을 위해서 행동"(125쪽)했다.

반체제 담론을 갖고 있던 모랄레스와 MAS는 '대표성의 위기'라는 외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여기에서 모랄레스의 '특별한' 리더십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모랄레스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점점 수가 늘어나는 여타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MAS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정당과 사회운동의 융합이라는 게 내 주장이다. (중략) 모랄레스는 사회운동의 급진주의와 정당의 정치적 실용주의 사이로 당을 움직였다. 한 발은 공식적인 정치무대에 두고 다른 발은 시민사회의 비공식적 정치무대에 두는 전략이 그 핵심적인 특징이었다. (137쪽)

모랄레스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짜고 퍼뜨린다. 크게 두 가지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먼저 이해관계로 얽힌 차이를 극복하게 함으로써 민중의 연대와 통합을 가능하게 한 상징주의가 그 하나다.

모랄레스는 미국에 의한 마약과의 전쟁과 물 전쟁, 가스 전쟁을 볼리비아 천연자원의 수탈과 패전의 프레임으로 재구조화했다. 이들 전쟁은 "국가주권의 수호"를 위한 싸움으로 명명되었다. 코카와 물과 가스는 볼리비아 민중이 아무런 이득도 없이 외국의 이해에 '빼앗긴' 천연자원의 상징으로 제시되었다.

모랄레스는 '민중' 이미지도 새롭게 구축했다. 이에 따라 민중은 고난 받는 성실하고 정직한 희생자로 새롭게 자리매김되었다. 그가 즐겨 입는 간소한 풀오버 스웨터는 검은 정장 차림의 정치가들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혜택받지 못한 아웃사이더를 표상해 주었다.

저자에 따르면 모랄레스는 개인사를 이용하여 자신을 희생자이자 희망의 상징으로 그림으로써 사회적으로 혜택받지 못하고 민영화로 밀려난 사람들 사이에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민중의 진정한 대변자로서의 위상을 구축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일화는 이러한 변화가 볼리비아의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지를 강력히 시사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모랄레스와 MAS가 이룬 성공의 중요한 요소는 모랄레스가 자신을 현상유지의 희생자인 '민중'의 전형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략) 모랄레스를 민중의 표상으로 삼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긍정적인 부수효과, 즉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국가의 최고위직에 대한 포부를 갖도록 고무하는 효과를 낳았다. 한 어린 소년의 답변이 그 좋은 예다. MAS가 도입한 '후안시토 핀토 가족보조금' 25달러를 받으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모랄레스의 물음에 그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처럼 되기 위해 준비할 것입니다." (247쪽)

에보 모랄레스는 16세기 스페인 침략 이후 470여년 사이에 토착민으로서 최고 통치자가 된 유일한 예다. 그는 어린 시절 라마와 양을 돌본 가난한 양치기 소년이었다. 10대 시절에는 벽돌제조공, 일용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성년이 된 뒤 박해 받는 민중들의 운동(코카재배자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국내 언론에서 모랄레스는 '급진적인 좌파 포퓰리스트' 정도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처럼 모랄레스 대통령은 다리 한쪽은 기존 질서 내 공식 제도권 안에, 다른 한쪽은 제도권 밖 사회운동의 영역에 걸쳐놓고 있다. 정치적 결정 과정은 치열한 토론과 기나긴 설득으로 이루어진다. 대의민주정치의 기본 정신에 충실한 대통령의 자질이 아닐까.

모랄레스 대통령 주변에는 신뢰하는 조언자들이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모랄레스 대통령은 자국의 보통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생각을 타진한다.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이 구중심처에서 극소수의 '의리파' 측근들에 둘러싸여 불통, 독단, 독선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동아시아 어느 나라의 국민으로서 부러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탐욕의 정치를 끝낸 리더십, 에보 모랄레스>(스벤 하르텐 지음, 문선유 옮김 / 예지 / 2015. 7. 13 / 357쪽 / 2,3000원)



탐욕의 정치를 끝낸 리더십, 에보 모랄레스

스벤 하르텐 지음, 문선유 옮김, 예지(Wisdom)(2015)


태그:#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코카재배자 운동, #사회주의운동당(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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