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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1심과 2심의 판결을 뒤집고 KTX 해고 여승무원들에 대해 한국철도공사에 소속된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 시위에 나서는 여승무원들 대법원이 1심과 2심의 판결을 뒤집고 KTX 해고 여승무원들에 대해 한국철도공사에 소속된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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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죽었다. 3월의 새벽이면 아직 어두웠을 시각. 그녀의 절망만큼이나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방에는 세 살짜리 아이와 남편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전하는 그녀들은 억이 막힌 채 꺽꺽 소리를 내며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설움이 북받쳐 가슴이 막히는데 야단맞을까봐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아이처럼. 슬픔도 체한다. 눈물에도 때가 있다.

울 땐 울어야 보내지고, 슬퍼할 땐 슬퍼해야 덜어진다. 누구보다 슬프고, 놀랐고, 같은 피해자로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따뜻이 위로받아야 할 그녀들은 죄책감의 사슬에 발목이 패이도록 묶여있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조여드는 수갑처럼 울면 울수록 심장을 파고드는 사슬. 내겐 금식씨의 죽음이 그렇다. 하필 일본에 있기도 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추모제 한 번을 못 지내고 장례조차 참석하지 못했던 죽음.

길에서 금식씨랑 뒷모습이 비슷한 사람을 따라가기도 하고, 상규형이 입원했을 때 금식씨한테도 알려야 하는데 생각하다 흠칫하고, 전체 조합원들이 모인 자리에선 요새 왜 금식씨가 안 보이지 무심코 생각하다 또 가슴이 선뜻해진다. 미처 이별도 못했는데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파기환송'에 내내 울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

대법원이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에 직접고용을 요구했다가 해고된 전 KTX 승무원에 대해 1·2심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코레일의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린 가운데, 지난 3월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에서 KTX 승무원 조합원과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부당판결을 규탄하며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 아이 안고 다시 거리로 나온 KTX 승무원 대법원이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에 직접고용을 요구했다가 해고된 전 KTX 승무원에 대해 1·2심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코레일의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린 가운데, 지난 3월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에서 KTX 승무원 조합원과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부당판결을 규탄하며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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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선고가 있던 날. 멀리 충청도에서 그녀가 왔더란다. '파기환송' 선고에 내내 울다가 눈물을 채 추스르지도 못하고 아이 때문에 서둘러 다시 먼 길을 떠났다 했다. 그 모습이 그녀들이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 따뜻한 인사라도 건넸다면, 모래알 같은 밥이라도 한 그릇 나눠먹고 헤어졌더라면 덜 아팠을까. 그랬다면 덜 미안했을까. 재판에 지면 물어내야 한다는 8640만원. 그 후 그녀들의 통화의 주제는 가압류니, 명의이전이니, 이혼이니 이런 사나운 단어들이 생경스럽게 오갔다.

불안하지만 간신히 지탱되던 일상이 발밑에서 다시 흔들리는 예감. 일상을 빼앗겨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그게 얼마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일이지. 신들의 나라에서 지축이 흔들려 수천 명이 거대한 무덤에 묻힌 건 천재지변이었지만, 수백 명의 희망과 간절한 소망과 십년세월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건 인재였다. 약자의 마지막 희망을 무참히 짓밟은 법이라는 인재.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대법원에서 상식과 정의를 외면한 참사.

2심에서 이기던 날. 그녀들은 말했다.

"그동안 우릴 비난했던 사람들도 많았거든요. 우린 시험쳐서 정규직이 됐는데 니들은 떼를 써서 정규직이 되려하냐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2년만 있으면 정규직 해준다고 약속해놓고 그 약속을 어긴 철도청은 마치 우리를 거짓말쟁이로 비난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진실이었던 게 밝혀졌잖아요. 우리가 옳았다는 게 증명된 거잖아요."

그 기쁜 말조차 그녀들은 펑펑 울면서 했다. 그게 다시 뒤집힌 거다. 십년의 눈물이 외침이 절규가 외면당한 처절한 절망. 이제 어느 거리에 서서 어떤 말로 다시 외쳐야 하나. 얼마나 더 울어야 하나.

무죄를 믿어 의심치 않고 재판받으러 간 자리에서 법정구속이 선고되고 그 자리에서 철컥철컥 수갑이 채워지고 오랏줄에 묶이면 그럴까. 그 경우엔 그래도 형기라도 있다. 얼마를 살면 풀려난다는 기약이라도 있다. 기약없는 절망만큼 무릎이 꺾이는 일이 또 있을까. 저들은 그녀들이 각자 물어내야 하는 돈이 8640만 원이라고 살뜰히 계산했지만  25층에서 몸을 던진 그녀의 절망은 얼마치였을까. 십년세월을 잃고 세 살짜리 아이를 품에서 내려놓고 늦겨울 새벽의 25층 난간에 섰던 그녀의 슬픔은 얼마짜리였을까.

2년을 다니고 4년을 싸웠다. 그리고 4년을 기다렸다. 우리의 요구는 2년후에는 정규직을 시켜주겠노라는 약속을 지키라는 것뿐이니 길어봐야 한 달을 넘지 않으리라 믿었던 싸움이었다. 경찰들에게 사지를 들려 끌려가기도 하고, 엄마들이 보는 앞에서 닭장차에 실려 연행되기도 했다.

건국 이래 가장 민주적인 대통령의 정부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이가 사장으로 있던 사업장에서 있었던 일들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참한 일들이 눈앞에서 시시때때로 벌어졌다.

'차라리 쭉 지는 게 나을 뻔 했어요'

대법원이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에 직접고용을 요구했다가 해고된 전 KTX 승무원에 대해 1·2심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코레일의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린 가운데, 3월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에서 KTX 승무원 조합원과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부당판결을 규탄하며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 서로의 안부 묻는 KTX승무원 대법원이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에 직접고용을 요구했다가 해고된 전 KTX 승무원에 대해 1·2심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코레일의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린 가운데, 3월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에서 KTX 승무원 조합원과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부당판결을 규탄하며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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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날마다 울었던 싸움. 하루에도 몇 번씩 울었던 싸움. 집회, 단식, 삭발, 천막농성, 점거농성, 고공농성. 안 해 본 게 없었다. 그렇게 힘겨운 싸움은 법정으로 이어졌고 1심에서도 이겼고, 2심에서도 이겼다. 같은 대법관(고영한 주심)에 의해서 파기환송당한 쌍차해고자가 그랬다. 차라리 쭉 지는 게 나을 뻔 했어요. 천국에서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니까 정말 힘드네요.

이미 4개월이 지나 있었다. 뒤늦게 찾은 공원묘지. 그날은 공교롭게 내가 해고된 지 딱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동생이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차안에서, 기력이 딸리면 끊어졌다 한웅큼의 기력이 채워지면 다시 이어지곤 하던 큰언니의 울음소리처럼 비가 내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듯하게 늘어서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묘지석들. 저 중에서 서른다섯살의 새파란 무덤을 찾아야 한다. 처음엔 꽃이 놓이고 화분이 놓인 '예쁜' 무덤들을 찾느라 무덤들 사이를 두 바퀴를 돌았다.

왜 그랬을까. 왜 무덤마저 예쁠 거라 생각했을까. 노숙농성의 와중에서도 늘 단정하고 모자 하나도 반듯하게 각 맞춰 쓰고 단체티를 입고도 저마다 반짝거리던 모습이 남아서였을까. 가장 쓸쓸하고 텅 빈 묘지. 거기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결혼식 때 찍은 걸로 보이는 손톱만한 사진. 분명 웃고 있는 사진이련만 빗물이 번져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2015년 3월 16일 졸. 대법판결 18일 후였다.

이름과 생몰 일시 외에는 텅 비어있던 묘지석. 10년을 외쳤으나 끝내 외면한 세상에 남긴 기나긴 침묵. 엄마를 기다리다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로 쓰러져 잠든 어린아이 같은 하얀 국화꽃이 그 쓸쓸한 묘비 위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존재를 부정당하고 영혼이 으깨지는 듯 했던 2월 26일의 대법판결은 잊은 채 훨훨 하늘로 갔을까. 피를 토하듯 울었던 그 무수한 눈물들은 다 마른 채 갔을까. 가슴이 미어지고 억장이 무너지던 그 숱한 순간들은 다 내려놓고 갔을까. 죽어서라도 정규직이 됐을까. 생애 가장 벅찬 순간이었고, 온가족의 자랑이었던 승무원으로 죽어서라도 복직을 했을까.

올해 만 30년을 해고자로 사는 난 더 나이가 들어 혹여 치매가 오더라도 다른 기억은  다 잊어도 한진으로 가는 길은 안 잊을 거 같다. 30년 다니고 정년퇴직한 아저씬 치매에 걸리면 고향을 찾아갈테지만 5년 일하고 30년을 해고자로 산 나는 한진중공업을 근방을 뱅뱅 맴돌 거 같다. 우리조합원들마저 날 잊고 노동조합도 날 잊는다 해도 내 기억 속에 또렷이 살아있는

단 하나의 세포. 그게 해고자다. 해고자는 그렇게 산다. 늘 미완인 삶.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삶. 편하고 행복하면 불안해지는 삶. 어느 집 파스타가 맛있고, 어느 브랜드의 구두가 잘빠졌더라는 친구들의 수다에 문득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드는 삶.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먼 바다 홀로 동동 떠있는 섬이 되는 삶.

서른 넷에서 하나가 줄었으니 서른 셋. 그마저도 결혼으로, 육아로 형편과 마음이 여의치 않아 열댓명이 다시 일인시위를 시작했다.

얼마나 서글프고 얼마나 신산스러웠을까. 그 마음을 알기에 다시 서는 그녀들이 고맙다. 그래서 형편이 되는대로 일요일 오후 부산역엘 나가 볼 생각이다. 걸리적거리는 거 외엔 딱히 다른 용도가 없더라도 그냥 곁에 서 있기라도 할 생각이다. 멀리 충청도로 이사가 살면서 세 살짜리 아이가 딸린 그녀가 "낼 모레 부산역 일인시위에 갈께요"라고 마지막 카톡을 남겼다는 그 자리.

3년 전 가봤던 베트남 구찌터널을 그녀들과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체구가 작은 사람이 겨우 들어갈만한 작은 땅굴. 그러나 땅속은 개미굴보다 복잡하고 치밀했다. 몸뚱아리가 가장 작은 부피로 접힌 채 한참을 들어가 숨이 막힐 때 쯤 넓은 공간들이 나왔다.

땅속에 식당도 있고, 주방도 있고, 회의실도 있고, 병원도 있고, 가장 놀라운 것은 아이를 낳는 조산원이 있다는 것. 세상에 전쟁 중에, 그것도 땅굴 속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니!

놀란 우리에게 안내해주시던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삶이라고. 삶은 그렇게 끈질기게 이어진다고. 전쟁엔 승패가 있지만 삶에는 승패가 없다고.

7월 24일, 그녀들의 파기환송심이 열린다. 그녀가 죽어서라도 복직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

○ 편집ㅣ장지혜 기자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김진숙 입니다.



태그:#K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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