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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좋아하던 노래나 시·소설의 작가가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서글픈 경험이다. 이미 친일파로 잘 알려진 최남선·이광수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봉선화>와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마저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서글픈 경험이었다.

물론 노래나 문학작품 자체에 친일 내용이 담기진 않았겠지만, 친일파의 가슴과 머리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꺼림칙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을까? 작품 속 어딘가에 친일 메시지가 담겨 있는 건 아닐까? 이제껏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내 의식 속에 '친일 바이러스'가 침투한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 수도 있다.

꺼림칙함을 주는 것은 비단 문학작품만이 아니다. 어쩌면, 대한민국 법질서를 지배하는 최고의 규범인 '대한민국 헌법'도 그런 느낌의 원천일지 혹시 모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헌법제정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 시절과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 법률 정비를 주도한 유진오(1906~1987년)도 아주 명확한 친일파였기 때문이다.

헌법 초안 만든 유진오 "반도인은 일본 국민, 국어는 일본어"

유진오.
 유진오.
ⓒ 위키피디어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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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 박사'로도 많이 불리는 유진오는 법률가뿐만 아니라 야당 총재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1965년에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고, 1967년부터 신민당 총재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인 적도 있다. 양김 시대 혹은 3김 시대가 개막되기 직전에 야당 지도자를 지냈던 인물이다.

야당 지도자가 되기 전에 유진오는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로 더욱더 유명했다. 1948년에 국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헌법기초위원회는 유진오의 초안을 원안으로 삼고 권승렬의 초안을 참고안으로 해 헌법안 심의를 진행했다. 그러니까 유진오 초안을 중심으로 헌법제정이 진행됐던 것이다. 유진오는 7월 17일이 제헌절이 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그랬기 때문에, 1948년 헌법의 상당 부분은 유진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아홉 차례 개정된 역대 헌법은 모두 1948년 헌법을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헌법의 내용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지금의 헌법(1987년 헌법) 속에도 유진오의 숨결이 살아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초안을 중심으로 헌법제정 작업을 진행했다는 점 외에, 유진오는 또 다른 측면에서 한국의 헌정 질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대통령제 국가라서 총리 제도가 불필요한 대한민국에서 허수아비 총리, 방탄 총리를 두게 된 배경도 바로 이 유진오한테서 발견할 수 있다.

헌법기초위원회의 작업을 지켜보던 1948년의 미군정과 이승만 국회의장은 유진오 초안 중 일부 조문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총리 중심의 의원내각제였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선호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군정과 이승만은 유진오 초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기 직전에 제동을 걸었다. 권력을 가진 쪽이 이렇게 나왔기 때문에, 유진오 초안은 그쪽 요구대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제를 넣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유진오 초안과 이승만 수정안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타협적인 절충이 이루어졌다. 유진오 초안에 있던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지 않는 대신,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무총리 제도였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제에 불필요한 총리 제도가 우리 헌법에 들어가게 되었다.

총리 제도는 일본 같은 의원내각제나 프랑스 같은 이원집정부제(대통령제+의원내각제)에서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같은 대통령제에서는 불필요한 제도다. 그런데도 이것이 우리 헌법에 규정된 것은 유진오 초안과 이승만 수정안이 절충된 결과였다. 이처럼 유진오는 의미 없는 총리 제도를 탄생시키는 데도 일정 정도 기여했다.

1948년 당시에 국회의사당이 있었던 서울 경복궁 구내의 중앙청 건물(구 조선총독부 청사). 사진은 1945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수립 기념 축하식이 열리는 장면이다. 광화문광장 옆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1948년 당시에 국회의사당이 있었던 서울 경복궁 구내의 중앙청 건물(구 조선총독부 청사). 사진은 1945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수립 기념 축하식이 열리는 장면이다. 광화문광장 옆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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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을 열심히 만든 것처럼, 유진오가 열심히 한 게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친일 활동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한 유진오는 보성전문학교 법학 교수 활동을 하면서 소설가로도 왕성한 활약상을 보였다. 스물두 살 때인 1927년에 <스리>라는 단편소설로 등단한 뒤 그는 저명한 문인으로도 맹활약했다. 

조선인이 교수로서 글을 잘 쓴다! 이 점은 일본 입장에서 매력적인 요소였다. 유진오는 조선총독부의 관심을 끌 만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총독부는 중일전쟁을 벌일 때인 1939년부터 유진오를 군국주의 선전작업의 선봉에 앞세웠다. 이에 따라 유진오는 교수라는 지위와 문장력이라는 재주를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해 바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마지막 6년을 보내게 되었다.

일본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단결해서 서양에 맞서면서 번영을 추구하자고 만든 게 대동아 공영권 이론이다. 유진오는 강연과 기고 등을 통해 대동아 공영권 이론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대동아 공영권 이론의 나팔수였다.

또 유진오는 청년들에게 일본군 입대를 열심히 독려했다.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를 참관한 뒤에 그는 일본군 병영 생활에 대한 호기심을 유도하는 글을 대중적 잡지인 <삼천리> 1939년 12월호에 기고했다.

이 글에서 유진오는 지원병 훈련소의 훈련은 물론이고 식사와 숙소도 훌륭하다고 극찬하면서 "(그 속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굳센 힘도 우러나올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일본군 훈련소는 아주 좋은 곳이니까 그런 곳에서 군인 생활을 할 만하다고 홍보한 것이다.

유진오는 우리말을 말살하는 데도 간여했다. 일본어로 말하고 일본어로 작품을 쓰자는 주장을 열심히 홍보한 것이다. 1942년 12월 <경성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반도인은 일본 국민이고, 국어는 일본어"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우리는 일본어를 쓰는 일본 국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어 보급과 일본어 창작활동의 중요성을 홍보하는 데도 앞장섰다. 

유진오는 1943년 <문화보국>에 기고한 글에서는 동료 작가들을 상대로 "(우리는) 황국 일본의 일익으로서 일본 정신, 일본 문화를 아시아 전역에 전달해야 할 사명의 일단을 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일본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서 문학 작품을 창작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한국인들의 집에서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다 공출해 갔다. 그래서 웬만한 집에서는 쇠붙이가 남아나지를 않았다. 유진오는 쇠붙이 공출에도 간여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쇳조각>이라는 소설을 통해 쇠붙이 공출을 아름다운 일로 묘사했다. 할아버지가 남긴 쇳조각들을 나라(일본)에 바치고 자랑스러워하는 손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이것을 미화함으로써, 쇠붙이 공출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전투적인 친일 활동을 가운데, 유진오는 일본의 승리에 대한 대중의 확신이 줄어들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글과 강연을 통해 '일본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격멸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하자고도 역설했다.

일본 패망 후, 미군정에 들어가 법률정비 작업 가담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유진오는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유진오는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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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심히 친일을 했건만, '유진오의 나라, 일본'은 패망했다. 그래서 1945년 8월 15일에 유진오의 처지는 전날까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상태로 추락했다. 이 점은 8월 16일의 사건에서 드러난다. 8월 16일의 작가 모임에 나갔던 그는 동료 작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쫓겨났다.

하지만 유진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문학적 창작능력 외에도 법학 지식이 있었다. 이 법학 지식이 그를 살렸다. 해방 3주 뒤인 9월 8일 미군정이 선포된 뒤로, 한국의 법률제도를 정비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유진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군정에 들어가서 법률정비 작업에 가담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고 대동아 공영권을 수립하자고 외치던 유진오는 이제는 친미 협력자로 변신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예전의 위상을 찾은 상태에서 1948년에 그가 만든 '걸작'이 바로 '대한민국 헌법'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유진오 인생에서 최고의 작품이었다. 

해방 전날까지만 해도 열심히 친일을 하다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그는 헌법 초안을 작성하면서 과연 어떤 나라를 생각했을까? 그는 민족과 나라에 대한 애정을 조금이라도 갖고서 헌법을 기초했을까?

그런 친일파가 만든 헌법이 그동안 아홉 차례의 개정을 통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유진오 초안과 많이 다른 상태이지만, 그래도 이 헌법에는 친일파 유진오의 숨결과 흔적이 남아 있다. '유진오의 작품'을 보면서 착잡하고 서글픈 느낌을 갖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결벽주의라고 해야 할까?

○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개헌절, #헌법, #유진오,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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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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