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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여행은 짐이 많아서 불편하지요. 한국에서 가져오실 것은 전혀 없습니다. 저희 집에서 편하게 지내세요."

어느 날, 스위스에서 날라온 비공식 초청장이다.

"집이 작고 좋은 말로 검소하게 산다고 표현하지만 대부분 놀라지요. 다 버리고 사는 모습이어서 그런가 봐요. 보이는 것 같이 가난하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친구나 가족들은 저희한테 마음 편하게 지내다 가고 또 오지요. 정풀님 부부도 그렇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아마도 7~8년 전일 것이다. 만난 장소는 '오래된 미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실재하지 않는 인터넷카페 마을이다. 그 가상의 공동체 마을의 마을 원주민이자 세계시민인 내 이름도 호적과는 달리 '정풀'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멀리 스위스에서 오래된 미래 마을에 보내는 이메일 편지로 조국과 고향의 소식을 전해 듣곤 했나 보다. 오래된 미래 마을이 마치 고향 고흥의 마을 같았나 보다. 그 마을에서 정풀이라는 주민이 아등바등 어설프게 살아가는 모습이 어쩌면 고향 마을의 어느 주민의 모습 같았나 보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조국의 오래된 미래 마을로 띄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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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에 문을 연 초콜렛 카페에서 아그네스와 -
ⓒ 안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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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간혹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담아 카페에 짧은 단상을 올리곤 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같은 계절이면 스위스의 초콜릿을 선물하기도 했다. 나는 답례로 내가 쓴 책을 몇 권 보냈다. 또 너무나 멀고 낯선 유럽의 이국적인 풍경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주곤 했다. 때론 희소식을, 때로는 안타까운 소회를.

"통일된 독일이 참 부러웠다. 부러워 애써 외면하다가 10년이 넘고 시간이 또 흐르고…그러다 서울의 조카가 겨울 방학여행으로 뉴욕에서 쮸리히에 도착한 날, 그 아이를 앞세우고 백림으로 간다. 동서 백림(베를린)의 지하철을 타고 돌면서 그 당시 그분들(동백림 사건 피해자들) 생각하다 말을 잃다."

올해 새해 인사도 잊지 않았다.

"서로 많은 복을 받자는 그 말조차 하기 부끄러워 새해 인사도 못 하고 해가 바뀌었네요. 잘 지내시지요? "

그동안 그녀가 내게, 아니 고국과 고향 사람들에게 띄운 짧은 편지 가운데 특별히 잊히지 않는 게 있다. 지난 2012년 12월 19일, 대선이 치러진 날이다. 

"많은 사람이 투표에 참여했으면 합니다. 결과에 따라 저 자신이 국적을 옮기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그녀는 이렇게 글을 올렸다.

"이제 저는 스위스 국적을 취해야겠습니다."

나도 그날 선거결과에 충격을 받고 비몽사몽 꿈과 생시 사이를 헤매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 글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멀리 스위스에서 날아온 말로 인해, 형언하기 어려운 절망감을 접하고 겨우 힘을 내 몇 자 답신을 올렸다. 

"저는 다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나서지 않겠습니다. 그냥 '마을시민'으로, 또는 세계시민으로 살겠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녀님이 소록도에서 스위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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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리히호숫가 볼리스호펜(Wollishofen)의 아파트에서 3박4일 난민생활 연습을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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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그녀를 부르는 이름은 아그네스. 영세명이다. 한국 이름은 김재옥. 고향은 소록도가 있는 전남 고흥. 나이는 50대 중반. 사회학을 공부했다는 남편을 스위스의 하늘나라로 먼저 보냈다. 지금은 치과의사이지만 개업을 하지 않고 록 밴드에 빠져 사는 자유인, 30대 아들 '비호'와 둘이 산다.

직업은 간호사. 30년 전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다 스위스로 넘어왔다. 오스트리아에서 소록도로 건너온 오스트리아 수녀님이 그녀를 스위스로 보냈다. 스위스 병원에서 한국 간호사 한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그녀를 낙점한 것이다. 서로 태어난 나라와 사는 나라를 맞바꾼 셈이다.

그 수녀님들은 이제 소록도에 없다. 애초 소록도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작정했으나 몸이 아파 그럴 수 없었다. 소록도 주민들에게 짐이 되기 싫었다. 그래서 10여 년 전 조국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 돌아갔다.

요즘 아그네스는 그 수녀님들을 만나러 인스부르크의 수도원을 자주 찾는다. 수녀님들은 그곳에서 3평 남짓한 방 한 칸에 살며 소록도와 한국을 그리워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방문 앞에는 평생 좌우명처럼 삼았던 경구가 한글로 쓰여있다고 한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두 수녀님은 소록도에 1960년대 초반에 들어갔다. 20대 꽃다운 청춘이었다. 육지와 세상 사람들과 격리된 소록도에서 40년 넘게 '할매'소리를 들을 때까지 한센병 환자를 가족처럼 돌봤다. 소록도 주민들은 수녀님들을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로 불렀다.

오스트리아 수녀님 두 분은 한국에서 꽤 유명하다. 신화 같은 미담 때문이다. 2005년 겨울 새벽, 아무도 모르게 마치 야반도주 하듯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기고,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서. 소록도 주민들이 송별식을 마련하는 것도 미안했던 것이다. 그 사연은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한센병 환자 등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 넘게 두 수녀님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소록도 주민들에게 두 수녀님, 마리안 수녀와 마가레트 수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전라도 사투리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두 수녀님을 소록도 사람들은 '할매'라고 불렀다. 오스트리아의 이국인이 아니라 소록도 사람으로 대접한 것이다.

두 수녀님의 인간애 실천은 일반인의 인격과 품성을 초월한다.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한센병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 한센인 자녀를 위해 영아원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 정착사업에 헌신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오스트리아 국민인 이들에게 국민포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을 정도다.

수녀님들이 소록도를 떠나며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남긴 편지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감동적이다. 남의 일로 들리지 않는다. 인간과 공동체와 정의가 자꾸 사라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

반호프 거리에서 취리히 호수까지 난민생활 연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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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마트(Limmart) 강변 로마시대에 만든 중세의 골목길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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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출신 한국인 간호사 아그네스가 사는 취리히는 스위스 최대도시다. 알프스 산, 취리히 호, 리마트 강의 거대한 자연이 취리히의 풍광을 결정하고 있다. 인간은 취리히의 운명을 결정했다. 로마인들이 BC 58년경에 이 지역을 점령했다. 아직도 시내 한복판 리마트 강변에는 당시 로마인들이 건설한 돌로 포장한 골목길이 남아있다.

취리히는 재정과 공업의 도시로 일컬어진다. 유럽은 물론 세계금융의 중심지다. 역사적으로 상인들이 도시에 정착해 유럽 교역로를 이으면서 재정과 공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취리히 중앙역에서 취리히 호수까지 1.3km에 이르는 반호프 거리(Bahnhofstrasse)를 걷다 보면 취리히시의 위상이 실감 난다.

보행자전용도로라서 자동차는 다니지 못하고 전차(Tram)만 운행하는 반호프 거리에는 양쪽으로 세계적 금융기관, 명품상점, 카페 등 초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사이 사이로 거대 생활협동조합 미그로(Migros)와 코프(Coop)가 서로 경쟁하듯 성업 중이다. 규모나 사세는 일반가게가 아니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수준이다. 서울 명동에 이어 세계에서 9번째로 임대료가 비싼 번화가라 할 만하다.

유럽의 명품도시 취리히에는 현대는 물론 중세도 조화롭게 공존한다. 역사적 중세의 취리히가 현대 취리히의 무게중심까지 경건하게 다잡고 있다. 9세기에 수녀원으로 건축된 고딕양식의 프라우뮌스터(Fraumuenster) 성당(성모성당)은 푸른 첨탑을 보고 찾아가면 된다. 성당 안에 사진도 못 찍게 할 정도로 보물처럼 보존되고 있는 샤갈의 마지막 작품 스테인드글라스를 놓치면 후회한다.

지름 8.7m의 유럽 최대 시계탑이 있는 성 피터 성당( St.Peter Kirche, 성 바오로 교회)은 지척에 있다. 리마트강 동쪽 건너편에는 그로스뮌스터(Grossmuenster) 성당이 보인다. 츠빙클리 목사가 종교개혁을 역설한 곳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이다.

굳이 명소를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 취리히 중심가에는 관광명소가 따로 없는 듯하다. 걷는 골목, 쉬는 광장, 깃드는 건물, 기웃거리는 상점들이 모두 저마다 유럽과 취리히의 역사와 사연을 간직한 명소로 다가온다. 한겨울 장미꽃을 그득하게 띄워놓은 어느 광장의 분수대를 보고 나는 취리히를 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아그네스의 집은 취리히 볼리스호펜(Wollishofen) 지역에 있다. 취리히시 남쪽 취리히 호수에서 멀지 않은 중산층 아파트 단지로 보인다. 아프리카 등에서 건너온 난민들도 더러 섞여 산다고 했다. 그 아그네스의 집에서 나는 3박 4일 동안 소중한 난민연습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동네마다 촘촘히 자리 잡고 있는 협동조합마트 미그로(Migros)에서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인 빵과 치즈를 사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취리히 호숫가까지 마치 동네주민처럼 한 바퀴 산책을 돌았다.

취리히 호는 태평양같이 넓고 태평스러운 자태다. 이른 아침이나 이른 저녁에 가보면 멀리 눈 덮인 알프스 산 위로 번지는 노을이 신비스러웠다. 그 정도 되면 대자연이라고 할 만했다. 그렇게 기원전 8000년에 이룩된 빙하호수의 자연 질서와 섭리에 기꺼이 순응했다. 점심부터 오후 늦게까지는 반호프 거리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레닌과 아인슈타인도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세와 근대, 현대를 마음껏 공유하고 공감했다.

아인슈타인과 제임스 조이스가 살았던 난민의 도시 취리히. 로자 룩셈부르그와 레닌이 살았던 혁명을 준비하는 도시 취리히. 나는 취리히에서 세계시민 행세를 하고 돌아다녔다. 멀지 않은 훗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단 하루라도 살고 싶은 마지막 욕심을 단련하고 또 단련했다. 비록 난민의 처지일지라도 얼마든지. 좀 두렵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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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리히시의 중심가 보행자전용도로 반호프 거리(Bahnhof Strasse)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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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정훈 기자



태그:#취리히, #소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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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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